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덫에 걸렸다
박 대통령은 곧바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육사 8기)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강 사령관이 윤필용 장군은 물론 그의 부하와 군대 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 가혹한 조사와 조치가 벌어졌다. 이 사건에 연루돼 군복을 벗은 사람들은 손영길 준장을 비롯해 군부 내 하나회 주요멤버(모두 육사 11기)였다. 1980년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강창성 장군은 모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일로 고초를 겪은 강 장군은 후에 정계로 들어가 국회 5공특위 위원이 되어 윤필용-전두환 장군을 추궁하는 위치가 됐다. 동기생 윤필용-강창성 장군의 악연은 최근에 두 사람이 별세하면서 막을 내렸다. 하나회의 뿌리는 육사 8기생 윤필용 장군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군에서 박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신 인연으로 5·16 군사혁명 이후 국가재건회의 의장(박정희)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 군에 복귀해 방첩부대장을 거쳐 주월 맹호부대 사단장에 이어 수도경비사령관을 하고 있을 때 이 사건을 당했다. 하나회의 뿌리는 처음에 윤필용, 유학성, 차규헌, 김진구 장군 등 8기생을 중심으로 모이는 가운데 정규 육사 출신들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손영길, 전두환 장군이 주축이 돼 군벌 조직으로 성장했다. 윤필용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하나회 멤버들이 결국 12·12사건을 넘어 신군부의 집권 주체가 된 것이다. 내가 윤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서울 소공동에 있었던 506(서울지구) 방첩부대장(대령)으로 있던 1964년이었다. 윤 장군은 교우관계가 넓어서 동기생들 간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스타일로 준장으로 진급해 옥인동에 있는 방첩부대장이 됐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동기생 김형욱이었는데 그때 중정과 연루된 나일론백 밀수사건이 있었다. 방첩부대가 밀수사건을 취급하면서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 기세가 등등하던 중정의 국장들을 줄줄이 연행해 구속시켰다. 이때 구속된 이들 중 한 사람이 이용택 국장(뒤에 국회의원 지냄)이었다. 윤 장군이 맡고 있는 군 방첩부대가 권력 기관의 정점에 있는 중정을 거침없이 수사하고 나선 것은 그 당시 권력 실세들 간의 암투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내가 5·16 이후 지켜봤던 권력의 세계는 사람의 능력과 직책을 넘어 누구이든 권력의 측근 실세로 보이면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들어 학연, 지연, 혈연들을 앞세워 어떻게든 접근해서 주고받는 관계 속에 고질적인 형태를 반복했다. 이런 연유로 때로는 권력형 사건으로 파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윤 장군은 군의 요직에 있으면서 정치권력의 일선에 있던 실세들과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당시 권력의 2인자였던 JP(김종필)와도 친하지만 경쟁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위치로 보일 정도였다. 윤 장군이 506부대장에서 본부로 간 뒤에 부대장으로 온 김진구 대령(육사 8기)은 JP와는 경성사범(서울대 사범대)를 같이 다닌 관계로 서로 친분이 있었다. 또 부대가 공화당 당사와 가까운 조선호텔 앞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하며 심부름하기도 했다. 나는 방첩부대 과장을 하면서 김진구 부대장과 친하게 지냈던 탓에 육사 8기생들의 활동범위를 대강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무렵 육사 8기생들은 군과 정관계를 통틀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당시 김 대령은 8기생들의 심부름을 내게 시켰다. 동아일보 건너편(청계천 쪽) 3층 블록 건물에 있던 현대건설에 보내면서 “정주영 사장이 돈을 주기로 했으니 권 과장이 가서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대건설을 갔더니 정주영 씨는 “그래 알아”하고는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수표책을 갖고 와서 연수표로 30만 원 또는 50만 원(현재 환산가액 몇 천만 원 상당)에 도장을 찍어 건네주었다. 이 수표를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찾아다 쓰는데 거의 공개된 거래였다. 그 돈이 당장 대가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도움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였다. 정주영 사장과 군 실세들 간의 교류는 당시 중정을 창설하면서 남산과 이문동 청사 건설이 비밀리에 진행됐다. 현대건설과 수의계약(특혜) 과정에서 정 사장과 군부의 호의적인 관계는 현대그룹이 성장하는 데 어느 정도 기반이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필용 장군의 육사 8기 동기생이었던 강창성 장군은 경기 포천 출신이었다. 강 장군은 중앙정보학교장, 보안차장보, 사단장을 거쳐 보안사령관으로 와서 윤필용 사건을 수사 처리하게 됐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강 장군과 윤 장군은 군부 내 경쟁자였다. 박 대통령과 박종규 경호실장의 지시로 강 장군은 이 사건을 맡아 수사 범위를 확대해 윤 장군과 그 측근들이 구속되거나 군복을 벗는 대형사건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들리는 말로는 관련자들 집에 달러 몇 푼 있는 것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현역군인으로서 총기 소지한 것을 총포도검류단속법 위반으로 적용했다고 한다. 이때 희생된 현역 군인으로는 손영길 준장(11기), 권익현(11기), 배명국(14기) 등 상당수의 중견 장교가 군복을 벗게 됐다. 이때 전두환 장군도 수사 대상에 포함돼 처지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종규 경호실장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 윤필용 사건은 군인뿐만 아니라 윤 장군과 친했던 김연준 씨(한양대 총장)와 그가 경영하던 언론사에까지 불똥이 튀어 대한일보가 수재의연금 횡령혐의를 쓰고 폐간당하기도 했다. 윤필용 장군은 상당기간 구속됐다가 나왔고 10·26과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되자 신군부(하나회) 측에서 볼 때 강창성 장군이 윤필용 장군과 하나회를 숙군했던 허물을 물어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해운항만청장으로 있던 강창성 장군의 비리혐의를 찾아내어 구속했다. 