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순을 인정해야 행복교육 가능"
- 악마는 총론이 아니라 각론에 숨어 있어
어릴 적에 나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늘 앞에서 서너 번째였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도 다들 키가 작았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나는 좀 늦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키가 자라기 시작했는데 대학 1학년 때까지 부쩍 자랐다. 그러나 신체가 성장한 시기와 달리 정신적인 성장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가족과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이해, 판단에 있어서의 신중함, 행위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 본격적으로 내면화되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에게나 겪어야 할 과정이 있고 각자 자라는 때가 있다. 또 육체적 키와 정신적 심리적 키가 자라는 때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저마다 공부의 문리가 트이는 시기도 다를 수 있다. 5살에 처음 작곡을 한 모짜르트는 어릴 때부터 천재였지만, 강태공은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출사(出仕)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인 교육체계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 사람의 역량이 최고조로 발휘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길게는 몇 십 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안다. 국가의 교육제도 하에서는 정해진 기간 안에 능력을 확인하고 진로를 결정해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 기간은 아무리 길어도 대개 초중고를 마칠 때까지의 12년 정도이다.
좀 비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국가 운영의 관점에서 국민을 인적 자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은 한정된 기간 안에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습득하도록 요구 받게 되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이러한 기반 하에 구축되어 있다. 이런 흐름에 편승하지 못할 경우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학습역량을 갖추는 데 최소 3∼5년 정도가 더 소요된다.
이처럼 개인마다 학습능력이 다르고 소질과 개성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거의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사회적 수요에 맞추는 교육체계는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순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간과 국가적 사회적 구성 요소로서의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건널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다시 원시공동체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 모순은 어떤 혁명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없앨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시도한 모든 교육 개혁이 실패로 끝난 데는 이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지 않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제도만 봐도 해방 후 지금까지 큰 변화만 무려 10차례 이상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고 그로 인한 혼란과 손실은 학생들과 학부모의 몫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해결 난망한 모순을 극복하려다 혼란만 가중시키는 무모한 시도보다 모순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사람마다 우열을 가리고 등급이 매겨지더라도 그로 인해 인생 전체가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육과정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그 기회를 통해 성공할 수 있도록 성취의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는 게 아니라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이를 위한 모든 교육적 배려와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육정책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 더욱 중요하다.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없으므로 구체적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론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총론이 아니라 각론에 숨어 있다’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교육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규정과 규칙 때문에 우리의 아들딸들이 상처받고 소외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세부적인 부분까지 따져봐야 한다.
어릴 적에‘키 작은 꼬마’였던 내가 어느 순간에 훌쩍 자랐듯이 누구나 성장하는 시기가 따로 있다. 모두의 키가 제각각이듯 그 시기도 일정하지 않다. 학습능력과 속도도 그렇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는 그 기준과 방향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개인 능력의 계발이 중요한 만큼 그에 못지않게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인적 자원으로서의 측면도 중요하다. 개인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도 그에 앞서 안정적인 사회시스템과 국가체계는 튼튼하게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서울대학교 대학원 공학 박사
- 사랑의네트워크 이사장
- 前인하대학교 총장
- 前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 회장
- 前대한화학회 부회장
- 前일본 분자과학연구소 초빙연구원
- 인하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 前미국 버클리대학교 연구원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