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과 6·29선언, 제6공화국 출범
김영삼-김대중 씨가 사실상 야권의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면서 야당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 논의와 주장이 활발해졌다.
이에 대해 정부 측에서는 내각제 개헌 쪽으로 방향을 잡고 여야 간에 개헌을 하기 위한 여러 차례 화합이 있었지만 혼란만 가중됐다.
드디어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현행 헌법으로 제13대 대통령을 치르게 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다. 이 조치 이후 정치권은 물론이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아야 한다는 직선제 개헌 주장이 더욱 거세지자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이 나오게 된다.
전두환 면전에서 노태우 후계 반대
1987년 3월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정국 주도권을 부여한다는 언급이 있었으며 정권의 후계구도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어 6월 초 즈음에 청와대 상춘관에서 민정당 집행위원회가 열려 당 지도부가 참석한 가운데 전 대통령께서 후계자 지명에 대한 장황한 말을 한 다음에 노태우 당 대표위원을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나와 이재형 국회의장도 자리를 같이했다. 이 의장은 노태우 씨 지명에 반대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자리에 앞서 전 대통령이 나를 보자고 한다는 연락을 받고 청와대를 들어갔다. 전 대통령은 나에게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해야겠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노 대표의 후배이니 다음에 해도 되지 않겠나? 앞으로 군대를 잘 통솔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해를 하라”고 당부했다.
전 대통령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네가 국회의원들을 잘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에둘러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부탁에도 “그것은 좀 곤란합니다. 권력은 위에서 종으로 흐르는 것이 정상인데 횡으로 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고 했다.
그럼에도 전 대통령은 노 대표 후계의 불가피성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후계 결정에 많은 고려와 고뇌가 있었음을 내비쳤다.
이유야 어찌됐든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청와대를 나온 첫 번째 대통령이다. 임기 후반에 이런 저런 얘기가 돌았지만 전 대통령 자신이 7년 단임으로 끝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고, 주변에서도 단임으로 끝내야 한다는 묵언의 합의가 있었다. 그런데 해외에서 찾아오는 외신기자들이나 학자들 사이에서 과거 군사적인 힘으로 집권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 정권을 이양하지 않는 전철을 들어 전 대통령의 권력이양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헌법상 7년 단임 임기 약속을 지킨다는 본인의 확고한 각오와 함께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 항쟁 등 국민적 요청도 있었기 때문에 임기를 고치는 개헌을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권력에서 물러나는 데에는 권력자보다 측근에서 권력의 연장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었지만 전 대통령의 경우 측근에서도 단임으로 임기를 마치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상태에서 노 대표를 후계자로 결정한 것이다.
전 대통령으로서는 후계구도에 대해 안정적인 정권인데 인수와 더불어 자신의 퇴임 후 안전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권력이라는 속성이 부자, 형제, 친구 관계를 뛰어 넘는 것이어서 권력이다.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안전과 모든 보장을 전제로 물려주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지만 마음속으로는 권력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전 대통령의 경우도 거의 완벽한 권력 승계를 한다고는 했지만 퇴임 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때로는 후회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헌법에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두고 그 의장을 직전 대통령이 하도록 못을 박았는 데도 오히려 그 기구 설치나 운영이 되지 않고 자신이 백담사행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당시 나는 전 대통령의 후계 결정을 들으며 냉면에 소주도 한잔하면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걷고 있는데 다시 날 불러서 거듭 “국회의원들에게 설득을 잘 하라”고 부탁했다. 나는 끝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왔다.
