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강휘호 기자] 연말 정기 인사를 앞두고 재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새 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된 창조경제, 총수들의 잇따르는 실형선고, 수많은 파장을 일으킨 갑을논란 등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낸 만큼 연말 인사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내 주요 그룹들의 연말 인사에서 상당한 규모의 구조 개편이 예측되는 가운데 사업 부문 구조조정도 점쳐지고 있어 이목을 끈다. [일요서울]은 대기업들의 연말인사에 대한 예상을 키워드별로 묶어 정리해 봤다.
‘성과보상·가지치기’ 내부 단속도 강화
2·3세 경영 행보 주목, 사업재편 ‘가속’
후계경영 시작하는 기업의 은밀한 움직임
등기 이사 내려놓는 총수들이 많은 이유는
재계의 일부에선 책임 경영 ‘회피’로 인한 인사이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총수들이 내놓은 자리를 누가 채울지도 관심사지만 ‘왜’ 자리를 내놨는지가 더욱 흥미롭다.
기업경영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총수가 있는 30대 그룹의 등기이사 평균 연봉이 5억 원 이상인 기업은 117곳이지만 이 가운데 대주주가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는 기업은 57.3%인 67곳(60명)에 그쳤다.
실제 올해 재계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비롯해 담철곤 오리온 회장과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까지 재벌 기업 총수들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다.
정용진 부회장이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이사직을 내놨을 당시 신세계 측은 “신세계와 이마트의 기업분할에 따라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며 “각 계열사는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 체제로 운영되며 정 부회장은 신사업 및 해외사업 진출 등 규모가 큰 사업의 의사결정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롯데 역시 신동빈 회장의 롯데쇼핑 대표이사직 사임에 대해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은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며 “롯데케미칼과 롯데제과 등 다른 계열사 대표는 그대로 맡는다”고 설명했다. 오리온 측도 비슷한 맥락의 공식 견해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들은 총수들이 법적 책임에 휘말리는 걸 피하기 위해 등기이사직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동시에 갑을논란, 골목상권 침해 등으로 유통 및 식품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갈수록 강화되는 데다 연봉 공개 의무까지 더해지면서 법적 책임 등을 피하려는 총수들의 수작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총수들은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법에 따라 내년부터 연봉 5억 원이 넘는 상장사 등기이사들은 보수 공개를 의무화해야 하는데 내년 3월 법 시행을 앞두고 미리 손을 써 개별 보수 공개를 하지 않으려는 꼼수라는 지적이다.
더불어 전문경영인한테 등기이사직을 떠넘겨도 회사 지배력은 크게 훼손되지 않기 때문에 올해 말에는 전문경영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등기이사단을 예년보다 많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비승진 임원 벌써부터 ‘눈독’
연말 인사로 경영 세습을 준비하려 한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오너 2·3세들의 승진 여부가 관전 포인트인 가운데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낸 삼성그룹만 대대적인 승진잔치가 예상되고 있다.
그만큼 재계의 관심사는 단연 삼성그룹이다. 재계 1위 삼성은 이건희 삼성 회장의 둘째딸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사장 승진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2010년 말 부사장으로 승진한 뒤 3년이 지난 만큼 이번 인사에서 사장 승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설명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및 에버랜드 사장의 승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다만 올해 부회장 직함을 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회장 승진은 시기상조라는 분석이다.
현대차 그룹의 경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남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의 역할 변화가 중점인데 깜짝 인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승진보다는 보직을 추가로 맡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연말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합병으로 철강 사업이 일원화되는 만큼 품질부문을 맡고 있는 정 부회장이 이를 기점으로 경영 전반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LG그룹은 후계자로 점쳐지는 구본무 회장 아들 구광모 LG전자 부장이 작년 말 LG전자 해외 법인에서 국내 본사로 복귀한 이후 최근까지 LG에 대한 보유 지분을 확대하고 있어 본격 4세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실제 지난달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광모씨는 지난달 13일부터 사흘간 LG 주식 총 11만 주(67억 원 상당)를 장내에서 매수했다. 그 때문에 이번 연말 광모씨의 표면적 승진은 없었지만 4세 경영의 발판은 마련됐다는 평이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가장 변수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략마케팅실장(차장)의 승진 가능성이 여느 때보다 높다. 올해 김 회장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김 차장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승진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는 실정이다.
GS그룹은 허창수 회장의 장남인 허윤홍 GS건설 상무를 비롯한 3·4세 오너 일가들이 올 초 정기인사에서 대거 승진했다. 그 때문에 연말 승진까지 기대하기란 어렵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삼남매도 올 초 대한항공의 부사장(조원태, 조현아)과 상무(조현민)로 승진해 연말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연말 인사철마다 신상필벌 인사가 단행된다는 예측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올해는 어느 때보다 계열사별 실적 위주의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위기 속에 능력 있는 인사들을 대거 배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그 원인으로 분석된다.
