
김 회장이 처음부터 달팽이 분양 사업으로 달팽이엑기스 건강식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달팽이 분양 사업만으로도 돈을 꽤 벌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달팽이 분양 사업이 잘된다니까 갑자기 경쟁 업체가 40여 곳이나 생겨났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든 한탕주의자들 때문에 시장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천호식품은 종패 한 마리당 5000원에 분양을 받아 달팽이를 양식해 오면 1㎏당 5000원씩 수매를 했다. 그런데 한탕주의자들이 나타나 2만 원에 수매해 준다며 종패를 팔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들이 종패를 팔아 치운 뒤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종패를 구입한 양식업자들은 양식한 달팽이를 팔 길이 없자, 천호식품에서 종패를 분양받은 농장에 헐값에 넘겼다. 그 결과 모든 양식 달팽이가 천호식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 천호식품이 분양해 준 달팽이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던 김영식 회장은 일단 모두를 받아줬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많았다. 레스토랑이든 포장마차든 술집이든 가리지 않고 납품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달팽이를 삶아 껍데기를 버리고 냉동 창고에 보관하는데도 양이 넘쳐났다. 급기야 굴착기로 땅을 파서 달팽이를 묻어야 했다. 행운을 안겨준 달팽이가 어느덧 김 회장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다 ‘그래, 몸에 좋은 달팽이로 건강식품을 만들어보자!’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는 즉시 부산 남구 대연동에 200㎡ 정도의 지하 공장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천호식품이란 회사 명의로 제1호 건강식품이 탄생했다. 제품명은 ‘달팽이엑기스(진액)’였다.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공장을 차려 덤볐지만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하루 판매 실적이 고작 한두 박스. 세 박스 팔면 손뼉 치고 파이팅을 외칠 정도였다.
사업이 지속 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번 돈을 다 털어 넣어 ‘건강식품’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는데 점점 파산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승리의 여신은 마지막에 웃는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몰아치는 밤이었다. 김 회장은 직원들과 회식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에서 문득 거센 태풍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양복에 넥타이 차림 그대로 집까지 걷기 위해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태풍에 실린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면서 바락 소리를 질렀다. “김영식이, 네가 영업 잘한다면서 이것도 못 팔아? 어디 한 번 맞아봐라!”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환청이었을까? 싶지만 실제로 그런 소리가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래 난 할 수 있어!”하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이미 모양새는 말이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거센 비바람 속을 걸으며 “영식아, 너는 할 수 있다! 달팽이야, 걱정하지 마! 여기 영식이가 있다!”하고 외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참 안됐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사람 미쳤나봐”하는 소리도 들렸다.
1시간 정도 비바람으로 매를 맞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학계에 달팽이의 효능에 대한 연구를 의뢰하는 한편, 품질을 개선해 가면서 백방으로 판로를 모색했다.
홍보용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돌리는 등 ‘달팽이 엑기스’에 불을 붙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방송 도움을 받으면 사업이 잘 될 것 같은 판단에 아무 연고도 없이 다짜고짜 KBS로 갔다. 당시에는 ‘6시 내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꽤 높았던 터라 담당 PD를 찾아갔다.
달팽이로 우뚝 선 천호식품
예나 지금이나 방송 교섭은 쉽지 않다. 김 회장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아이템을 들고 섭외하러 오는 것이다. 담당 PD는 물론 차장, 부장을 만나 달팽이 양식 농가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달팽이 양식과 ‘6시 내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은 콘셉트가 딱 들어맞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섭은 순탄치 않았다.
김 회장은 그 자리에서 더는 PD들을 귀찮게 하면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천천히 꾸준히 가기로 했다. 그 뒤 일주일에 한 번씩 KBS에 들러 “안녕하십니까, 달팽이 왔다 갑니다!” 하고 인사만 하고 돌아왔다. 그 때 김 회장의 이름은 김영식이 아니라 ‘달팽이’였다.
처음에 PD들은 “뭐야, 저 사람? 싱거운 사람이군”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3개월쯤 지나니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 회장이 방송국에 나타나면 “저기 달팽이 오시는구먼” 하고 웃으면서 “사업 잘되십니까?”라고 말을 걸어주는 것이 아닌가.
