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제의 만행
우리 정신·얼 말살하려 한 일제
일제는 우리 문화의 원동력인 우리의 자연을 마음대로 유린, 훼손했다. 철도를 내고 길을 낸다고 저수지를 만든다고 허울 좋은 공사를 내세워 마구잡이로 산허리를 끊어 아름다운 경관도 훼손했다. 중요한 고적을 마구 파헤치고 고적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등 우리 산하를 난도질하고 우리 문화유적을 파괴하고 풍수사상에서 중요한 혈이요 명당에는 장대 같은 쇠못을 박고 쇳물을 붓고 뭉개버리고 울창한 산림을 마구 베어 버리고 토지측량을 해 정리한다고 임자가 불분명하거나 무연고거나 잃어버린 토지 등 수백억 평을 일인회사 소유로 하는 등 그 만행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것이다.
전국의 중요 고분 유적지를 군대의 경호 하에 백주에도 도굴하고 어용학자는 일본의 고분과 유적을 연구하느라 우리 고분과 유적을 마음대로 실험 발굴하고 그중 중요한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보고서조차 내지 아니한 유적이 상당량에 이른다.
그뿐인가 우리는 조상을 숭배하고 조상님의 은덕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왔다. 감히 아무 관계없는 남의 선조의 무덤이라도 무연고의 고분이라도 도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제는 조선인을 도굴꾼으로 키우고 도굴을 조장해 거기서 나온 갖은 문화재를 헐값에 사서 일본으로 실어갔다. 서울에도 큰 일본 골동품 가게와 상인이 많았고 지방마다 자전거포나 유성기 가게나 일인들이 하는 점주가 모두 골동품 수집 상인으로 도굴품을 사 모아 서울거상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이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속심으로는 우리를 영구히 식민지화하려면 우리의 정신을 송두리째 황폐화해 우리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우리의 뿌리가 무엇이었는지를 모르게 하고자 했다.
우리 민족을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했다.
우리의 정신을 우리의 얼을 송두리째 말살하려 했다. 우리말도 못하게 하고 우리글도 못쓰게 했다. 우리말과 우리역사, 우리문화를 연구하면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다. 일제 말기의 발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모두 일본 성과 이름으로 바꾸게 했다.
그때 아마 일제 강압에 못 이겨 99.9%가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꿔 우리 이름이 없어지고 겉으로 왜놈같이 되어 왜말을 쓰고 왜 글자를 쓰고 왜의 역사문화를 배우고 칭송해야만 했다. 2차 대전에 우리를 스스로 가담시키기 위해 우리를 차별하고 일부러 무시하고 짐승처럼 대하던 저들이 소위 일제와 우리가 동조동근이라는 같은 조상 같은 뿌리라는 학설을 내세워 내선일체를 주창하고는 징병제도를 강화해 우리 젊은이들을 침략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뿐 아니라 징용이라 해 우리 백성을 나이에 상관없이 잡아다가 탄광에서 토목공사에서, 벌목장에서, 전장에서, 혹사하고 죽이고 우리의 꽃다운 여인들을 마구 잡아다가 정신대라는 이름을 붙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
여인네는 몸빼를 강제로 입게 하고는 노력동원에 몰아넣고 머리를 잘라 「까미」를 시키는 등 그 악행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요. 자연훼손, 토지점거, 유적지파괴 도굴 등 문화말살을 넘어 민족말살을 획책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우리의 얼을 의연히 지키고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가슴에 담고 있던 우리 선인들은 왜에 조금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아니하고 기개가 살아 있었고 우리가 왜보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선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정신과 자존심을 지니게 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기개가 살아있도록 해준 순국선열과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우리의 국학자, 과학자, 교육자, 종교인 등 모든 분들께 무한한 존경과 고마운 마음을 영원히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또 조선조의 높은 문화에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지녀 높은 문화가 민족의 위기를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큰 힘이라는 것을 새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과 신념을 가지고 전통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일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 다시 한 번 크게 깨달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청자 귀룡주전자
머리와 그 밑에서부터 가슴에 이르는 긴 목 부위는 용의 형태이고 몸체는 거북 형태다.
용과 거북이 어우러져 하나의 조형을 이루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물고기와 용이 어우러진 조형도 있고 귀부(비석받침)는 이 주전자와 같이 거의 용두 귀신으로 돼 있다.
이 청자 귀룡형 주전자는 일본과 국교정상화회담 당시 문화재 반환도 논의가 돼 그때 아주 어렵게 반환된 문화재 100여 건 중 하나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 제실박물관에 바친 것만 공식적으로 반환됐다.
고려시대 귀부의 용머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용머리는 다른 청자 주전자와 달리 용의 주둥이가 아니라 물고기나 새 주둥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거북 등에는 육각형 음각 내에 [王]자가 있고 거북은 연화좌 위에 앉아 있으며 손잡이는 연 줄기 두 가닥을 자연스럽게 말아 붙였으며 비색의 아름다운 유약이 전면에 두껍게 발려 있다.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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