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명문 사학 연세대와 고려대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올해 두 사학은 설립 120년과 100년을 맞았다. 한국 근대사의 맥을 이으며 명문사학으로 자리매김한 두 학교는 ‘맞수’답게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한국 교육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두 학교를 나온 학생수도 매년 1만명을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100만명 이상의 선후배를 갖고 있다. 그만큼 두 학교의 영향력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두 학교는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또는 확연히 드러나게 기싸움을 하고 있기도 하다. 올해로 개교 120주년을 맞은 연세대와 개교 100주년을 맞은 고려대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이들의 경쟁구도와 기질을 탐색해 보았다.
연세대가 걸어온 길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이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연세대의 건학이념이다. 연세대의 역사는 ‘세브란스의대’에서 출발했다. 1885년 미국의 선교사 알렌박사가 제중원(초기 이름은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한 것이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다. 이후 제중원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애비슨 박사가 인수하여 미국의 세브란스씨로 부터 받은 기금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신축하는 한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1908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는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은 의사면허증을 발급 받고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최초의 의사면허증이다. 194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6년제의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민을 위한 구호 병원을 개설하기도 했다.1915년 ‘조선 크리스찬 칼리지(Chosun Christian College)’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연희전문학교’는 현재 연세대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박사는 1915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초대교장을 맡았다. 연희전문 6대 교장으로 있던 백낙준 박사는 종합대학교로 승격을 추진한 결과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돼 문학원, 상학원, 이학원, 신학원 등 4학원 11개학과의 종합대학교로 인가됐다. 1949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예과를 연희대학교에 두었으며 1950년 연희대학교는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숙원이었던 ‘합병’을 하게 된다. 문교부로부터 합병 인가를 얻은 ‘연희’와 ‘세브란스’는 ‘연세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새출발을 하게 된다. ‘연세’라는 이름은 ‘연희’와 ‘세브란스’가 합쳐졌다는 의미다.연세대학교로 새 출발을 하던 해 5월 문과대학에 도서관학과, 상경대학에 경영학과, 이공대학에 건설공학과, 정법대학에 행정학과를 증설하면서 연세대는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1980년 연세대는 정법대학이 사회과학대학으로, 법학과가 법과대학으로 독립하는 등 학사기구의 대폭적인 개편을 시행했다.1990년에는 연세대가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학, 레닌그라드 대학 등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다. 1999년 3월 1일부로 연세대는 17개 단과대학 및 12개 학부와 13개 대학원으로 발전하는 한편 2010년까지 세계 100위권 대학으로의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려대가 걸어온 길
고려대의 역사는 1905년 ‘사립보성전문학교’의 설립(설립자 이용익 선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성전문학교가 현재의 명문대 고려대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되자 곧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설립자인 이용익 선생은 해외로 망명, 학교는 경영난에 빠졌다. 이후 손병희 선생이 학교의 경영을 이어받아 본 궤도에 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3·1운동 직후 손 선생은 일본경찰에 검거돼 학교는 다시 난관에 봉착한다. 1921년에는 많은 독지가들이 학교에 기부금을 전달하는 한편 조선교육령에 의한 정식 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아 도약의 발판이 마련됐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세계경제공황의 여파로 보성전문학교는 다시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됐다. 이때의 곤경을 건져낸 사람이 인촌 김성수 선생이다. 당시 그는 동아일보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는 본격적인 도약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1939년에는 보성전문학교 30주년 기념사업으로 도서관을 준공, 개관했고 다음해 7월에는 동양에서 손꼽히는 대운동장을 완성해 대학 캠퍼스로서의 모습을 갖춰갔다. 1946년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오랜 숙원이었던 종합대학의 승격이 이루어졌다. 보성전문학교는 정법대학과 경상대학, 문과대학의 3개 단과대학으로 편성하고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고려대학교의 초대총장으로 현상윤 총장이 취임했다. 고려대학교는 보성전문학교의 새로운 창립이라고 볼 수 있다. 1955년 고려대는 법과대학, 상과대학, 문리과대학, 농과대학, 정경대학 등 5개의 단과대학을 두게 됐다. 1970년에는 학교 장기발전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 해에는 ‘학교법인 우석학원’을 합병, 우석대학교의 의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경대학,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과 부속병원 등을 흡수했다. 1983년 7월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직제를 의료원 체제로 승격, 개편하고 혜화병원, 구로병원, 여주병원, 안산병원을 그 산하에 두었다. 1991년에는 명륜동에 위치한 의과대학이 안암동 신축교사로 옮겨지면서 본격적인 안암동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5월에는 제1회 ‘고대인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또 10월에는 안암병원의 신축공사가 준공, 개원함으로써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국제적인 대학으로서의 발전을 꽤하고 있다.
