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존 화장품] -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참존 화장품] -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강휘호 기자
  • 입력 2013-11-11 10:38
  • 승인 2013.11.11 10:38
  • 호수 1019
  • 4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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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 전략 고집…0.1mm 두께 피부 신화 썼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다섯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품질 경영’이라는 고집으로 화장품 업계에 우뚝 선 참존 화장품(회장 김광석)이다.

1939년 일본에서 태어나 경남 하동에서 자란 김광석 참존화장품 회장은 성균관대 약학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 스카라 극장 앞에서 피부약만을 전문 조제하는 피보약국을 20여 년간 경영했다. 이때 축적한 피부에 대한 자신감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1984년 참존화장품을 설립한다. 이후 철저한 차별화와 고집스런 전문화 전략을 통해 단기간 내에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보기드물게 알짜 경영을 이뤄내고 있다. 그 후 30여 년동안 기초 화장품만을 고집하며 세계 1등 제품을 만들어오고 있다. 피보약국 약사 시절부터 오늘날 참존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는 단 하나, 0.1mm 두께의 피부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과 건강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었다. 최고의 품질이 아니라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샘플 전략, 최고 경영인이 피부 전문가가 아니라면 직접 해닐 수 없는 철저한 세미나 전략, 항상 고객들과 가장 아름다운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고 같이 정상에 오르고자 노력하는 서비스 전략, 이러한 참존의 독특한 경영 노하우인 전략들이 성공한 것도 피부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맞아, 그거야!  피부병 고치는 조제약!”

김 회장의 피부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66년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다. 김 회장은 당시 제약회사 입사 시험에서 한 차례 고배를 맛본 뒤 바로 약국 개업을 결심했다. 그해 5월 인현동 스카라 극장 앞 골목에 있는 보건당 약국을 인수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김 회장은 세상에 겁날 게 없었다. 약국만 개업하면 만사형통일 거라 굳게 믿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김 회장의 기대는 개업 첫 달부터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골목 초입에 약국이 두 군데나 있어서 사람들이 골목 안에 있는 김 회장의 약국까지 약을 사러 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외상으로 갖춰놓은 약에는 먼지만 쌓여갔고 빚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때부터 자나 깨나 약국을 살려낼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뭐가 좋을까? 나만의 특별한 뭔가를 만들어낼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약국이 살 길은 다른 약국에는 없는 특별한 조제약을 만들어 파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조제약을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고민하던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피부병 조제약이 정답이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엔 1964년 동경올림픽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옮아왔다고 해서 왜옴이라고 불리던 피부병이 유행하고 있었다. 왜옴은 전염 속도가 무척 빠를 뿐만 아니라 한 번 옮으면 좀처럼 낫지 않는 고질병이었다. 이에 김 회장은 효과가 탁월한 외용약을 개발해 내놓는다면 충분이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외용약은 내복약에 비해 위험부담이 적다는 것도 김 회장의 결심을 부추기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김 회장은 당장 피부과 전문서적들을 펼쳐놓고 연구에 들어갔다. 피부과 전문 서적에서 뽑아낸 원료 약품만 해도 무려 50여 종이 넘었다. 그 과정에서 김 회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르내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 회장은 외용약 개발에 성공, 완성되자마자 약국 창문에 ‘피부병에 잘 듣는 조제약 있습니다’라고 적은 광고판을 내걸었다. 광고판을 보고 문의를 해오는 손님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직접 만든 외용약을 발라보게 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다. 참존의 샘플 전략은 그때 시작됐던 것이다.

그후 김 회장은 피부병에 고생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약을 쓴 후 멀쩡히 약국 문으로 들어오는 장면들을 자주 경험했다. 자신감을 얻은 후 김 회장은 외용약 샘플을 만들어 나눠주면서 적극적으로 약국을 알려나갔다. 보건당이라는 약국 간판도 ‘피부를 보호한다’는 뜻의 피보약국으로 바꿔달았다.

그런데 성공가도를 달리던 1979년 김 회장은 인생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피보약국이 유명세를 타자 전국 방방곡곡의 약사들이 김 회장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김 회장의 조제약을 자기네 약국에서 팔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방전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조제한 약을 가져다 팔아주겠다는데 거절한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약을 조달해준 약국이 전국 60군데가 넘었다.

그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무허가 제약으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김 회장을 도저히 그 조처를 납득할 수 없어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고 도피 생활로 들어갔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약사가 갈 곳 없는 도망자로 추락해 버린 지 7개월,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양산 통도사의 골방이었다. 김 회장 앞에 놓인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벽이었다. 그런데 텅빈 방 안에 빛 바랜 신문 한 장이 김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6개월 전 자신의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김 회장은 그 신문을 움켜쥔 채 울고 또 울었다. 이렇게 숨어지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의구심이 든 것이다.

