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총재의 행보와 관련해 각종 구설수가 나돌았던 것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재신임·탄핵정국 등 정국 불안이 심화될 때마다 이 전총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이회창 복귀론’이 끊이질 않았고, 이 전총재가 지난해 4월 선친 묘를 이장하고 같은해 10월 개인사무실을 개소했을 때는 ‘이회창 대권 3수설’이 나돌기도 했다.하지만 정작 이 전총재는 이러한 의혹을 일축해 왔고, 지금도 이러한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지난 2003년 10월30일 SK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정계은퇴후 첫 기자회견을 자청한 이 전총재는 정계복귀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선 직후 국민에게 말씀드린 심경에 전혀 변화가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이후 검찰의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측근들이 줄구속됐지만 그는 함구로 일관했다. 정계은퇴를 선언한 만큼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게 이 전총재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이 전총재의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주변에선 여전히 그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치 패러다임이 급변한 만큼 이 전총재가 다시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보수·기득권층으로부터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는 그의 역할론 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박근혜 대표가 지난해 9월21일 옥인동 자택으로 이 전총재를 전격 방문한 것도 ‘이회창 역할론’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내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층 결집’과 ‘이회창 끌어안기’라는 다목적 포석이 내포돼 있을 것이란 관측.지난 11일 단행된 한나라당 당직개편을 둘러싼 뒷말도 무성하다. 박 대표의 친정체제 구축이라는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당 일각에선 ‘이회창 라인 복원’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정치권 관계자들은 박 대표가 이 전총재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유승민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한 배경에는 드러나지 않은 또다른 정치적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소장파들이 ‘당의 사당화’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고, 일부 강경파들은 “이 전총재가 당권을 쥐고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을 때와 비슷하다”는 악평을 쏟아내고 있다.특히 유승민(대표 비서실장)·김무성(사무총장) 의원 등 이 전총재의 측근들이 중용된 것과 관련해서는 향후 대권구도를 겨냥한 박 대표의 다목적 포석이 담겨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일부 소장파는 이번 당직개편은 박 대표와 이 전총재가 사전 교감 내지는 암묵적 합의하에서 단행됐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과 각종 의혹은 급기야 두 사람간의 ‘밀약설’로 확전되고 있는 분위기다. 이 전총재가 향후 정치적 지분을 담보로 박 대표의 대권행보를 물밑 지원한다는 게 밀약설의 골자다.
박 대표는 아직도 보수·기득권층으로부터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전총재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고, 이 전총재 또한 박 대표를 통해 자신이 못 다이룬 대망론을 완성하고 싶어할 것이란 관측이 맞물려 두 사람의 밀약설을 부추기고 있다.실제로 이번에 중용된 김무성 사무총장과 유승민 실장은 이 전총재와 정치적 노선을 함께해 온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다. 김 총장은 이 전총재가 대통령 후보시절때 비서실장을 역임하는 등 지근거리에서 이 전총재를 보좌했다. 유 실장 또한 이 전총재가 당권을 좌지우지할 시절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지내는 등 최측근으로 통했다. 유 실장은 지금도 특별한 일정이 없어도 이 전총재 자택을 수시로 방문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이처럼 이 전총재의 측근 인사를 박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당직에 중용했고, 당 지도부에서 추진하려 했던 정무지원단에도 이 전총재의 측근들을 대거 포진시키려 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두 사람의 사전 교감설은 ‘밀약설’ 의혹으로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박 대표와 이 전총재가 처해 있는 작금의 정치상황도 두 사람의 밀약설을 부추기고 있다.박 대표는 지난해 국가보안법 등 4대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간 첨예한 대치국면에서 보수·기득권을 대변하는데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표의 보수 노선은 한나라당의 최대 지지기반인 보수·기득권세력을 결집시키는 성과를 일궈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국민적 요구인 개혁 마인드를 수용하지 못하고 수구· 보수정당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특히 한동안 자신의 우군으로 분류됐던 당내 소장파와의 관계가 비판적 갈등관계로 재설정됐다는 사실은 박 대표의 ‘우향우’ 노선이 빚은 최대 손실로 지적받고 있다.하지만 박 대표측은 일부 소장파와 갈등관계가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박 대표가 구상하고 있는 당 운영 방침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소장파의 반발이 예상됐음에도 박 대표가 구상한대로 당직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러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이 전총재도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막후 플랜과 맞물려 박 대표와의 관계 복원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전총재가 구상하고 있는 막후 플랜은 다름아닌 ‘상왕정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대권 3수 도전’ 대신 한나라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데 일조해 막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상왕정치’ 플랜의 골자다.‘꿩 대신 닭’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무리한 대망론 보다는 대권 킹메이커 내지는 막후 조언자로 나서 두 차례에 걸친 대권패배 오명을 불식시키고자 할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이 전총재의 이러한 ‘상왕정치’ 플랜은 그의 역할론과 맞물려 그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이 전총재는 지금도 보수·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 또 현재 한나라당내에도 그를 추종하는 정치세력이 적지 않다. 박 대표를 비롯한 당내 차기 대권주자들이 이 전총재에게 끊임없이 구애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배경에는 그의 역할론과 식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전총재의 상왕정치 플랜이 언제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 향후 한나라당내 대권경쟁과 맞물려 새로운 관전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anderia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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