연고대 출신들의 기질
연세대와 고려대의 기질은 무엇일까.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이들 대학의 기질 탐색은 수학적인 계산 등 수치화 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 관념이다.양 대학의 기질을 분석해 보면 상징물에서부터 그 기질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연세대는 독수리, 고려대는 호랑이를 상징물로 하고 있다. 독수리가 미국의 국조(國鳥)인 점과 설립자인 언더우드 박사가 미국인 선교사라는 점 때문에 연세대는 서구적인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호랑이와 관련된 민화, 우화 등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에 고려대는 전통적인 느낌이 강하다.양 대학 출신의 두드러진 특징을 보면 내뿜는 힘이 다르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적인 느낌을 갖는 연세대는 개인적인 매력,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느낌의 고려대는 집단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출신들을 보면 ‘개인의 힘’과 ‘집단의 힘’을 잘 엿볼 수 있다. 특히 잘 뭉치는 고려대 출신의 끈끈함이 잘 드러난다.정치권의 예를 보면 17대 국회에서도 고려대 출신 의원들의 끈끈함은 잘 나타난다. 우선 고려대 출신 의원들은 당적을 떠나 잦은 모임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에 연세대 출신 의원들의 모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고려대를 졸업한 한나라당 박순자 의원은 “연세대는 깔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이고 고려대는 투박하고 터프하며 끈끈한 이미지”라며 “고려대는 이제 ‘민족고대’에서 ‘세계고대’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모교에 대한 애교심을 드러냈다.
우리는 영원한 맞수
사회 각 분야에서 두루 활동하는 양 대학 출신들의 경쟁의식은 뚜렷하다. 서울의 한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연세대 출신 이형호(32)씨. 이 씨가 근무하는 부서의 1팀에는 팀장을 비롯해 연세대 출신이 많고 2팀에는 고려대 출신이 많다고 한다. 1팀에서 회의를 할 때 팀장은 2팀에 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고려대 팀에 질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한다.연세·고려의 경쟁은 해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파견 근무하고 있는 이상천(30)씨가 하고 일은 상하이 국제학교에서 한국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수학과목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 학교의 한국인교사들은 대부분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출신들이라고 한다.
이 중 연세대와 고려대를 졸업한 교사들은 따로 모임이 있다는 것. 고려대 모임에 참석하는 이씨는 “친한 동료교사가 연세대 출신이라서 근무지 밖의 모임에서는 그를 볼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 고려대 출신의 동료교사들은 우스갯 소리로 이씨에게 “왜 연세대 출신의 교사와 친하게 지내느냐”고 말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씨는 “고려대 출신의 교사들이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지만 고려대와 연세대의 은근한 경쟁의식 때문에 이런 농담도 나오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일제해방 이전부터 시작된 양 학교의 경쟁관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들은 경쟁관계에 대해 ‘숙명’이라고까지 말한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활약하고 있는 양 대학 출신들이 참신한 경쟁을 벌여 사회발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호랑이와 독수리의 대결 ‘고·연전’
연세대나 고려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연고전’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연고전이란 해마다 9월 셋째 주에 열리는 양 대학의 정기 친선경기다. 양 대학의 놀이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연고전은 친선경기이지만 응원, 경기 모두 한 치의 양보가 없다. 양 학교의 첫 대결은 1927년 11월 2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던 제8회 전 조선축구대회 준결승전이다. 당시 양 학교의 이름은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였다. 이후 양 학교의 정기 대항전은 1945년 12월 4일 ‘제1회 연희·보성 OB축구전’에서 시작됐다. 같은 해 12월 21, 22일 양일간 YMCA 체육관에서 OB농구전이 열렸다. 다음해 5월에는 축구대항전이, 10월에는 축구·농구 대항전이 열리면서 ‘연고전’, ‘고연전’으로 불리는 양 학교의 대항전이 선보였다. 이들이 벌이는 깨끗한 한 판 승부는 한국 스포츠계의 자극제가 되었고 대학 스포츠 정신 함양에 큰 힘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사학의 쌍벽인 두 학교의 대결은 애교심 고양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특히 두 학교 출신들은 연고전을 통해 한국 스포츠를 주도하면서 각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고대 출신들이 한국 스포츠를 이끄는 마피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두 학교 출신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의미이다.
김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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