그때 김 회장의 나이는 마흔, 그 어떤 것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이었다. 남들 앞에 떳떳이 내보일 수 있는 뭔가를 완성하기로 약속한 예순 살까진 아직 20년이란 긴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 남은 20년을 무의미한 도피 생활로 허비할 수 없다는 오기가 치솟았다.

그 길로 산을 내려온 김 회장은 서울지검을 찾아가 자수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난의 서막에 불과했다. 1심에서 집행유예 5년, 8억 30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약국을 하면서 조금씩 갚아 간다해도 평생이 걸릴 만큼 큰 액수였다.

생각다 못한 김 회장은 항소심을 신청해 시간을 벌어놓은 다음 다른 사업을 도모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업은 손대는 족족 실패를 봤다. 더 이상 새로운 사업을 벌일 용기나 투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기분이었다. 그 자포자기의 순간에 무슨 계시처럼 떠오른 것이 화장품 사업이었다.

약국의 약사에서 화장품회사 사장으로의 변신. 언뜻 생각하기엔 전혀 엉뚱해 보이지만 둘 사이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피부라는 연결고리였다.

김 회장은 맨 먼저 우리나라 10대 화장품 회사의 공장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열이면 열, 모두 김 회장을 말리려고만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관적인 태도도 김 회장의 의욕을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김 회장의 투지에 불을 지르기만 했다.

된다는 믿음이 곧 가능성이다

참존의 전신인 ‘부한화장품’이 창립된 1984년 11월, 드디어 김 회장의 첫 시제품이 나와 판매에 들어갔다. 하지만 광고 한 번 안 내보낸 제품을 받아주겠다는 화장품 전문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물론 광고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공장 임대료와 수도세, 전기세만 해도 벌써 8개월 치나 밀려 있는 터였다.

그래도 그의 머릿속엔 온통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김 회장은 “난 꼭 될거야. 성공에는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내가 해야 할 일은 훗날 화장품 업계의 1인자가 돼 세상 사람들에게 참존의 제품을 자신 있게 권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다시금 용기를 냈다.

그러나 김 회장이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은 품질 뿐이었다. 사람들이 절대로 승부수가 될 수 없다던 품질. 그것이 김 회장만이 던질 수 있는 결정적 승부수였으므로 김 회장은 다시 또 거꾸로 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김 회장은 무조건 품질, 또 품질로 승부를 보겠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이미 기존의 대기업들이 화장품 시장에 포진해 있어서 신생 기업의 시장 진입이 매우 어려웠으며, 특히 광고를 하지 않는 제품의 화장품 코너 진입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화장품 업계에서는 봄이면 노란색 레몬 화장품을, 여름이면 푸른색 쿨 타입 또는 젤리 타입의 화장품을 내놓는 것을 관행으로 여겼다. 

이러한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참존을 품질 우선의 기업으로 소비자에게 각인시킨 것은 바로 ‘샘플전략’이었다. 참존은 광고에 투자하는 대신 대량의 샘플을 배포하여 품질로 정면 승부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 결과 샘플을 써 본 사람들의 입소문에 의해 참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참존의 광고 슬로건이자 제 1경영전략인 “샘플만 써 봐도 알아요”라는 문구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품질 지상주의를 지향하는 참존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김 회장의 품질 고집은 결국 참존 화장품을 성공이라는 반열에 올려다 놨다. 참존 화장품은 창업 5년 만에 30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1992년에는 일본 진출을, 1994-1995년도에는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에 국내 화장품으로는 처음으로 기내면세점에 오르게 됐다. 또 1999년도에 5백억 원 매출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기까지 참존 화장품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특히 참존이 만들어 낸 대표 히트상품 ‘데이나이트 마사지크림’, 국내 최초의 수성세안제 ‘클린싱 워터’, 영양크림과 에센스를 하나로 합친 ‘크림엣센스’ 등 상품들은 차별화 전략을 바탕으로 여전히 기초 제품 업계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게 맞이한 참존의 성공에도 김 회장은 2013년이 된 지금을 제 2기로 평가하고 있다. 지난 30년이 사업의 기반을 닦고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 시기였다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10년은 새로운 도약을 향해 다시 한 번 뛰어오르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 회장은 참존의 2기, 즉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한 방침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제품을 지금보다 더욱 더 좋게 만든다. 궁극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명품이 될 때까지 쉼 없이 연구하고 달려갈 계획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참존의 소망이자 참존을 아껴주는 고객들의 영원한 소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가격은 되도록 저렴하게 낮춰나간다는 것이다. 소비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가장 좋은 제품을 가장 싼 가격으로 구입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마지막으로는 보다 편리하게 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 소비자가 왕이라면 안방에 앉아서도 아주 편안하고 손쉽게 제품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참존은 유통 채널을 다각화 하고 첨달 기술을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여전히 김 회장은 “앞으로 내게 주어질 10년은 참존의 신념이 그대로 이뤄질 것을 굳게 확실하고, 또 그것을 위해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가는 일로 채워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리=강휘호 기자>
<참고자료=성공은 나눌수록 커진다 中|작가 김광석 |출판 아이북>

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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