LG그룹이 지난달 27일 LG전자를 시작으로 4대 그룹 중 가장 먼저 임원 인사를 단행했는데 신상필벌의 전형을 보여줬다. 가장 눈에 띄는 인사는 스마트폰 G시리즈를 선도한 박종석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가전부문의 사업실적이 부진했던 HE(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의 권희원 사장은 옷을 벗기까지 했다. 그 대신 LG 시너지팀을 이끌어온 하현회 부사장이 HE사업본부를 이끌게 됐다. 승진의 영광과 일선 퇴진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리는 장면이었다.
임원들 “나 떨고 있니”
박 사장은 2010년부터 모바일커뮤니케이션스(MC) 사업본부장을 맡아 G시리즈 등 스마트폰 개발을 주도해서 스마트폰 사업의 부활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땄다. 정도현 부사장(최고재무책임자)도 신사업에 대한 투자 재원 확보와 회사경영 시스템 최적화에 기여해 상을 받았다. SCM(공급망관리체계)을 정착시키고, 물류 경쟁력을 높인 강태길 SCM그룹장 역시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GS그룹의 인사 역시 실적이 기준이었다. 올해 해외 건설 사업 부진으로 대규모 영업적자를 낸 GS건설은 상무 이상 임원 62명 중 21명이 물러나는 등 대규모 물갈이가 이뤄졌다.
한편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도 돋보이는 실적 개선을 이뤄낸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에서는 대규모 승진인사가 기대된다. 동시에 실적이 부진한 건설ㆍ화학 등 계열사에서는 문책성 칼바람이 불 수도 있어 임직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올 들어 3분기까지 1조 원이 넘는 누적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삼성엔지니어링의 경우 이건희 회장 사위인 김재열 사장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이미 잇따른 해외 리콜 등 책임을 지고 권문식 연구개발본부장(사장), 김용칠 부사장, 김상기 전무 등 연구개발 임원 3명이 자리를 떠났다. 추가적인 문책인사와 함께 신형 제네시스 등 신차 출시를 앞둔 해외 영업 및 마케팅 부문 강화작업을 연말 인사에서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총수 공백 사태를 맞고 있는 SK그룹은 다음달 중순쯤 최태원 회장의 자리를 채울 인사를 예고하고 있다. 오너 공백이 마찬가지인 한화나 오너일가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 중인 효성은 상당 기간 인사가 늦춰질 가능성이 높다.
정준양 회장과 이석채 회장이 중도 사퇴한 포스코와 KT도 처지는 엇비슷한 상태다. 포스코는 주주총회가 열리는 내년 3월 후임 회장을 선출한 후 인사 방향과 폭이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후임자가 외부에서 올 경우에는 친위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인사 태풍이 예고된다.
# 청운중·경복고 82년생 동기동창이 뜬다
-정기선(현대중공업) 장선익(동국제강) 유석훈(유진그룹)…경영 수업 중
인사 시즌을 맞은 재계의 중심에 82년생 청운중·경복고 동기동창 라인이 등장했다. 그리고 젊은 피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의 그룹 내 역할 변화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정기선(현대중공업·31세)씨, 장선익(동국제강·31세)씨, 유석훈(유진그룹·31세)씨가 그 주인공이다.
먼저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의 장남인 정기선씨는 1982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ROTC 43기로 군복무를 이행했다.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 대리로 입사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MBA를 취득하고, 글로벌 경영 컨설팅 회사인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으로 이직한 이력이 있다.
현재 정씨는 지난 6월 현대중공업 울산 본사로 복귀한 상태다. 이번 연말 인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유다. 세간에서도 정씨가 재무팀을 거쳤고 MBA와 글로벌 컨설팅을 경험했다는 점과 현재 직급 역시 수석 부장이라는 상황으로 승진 자격은 충분하다는 평이다. 정씨 스스로도 부친인 정 의원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본인은 그룹 경영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울러 정씨의 복귀 당시부터 재계에선 11년간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해 온 현대중공업이 3세 경영을 준비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정 의원의 장녀인 정남이(30세)씨도 올 초부터 현대중공업 계열인 아산나눔재단에서 기획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오너 경영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만 31세의 어린 나이는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아들 장선익씨와 유경선 유진그룹 유경선 회장의 장남 유석훈씨도 정씨와 청운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 동창으로 각 그룹 내 동갑내기 차기 주자다.
장 회장의 장남 장씨는 정씨와 같은 연세대에 다녔고, 보스턴컨설팅그룹에 근무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현재는 동국제강 미국 뉴욕지사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다. 장 회장의 동생 장세욱 유니온스틸 대표이사가 미국지사를 거쳐 그룹의 경영관리실장을 맡았고, 자회사 대표까지 올라간 전례를 볼 때 장남인 그도 조만간 그룹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장 씨는 2006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동국제강 신입 사원 연수에도 참가한 바 있어 아버지 장 회장처럼 말단 사원 경영수업을 시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돈다.
마지막 동기동창, 유 회장의 장남 유 씨는 현재 유학을 준비하며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일선에 합류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언제쯤 전면에 나올지에 특히 주목되고 있다.
한편 1980년대에 태어난 오너일가의 등장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재계의 시선도 흥미롭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한때 전문경영인 체제가 유행처럼 번졌는데 오너 경영으로 회귀하는 모습들이 자주 포착된다”며 “책임감을 고취시키고 분위기 반전을 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젊은 인사인 만큼 자질시비 같은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