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도-이상재의 머리에서 나온 기획안
당시 나는 한국일보 윤종현, 조선일보 송지영 논설위원 등 중진 언론인 몇 사람을 만나 언론계 상황을 듣게 됐는데 대체로 문제가 많다는 의견과 함께 언론 정비를 위해 통폐합이 필요하다는 말들을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언론계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나서 언론의 통폐합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보안사에서 각 언론사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주요 보고서를 받아보는 정도로 관망할 뿐이었다. 계엄령 하에서 언론은 검열이었기 때문에 그 업무를 보안사 정보처에서 맡고 있었다.
검열단에는 이상재 씨가 있었고 실제 검열 업무는 계엄사 공보장교들이 처리했다. 그 사람들도 언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보도 내용을 검열기준에 따라서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론 검열이라는 게 까다로운 업무였던 탓에 매일 보도 내용을 놓고서 말썽이 많았다. 나는 정보처장으로서 다른 업무도 바쁜 중에도 언론 검열 때문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잡다한 고민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언론 검열로 빚어진 문제들은 검열 과정에서 기사 삭제에 기자들의 반발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반대급부로 언론사 내에는 언론투쟁위원회(조선-동아 언론투위)가 만들어져 기자들이 집단 반발했고, 언론노조까지 가세해서 검열의 부당함을 항의했다. 군인들이 언론을 검열하면서 문제될 것 같은 기사들은 사전에 삭제하고 다른 기사로 채워 보도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여기에 맞서 해당 지면을 그냥 백지 상태로 신문이 인쇄되기도 했다. 자연히 구독자들은 어떤 내용이 삭제됐는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이런저런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당시 보안사 정보처 이용인 2과장이 당일 언론보도 내용을 취합해서 저녁에 와서 보고하는데 매일 말썽이 없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언론통폐합 조치에 대해서는 허문도-이상재 씨가 지속적으로 주장했기에 이를 진행하기 위해선 지휘계통을 따라서 전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지침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전 사령관에게 말을 못하고 내게 와서 보고해 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것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미뤄두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다가 나는 1980년 10월 군에서 전역하면서 보안사 정보처장을 그만두었다.
전역하기 한 달 전쯤에 허문도-이상재 씨가 만들어 온 언론통합보고서를 들여다 보니 방송은 MBC, TBC, 동아방송을 없애고 KBS1, KBS2, KBS3으로 한다고 돼 있었다. 신문은 조간 3개지(紙), 석간 3개지(紙)로 하고, 경제신문과 스포츠신문은 각 2개, 영자신문 2개사였다. 지방신문은 ‘1도1사’로 정하고, 통신사는 동양과 합동통신을 1개사로 통합하자는 보고서였다.
이러한 통폐합 원칙 하에서 자산과 인력배치 안까지 넣어 차트로 만든 보고서에 그림을 그려 왔다. 이 보고서를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좀 과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에 언론 매체 수와 자산, 인력 이동에 대한 보고서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다음에 보고 차트를 내 방 한쪽에 놓아둔 상태에서 나는 군복을 벗었다.
그런데 허문도-이상재 씨는 빨리 청와대에 보고해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이때 허문도 씨는 청와대에 정무비서실 비서관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이광표 문공부 장관에게 말하고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한 다음 보고 날짜를 잡아서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는 아무 직책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앞서 보고받은 대로 차트를 걸어놓고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는 노태우 보안사령관, 이광표 문공부 장관, 허문도 정무비서관이 함께 있었다. 김경원 비서실장과 허화평 보좌관은 그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 대통령은 언론통폐합에 관한 보고와 설명을 모두 들은 뒤에 다소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 “지금까지 많은 개혁조치를 했는데 언론까지 이렇게 통폐합하면 되겠느냐”면서 “그대로는 안 된다.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다시 수정한 것이 MBC는 살리고 KBS는 2채널로 하고 중앙일보, 한국일보도 살려서 조간 3개, 석간 3개로 해서 6대 일간지로 확정했다. 신아일보만 없어지는 처지가 됐다. 당시 중앙일보 이종기 사장(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사위. 삼성화재 회장 지냄)과 한국일보 장강재 사장이 자사 신문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여기 저기 쫓아다니면서 애쓴 기억이 난다.
이렇게 언론통폐합 조치가 확정되고 이광표 장관이 대통령의 최종 결재를 받았다. 시행은 보안사에서 하게 됐는데 나는 이미 전역한 후였다. 폐간되는 언론사의 포기각서를 받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TBC가 마지막 방송을 하고 사기(社旗)를 내리는 데 24시간이 걸렸다. 언론 해직기자 문제는 나로서는 허문도-이상재 씨가 중심이 돼 작성한 명단을 이광표 장관에게 넘겨줬다. 그때 내가 넘겨준 명단은 50명 정도였는데 발표된 것은 500명 정도였다.
12대 총선 기간 노태우 문전박대 사건
나는 1982년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으로 민정당 사무총장에서 물러나서 국회의원으로 다른 직책을 맡지 않고 있다가 1년 뒤에 국회 원구성과 당직 개편 때 국회 내무위원장을 맡게 됐다.