노 대표는 후계 지명을 받은 직후 눈물을 글썽이면서 전 대통령을 찾아가 술 한잔을 권하고 내게 찾아와 “잘 도와달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잘 하시라”고 답했다. 당시 후계지 명 발표는 이종률 청와대 대변인이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뒤에 나온 얘기지만 한때 전 대통령은 후계자로 노신영 국무총리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노 대표로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군을 잘 통솔해야 국정운영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청와대의 후계 지명 이후 당에서도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노 대표를 민정당의 대선후보로 발표하고 당 대표는 채문식 의원이 맡게 됐다. 5공 헌법대로라면 선거인단 선거와 투표를 통해 노 대표가 무난하게 집권할 것이라는 것으로 예상됐지만 야권의 강력한 반발과 시민들의 저항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났다. 이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내용의 6·29 선언을 노 후보가 직접 발표했다. 노 후보는 개헌 후 직선이라는 험한 대선 경쟁을 거쳐 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6·29선언이 발표될 때 나는 안동에 내려가 있었다. 선언 직전에 노 후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선을 치르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서울에서의 추후 논의를 약속하고 상경했다.
13대 대통령 선거 1盧 3金 대결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 하에 선거에 임했지만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이른바 3김 씨는 영남(부산 경남), 호남, 충청지역을 기반으로 대권 도전에 뛰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노 후보는 대구 경북(TK) 지역을 중심으로 여당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거센 지역감정과 대규모 군중 동원의 선거전을 치렀다.
3김은 지역 연고 때문에 유세를 제대로 못했고, 노 후보는 호남지역 유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전북 이리역 앞에서는 유세 중에 돌이 날아오는 불상사도 있었다. 더러는 선거 전략상 자신의 지역 단합을 위한 조작성도 없지 않았다.
12월 16일 치러진 13대 대선 결과 총 유권자 2587만3624명 중 2306만6419명(투표율 89.2%)이 투표했고, 이중 무효표 46만3008표를 제외한 유효투표는 2260만3411표였다. 득표는 노태우 후보가 828만2738표(득표율 36.6%)로 1위 김영삼 후보, 김종필 후보가 12만3067표(득표율 8%)로 4위, 신정일 후보가 4만6650표(0.2%)로 5위를 차지했다. 노태우 후보가 임기 5년의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1988년 2월 25일 취임함으로써 6공화국이 출범했다.
노태우의 북방정책 저자세 외교
내가 들은 얘기로는 노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 “나는 전 대통령이 한 것과 모든 것을 반대로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면서 5공 정권과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전 대통령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노 대통령은 직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전 대통령의 권력 승계자로 권좌에 올랐지만 측근들의 진언에 따라 5공화국과의 차별화로 자신의 시대를 열고자 했다.
한 조직에서 이런 지도력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방향을 제시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돌파하는 능력은 미흡했다.
그래서 선거 때 ‘보통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고 재임 중에는 ‘물 태우’라는 별칭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여겨진다. 노 대통령의 성격은 자신이 좀 불편하고 불만스럽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으면서 부드럽게 대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참모들에게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게 하고 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노 대통령의 원만하고 무난한 성격을 이용해서 측근 실세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권력의 상도를 벗어나 행동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치적으로는 전 정권에서 유치한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과 구소련-동유럽권, 중국과의 수교를 한 북방정책, 1987년 6·29선언으로 이루어진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화의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6공화국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영향으로 대공산권 외교를 하는 데 너무 실적을 위해 서두르는 바람에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소련의 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은 치욕만 남겼다. 나는 당시 미국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에서 유학 중에 이 회담을 유심히 지켜봤다. 노 대통령은 구소련 측으로부터 만난 것도 비밀로 할 것과 사진도 스틸사진만 찍으라는 무례한 요구를 받으면서 한 나라의 국가원수로서 굴욕감을 맛봐야 했다.
중국과의 수교 과정에서도 중국의 요구에 따라 기존의 우방인 대만(중화민국)과의 단교 과정도 저자세 외교를 해야 했다. 당시 공산권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동유럽과의 수교도 한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경제적 지원과 동시에 수교를 맺었지만 서둘러 실적에 급급했던 북방 외교는 자연스럽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도 당시 들리는 얘기는 노 대통령이 “골치 아픈 국내 정치보다는 외교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남북관계도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김일성이 체제 유지를 위해 급급한 가운데 남북 간의 고위급 (총리)회담을 열어 비교적 현실적인 기본합의서를 만들어 내고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등 남북 평화의 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민주화에 따른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 분출로 노사분규가 심각했지만 경제성장은 5공화국의 기조에서 크게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