발이 닳도록 방송국을 들락거리면서 PD들과 안면이 트이자 ‘달팽이엑기스’를 한 박스씩 선물했다. 그중 한 PD가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이 제품을 드렸는데 증상이 크게 호전됐다고 했다. 바로 그 PD가 상사에게 ‘달팽이 한 번 나가보자’고 건의했고 승낙도 받아냈다. “방송 한 번 나갑시다”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 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6시 내고향’에 달팽이가 소개되자 마치 원자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방송이 끝난 뒤 부산 공장으로 전화를 했더니 계속 통화중이었다. 팩스로 연결된 전화를 직원이 수동으로 돌려 겨우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주문 전화가 엄청나게 많아요. 전화 연결이 안 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30분 정도 전화를 걸어야 통화가 됐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 당시 천호식품은 부산에 6대, 서울에 10대 정도의 회사 전화가 있었다. 방송이 나간 후부터 대리점과 영업 사원들은 말 그대로 날개를 달고 영업을 했다. 매출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천호식품은 달팽이 건강식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전국 각지의 판매업자들이 현금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와서 줄을 서서 대기하곤 했다. 수요만큼 공급이 따라주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유사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천우’, ‘천오’ 등 비슷한 제품명들도 등장했다. 이에 김 회장은 비슷한 이름들을 모조리 상표 등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달팽이 건강식품이 출시된 지 어느덧 17년이 흘렀다. 달팽이 엑기스는 천호식품에서 여전히 잘 판매되고 있는 효자 상품이다. 김 회장은 달팽이가 대박을 칠 때 TV 광고에 출연해 “물어볼 필요조차 없습니다”는 멘트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1994년 부산에서 현금 보유 기준 100명 안에 들어갔다.
나쁜 일은 손을 잡고 몰려온다
자신만만해진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다시 사업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서바이벌 게임 사업, 찜질방 체인 사업, 황토방 체인 사업 등을 한꺼번에 벌였다. 직원규모도 서울과 부산을 합해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김 회장은 천호식품의 앞날이 장밋빛으로만 보였다. 여기저기서 돈도 몰려들었다. 그러던 1997년 IMF를 만났다. 치명타였다.
농심, 해태 등 유명 식품회사에 식품에 첨가되는 기능성 원료들을 납품했는데 졸지에 중단 통보를 받았다. 나쁜 일은 손을 잡고 몰려왔다. 찜질방과 황토방 사업 가맹자들도 여기저기서 파산하며 계약이 해지됐다.
하청업체들에게 발행해준 어음 만기가 무더기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돈줄도 완전히 끊겼다. 은행으로부터 회사는 물론 김 회장의 집으로까지 경매 통보가 날아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그 많던 직원도 전부 떠났다. 넓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의 머릿속에선 9층 사무실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들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에게서 온 전화인 줄 알았다. 마지막으로 아내하고 통화나 하자며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내가 아닌 세무서 직원의 전화였다.
체납된 국세를 이번에도 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협박성 독촉 전화였다. 꼭 받아내야겠다고 벼르고 전화를 했는지 수화기 너머의 말투가 만만치 않았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던 김 회장은 두려울 게 없었다.
“이봐요 나 세금 떼먹으려는 거 아니오. 계속 그렇게 사업 못하게 다그치면 여기 9층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렇잖아도 지금 뛰어내릴 생각이었소”
세무서 직원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뛰어내리는 건 그쪽 사정인데, 세무서 전화 받고 뛰어내렸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김 회장은 이 말발 센 세무서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지고 실랑이를 종결지었다.
“사업한 지 4년 됐는데, 그동안 전화번호 한 번도 안바꿨어요. 그런 사람이 세금 떼먹는 거 봤습니까? 기다리세요”
세무서 직원과 통화를 마친 뒤 김 회장은 사무실을 옮길 작정을 했다. 건물 주인에게 사정했지만 돈이 없다면서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했다. 내용 증명서도 보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겨우 건물 주인을 만나 3개 월 분의 월세를 내고 이사를 했다.
두번째 패배에서 배운 또 하나의 교훈
이 참담한 두번째 패배는 또 한번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 원인이었다. 여유 자금이 있으니 자신만만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비전문 분야의 사업을 마구 벌인 것이다.
본업이 아닌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경우 내로라 하는 굴지의 기업들도 나가떨어지던 시기였다. 만약 그때 본업인 건강식품 회사 하나만 경영했더라면 IMF 위기에서도 이상이 없었을 것이라 반성한 그는 그 뒤로 본업이 아닌 일에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 많던 직원도 모두 나가고 단 4명밖에 안남은 공장에서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10미터만 더 뛰어봐! 中│김영식 지음│21세기북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