그때는 내무위원회가 내무부, 안기부, 총무처, 서울시, 선관위, 경찰청, 산림청 등의 소관 업무를 다루는 자리라고 해서 내무위원장이란 자리가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몇 차례 안하겠다고 했는데 이상재 당 사무차장이 집으로 찾아와서 “각하께서 이 자리를 맡으라고 하시니 맡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어 이종찬 원내총무가 찾아와서 거듭 권유하는 바람에 그 자리를 맡게 됐다. 내가 내무위원장을 하는데 이종찬 의원이 여당의 원내총무로 운영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가끔 각 상임위원을 불러서 회의를 했다. 그러나 나는 참석하지 않고 김중권 의원이 간사로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민정당의 제12대 총선은 권익현 대표와 이한동 사무총장 주도로 치러졌다. 당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친위대’ 조직이 정국을 움직였다. 당시 허문도 씨가 학생들 조직 캠프를 만들어야 한다고 움직이다가 세간에 알려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몇 사람이 전 대통령에게 불려가기도 했다. 나는 12대 총선에 민정당 공천을 받아가지고 안동-의성으로 내려가서 선거를 차르게 됐다. 당시 안동-의성 선거구에는 4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민한당에서 오경의, 국민당 김영생, 신민당에서 신진욱 후보가 나왔다. 12대 총선은 선거직전에 그동안 묶여 있던 김영삼, 김대중 씨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풀어줘서 11대 선거와는 양상이 달랐다.
선거 기간 중에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구를 순회하는 중에 안동을 방문했다. 사전에 노 위원장을 만났을 때 안동에 오겠다고 해서 내가 “안동에는 안 오셔도 괜찮으니 다른 지역을 더 방문해 격려하시는 게 좋겠다”고 전했는데도 나의 선거를 돕기 위해 안동 선거사무실을 찾아왔다. 마침 내가 사무실에서 선거 조직과 비용 등 법정 비용 한도를 챙겨보고 최소 활동비를 지급하고 있던 중에 노 위원장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잠시 기다리시라고 했다. 그런데 노 위원장을 따라온 기자들이 “노태우 위원장이 안동에 갔는데 권정달 의원이 노 위원장을 밖에다 30분 세워놓고 기다리게 했다”는 기사를 보도하는 바람에 노 위원장으로서는 상당히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로서는 노 위원장이 안동 사무실을 방문 했을 때 잠시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노 위원장이 서운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서울에 와서 직접 찾아 뵙고 “안동에 오셨을 때 서운하게 생각하셨느냐”고 했더니 “좀 그랬다”고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없던 일로 하자며 악수를 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러나 12대 국회 동안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 간간이 튀어 나와 노태우 위원장과 나의 관계를 연관시켰다. 뒤에 알고 보니 선거 기간 노 위원장이 다른 지역에 갔을 때 후보가 밖에 쫓아 나와 선거참모들과 도열해 정중하게 맞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나와 가까운 분이기 때문에 신경을 덜 쓴 것이 노 위원장을 수행했던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동-의성 선거 결과는 전국에서 네 번째 득표율로 무난하게 당선됐다. 제12대 국회가 개원하고 원 구성이 됐는데 의장은 이재형 전 당 대표위원이 선출됐고, 부의장에는 최영철(여당), 김녹영(야당) 의원이 선임됐다. 나는 11대에 이어 계속해서 내무위원장을 맡게 됐다.
김동주 국회 상임위 최루가스 투척
12대 총선 결과는 여당인 민정당이 득표율 35.2%로 148석(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을 차지했고, 신민당이 득표율 29.3%로 67석(지역구 50, 전국구 17석), 민한당이 득표율 19.7%로 35석(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 국민당이 득표율 9.2%로 20석(지역구 15석, 전국구 5석)을 차지했다. 그 밖에 무소속이 4석, 신정당과 민주사회당이 각 2석씩 얻었다. 현 민주당 김한길 대표의 부친인 김철 사회당 대표는 서울 동작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사회당 역시 1석도 얻지 못했다. 그 외 민주농민당과 안민당이 1석을 얻고 자유민족당과 근로농민당, 기독교당 등은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최다 득표자로는 서울 강동의 신한민주당 김동규 후보로 10만2404표를 얻어 당선됐다. 또 충청북도 괴산-진천-음성의 민정당 김정호 후보가 67%의 최고 득표율이 나와 같은 선거구의 국민당 김영생 후보가 15.4%로 최소 득표율로 당선됐다.
12대 국회 기간 중에는 각종 데모가 빈발해서 내무위원회는 항상 시끄러웠다. 어느날 야당의 김동주 의원이 경찰이 데모현장에서 쓰는 최루탄 가스가 묻은 옷을 가방에 넣어 갖고 국회 상임위원회로 들고 와서 자기 의자 밑에 두었다가 발언 시간에 당시 정석모 내무부 장관을 상대로 경찰의 데모 진압을 비판하면서 최루탄 묻은 옷을 들어 흔들어대면서 내무장관에게 던지려고 하다가 위원장 석으로 잘못 던져져 소동을 빚었던 일도 있었다.
김동주 의원은 뒤에 나에게 사과하면서 자기 어머니가 장사해서 자기를 공부시켰는데 “국회 가면 권 위원장에게 잘 하라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됐습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12대 전반기 내무위원장을 지내고 후반기에 당 국책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남북 국회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를 했고, 국제의회연맹(IPU) 총회 한국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