강 장군은 구속된 것뿐만 아니라 이등병 강등에 삼청교육대 입소 수모까지 원한 맺힌 복수극의 제물이 돼야 했다. 이후 강 장군은 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이 됐고 5, 6공 부정부패진상조사 위원이 되어 하나회를 겨냥해 정치공세를 주도했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윤필용 장군과 함께 군복을 벗었던 하나회 멤버들은 복권돼 정계와 공직에 등용됐다. 윤 장군은 한국도로공사 사장과 담배인삼공사 사장을 지냈다. 강창성 장군은 박종규 실장에게 이용돼 1차로 육사 동기생을 무참히 제거했다가 2차로 신군부에 보복을 당했다. 다시 3차로 국회의원이 되어 5, 6공을 향한 정치적 공세를 벌이다가 최근에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던 시기에 나는 중령으로 진해에서 육군대학을 마치고 전방 대대장으로 가려다가 보안부대 소속으로 비교적 한직이라고 할 수 있는 2사단 보안부대장으로 가 있던 때였다. 강창성 장군과 나는 가까이 근무한 적이 없다. 그가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전방 사단의 보안부대장으로 가서 근무했으니 먼 거리에 있는 관계였다. 5共시기 MBC-KBS 양대 방송사장의 과잉경쟁 5공화국 출범 이후 언론 방송계에서도 치열하게 부딪혔던 맞수들이 있었다.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으며 문화방송(MBC)과 경향신문 사장 출신의 이진희 씨와 한국방송공사(KBS) 사장을 지낸 이원홍 씨가 바로 그들이다. 두 사람은 언론계 인사로 정부 홍보에서 과잉경쟁으로 사이가 좋기 않았다. 이진희 씨는 부산고 출신으로 허삼수 씨와 동문이고 서울신문 주필을 하면서 5공 출범의 정당성이 실린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를 지켜본 신군부 내에서 이 씨를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으로 기용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내가 사무실로 이 씨를 불러서 만난 뒤에 전두환 사령관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이 씨는 체구도 작고 얼굴색도 까맣고 해서 첫인상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아 어려운 일을 해낼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소신이 있어 보였고, 목소리도 웅장해 일을 해낼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그래서 전 사령관에게 “자리를 주면 잘 해낼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면담하도록 건의했다. 전 사령관도 이 씨와 면담한 뒤 좋다며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으로 임명했다. 이 씨는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을 맡고 의욕이 대단했다. 하루는 아침 출근 전에 이진희 사장이 갑자기 보안사로 찾아와서 전 사령관을 직접 인터뷰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기다렸다가 전 사령관이 들어오면서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전 사령관이 언론 방송에 처음이라서 좀 촌스러운 상태에서 옆에 문답집 같은 자료(차트)를 걸어놓고 인터뷰를 하는데 어색해 보였다. 이것이 경향신문의 1면(전면)과 문화방송에 보도돼 새 시대의 새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대국민 홍보 효과가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에는 허문도 비서실장이 개입돼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이원홍 씨는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주일 공보관(허문도 씨와 같이)에 나가 있다가 들어와서 10·26 이후 최규하 대통령 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나와 업무상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 특히 국보위를 만들면서 대통령령 절차 문제로 김유후 비서와 함께 자주 만났다. 이원홍 씨는 당시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원홍 씨는 뚝심도 있고 아주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성격이었다. 이진희-이원홍 씨는 경향신문-MBC 사장과 KBS 사장을 맡으면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공명심이 지나치다고 할 만큼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두 사람 모두 후에 문공부 장관을 차례로 지냈는데 이진희 씨가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이원홍 씨가 했다. 이원홍 씨가 KBS 사장으로 가게 된 데에는 내가 이원홍 씨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청와대에 있는 것보다 야전군 사령관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눈을 깜빡이면서 생각하기에 수긍하는 것 같아서 그 다음날 전두환 사령관과 면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 장관도 KBS 사장으로 간 뒤에 의욕적으로 일했다. 자연히 이진희 씨와 치열한 경쟁자로 부각되면서 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원홍 사장은 방송사의 느슨한 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땡전뉴스’라는 말도 있었다. 이 사장은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이고 누구의 말도 진지하게 듣는 성실한 성격을 가졌다. 그때 허문도가 ‘국풍’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 홍보에 열을 올리며 KBS-MBC 양대 방송사 사장들의 경쟁에 불을 질렀다. 결과적으로 방송사들의 과잉 경쟁 속에 국풍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동시에 욕을 얻어먹기도 했다.
<정리=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땡전뉴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이 주도한 불공정 보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활동 기사를 맨 먼저 보도한 것을 비꼬는 속어이기도 하다. 매일 밤 9시를 알리는 3초 전 ‘뚜뚜뚜 땡!’하고 울린 뒤에 방송되는 ‘KBS 9시뉴스’ 헤드라인 또는 첫 소식에서 바로 “전두환 대통령은…” 이라는 멘트가 나온 데서 따왔다.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