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에 전면으로 붙어있는 거울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있은지 한 20분이 지났을까.설거지를 하던 여성이 머뭇거리며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물론 그도 CD다.“맥주 두병 주세요”라는 주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짙은 속눈썹에 아이섀도와 볼터치로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는 상당한 미인. 쫙붙는 청바지에 푸릴이 달린 여성용 니트를 입고 매니큐어를 칠한 발가락이 훤히 드러나는 힐을 신었다. 카페에 하나둘 남자들이 들어온다. 다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들이다.그러나 어느 순간 카페에 남자는 없다. 다들 ‘풀업’상태로 재등장했기 때문이다.‘풀업’이란 옷차림에서 화장까지 완벽한 여성으로 변신한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다.카페 한켠에 마련된 드레스룸에는 ‘풀업’을 위한 갖가지 의상과 하이힐, 화장품 등이 준비돼 있다.의상은 한복이나 드레스 부터 평상복까지 무려 300여벌에 달한다. 카페에서는 화장에 서툰 초보 CD들에게 메이크업을 해주거나 여성용 속옷 입는법을 알려주는등 ‘풀업’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준다.
일부 CD들은 이곳에 자기의 소품을 두고 다니며 여성의 모습으로 마음껏 즐기다가 메이크업을 지운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카페문을 나선다. 서빙을 보는 CD에게 “얘기 좀 하고싶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다 알고 오신거죠?”라고 물으며 웃는다.그의 이름은 로미(34·가명). 초등학생 아들을 둔 가장이다.이들과 술자리 도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여장을 한 자신들을 보고 내가 놀랄까봐 배려한 것이었다. 로미씨는 기자에게 “러버(여장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나 레즈비언인줄 알았다”고 말했다.검은색 파티복에 하이힐을 신고 학처럼 걸어다니던 사장 세미(47·가명)씨도 합석했다.세미씨도 아내와 두 자녀가 있는 평범한 가장이자 직장인이다.그는 여장남자 카페를 운영하면서 “여장남자나 성적소수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로변에 이 카페를 오픈한 이유로 “CD도 하나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짧은 웨이브 머리에 마스카라와 아이섀도로 표현한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세미씨는 말과 행동까지 우아한 중년부인 그 자체였다. “아름답다”는 칭찬에 고맙다고 웃으며 “CD들도 여러 부류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트랜스젠더와는 다르다”며 입을 열었다.“트랜스젠더가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해 CD들은 자신이 남성인 것을 인정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세미씨는 CD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불만을 토로했다. 여장남자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변태도 아니고,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많은 CD들은 고학력자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이들 중에는 유학파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정서상 가족과 주변인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는 자유롭게 각자의 성향을 즐긴다”고 말했다.“성전환을 해서 여성으로 살고 싶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남성이란 점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미씨는 “나는 여기서만 여장을 함으로써 마음껏 즐기고 사회에서는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전했다. 그는 또 “나는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평범한 남성으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그는 “가정 및 사회생활은 물론 부부관계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귀띔한 뒤 “일종의 독특한 취미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형같은 남자
인형같은 눈을 가진 애리(26·가명)씨는 13살 때부터 여장을 시작했다고 밝혔다.그는 그곳의 CD들 중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와 남성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상큼함을 지니고 있었다. 고운 얼굴에도 “넓은 어깨와 다리 때문에 남자티가 나는 것이 불만”이라는 그는 연신 검정색 망사스타킹을 끌어올리며 수줍어했다. 애리씨는 여자를 많이 사귀어 봤으나 오래 사귀지 못했다는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어떤 여성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애리씨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애리씨는 트랜스젠더를 꿈꾸고 있었으며 세미씨와는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그는 기자에게 “여성인 당신이 너무 부럽다”며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풀업한 상태로 같이 쇼핑을 가주겠다”는 말에 그는 인형같은 눈을 깜빡이며 소녀처럼 기뻐했다.
모델같은 남자
은애(21·가명)씨는 이날 180㎝의 키에 모델같은 몸매로 기자의 기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길다란 목과 쭉 뻗은 다리, 한손에 쥐일듯한 허리 등 인공가슴을 제외하면 그는 절대로 남성이라 할 수 없는 체형이었다.“언니, 참고로 내 허리는 23인치”라며 자랑하는 그의 몸매는 바비인형에 가까웠다.그는 대화 도중에도 벽면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며 연신 머리를 매만지거나 화장을 고쳤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그는 목소리를 제외하면 천상’여자’였다. 특히 그가 초미니 슬립을 입고 테이블 사이를 지날 때마다 같은 CD들도 “정말 끝내주죠?”라며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몸매가 정말 이쁘다”고 칭찬하자 그는 “어머~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라는 농담으로 받아치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웃는다.“이 생활에 만족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물론이다. 여기서 여장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들만의 파티
어느덧 11시가 훨씬 넘었다.테이블에는 맥주병이 가득 쌓였고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다. 조명이 현란한 사이키로 바뀌고 음악소리가 커졌다.그들은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는지 에로틱한 춤을 추거나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등 여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하는 분위기였다. 비록 비좁고 허름한 지하지만 여성으로 살 수 있는 이 공간에서 그들은 가장 행복해보였다.
‘여장남자’카페주인 “내 아내도 내가 CD인것 몰라”
검정색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은 세미씨는 처음 온 손님들을 일일이 직접 맞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또 술자리 도중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안주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처음 온 분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많이 망설이다 왔을텐데…”라는 것이 세미씨의 말이다.
- 이곳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많이 오나. 30대 초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 많다. 50대도 있다.
- 자신의 성향은 어떻게 알게 됐나.▲ 4년전쯤 이태원의 트랜스바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 바로 이거구나’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 머리 스타일이 참 멋지다. 직접 했나.▲ 화장에서 머리까지 모두 내가 직접 한다.
- CD들끼리 쓰는 용어가 있나.▲ 우리들끼리는 일반 여성을 ‘뽈록이’(가슴이볼록하다해서), (성기제거)수술한 이들을 ‘카순이’(카트했다해서)라 부른다(웃음).
- CD들은 남성과 여성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가.▲ CD도 여러 부류라 딱히 말하기 어렵다. 트랜스젠더 성향이 있는 이들도 있다.
- 가정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부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아는가.▲ 아무도 모른다. 그만큼 정상적으로 살아간다는 말 아니겠나.
- 원래 여성적인가.▲ 절대 아니다. 축구와 등산을 즐기고 동료들끼리 소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완전 남자’다. 그래서 내가 CD라는 상상은 아무도 못할 것이다.
- 이 생활에 만족하는가.▲ 그렇다. 업한 상태가 가장 행복하다.
- 풀업을 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기분이 다른가.▲ 물론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업을 하고 있을 때면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 느낌이 없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나도 아버지고 남편이며 남자다.
- 여장을 즐기는 이유가 있나.▲ 단지 좋아서다. 여장을 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것 뿐 다른 이유는 없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텐데.▲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CD들은 정신병자도 변태도 아니다. 남자들보다 오히려 여자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 같다.
-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런 카페나 모임이 활성화됨으로써 언젠가는 우리같은 사람들도 음지에서 양지로 나갈 수 있지 않겠나. 외국의 경우처럼 우리도 하나의 성향으로 인정받게 되길 바란다.
이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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