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오병호 프리랜서] 국정원 정치·대선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파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국정원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여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정원은 MB 정권 당시 국정원 핵심으로 알려진 국정원 직원 이모씨를 파면한 데 이어 내부적으로 추가 인사 조치를 대대적으로 단행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야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 일부에서는 “국정원이 댓글 사건 등 대선개입 의혹 사건을 흐리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이 조치에 대해 국정원 주변을 비롯해 사정기관 주변에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수사와 관련된 조치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국정원 정치 대선 개입 의혹의 몸통은 원 전 원장이 아니라 이씨라는 소문이 무성한 까닭이다. 말하자면 국정원이 국감 이후 검찰조사를 의식해 전 정권 핵심인사를 파면함으로써 사전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속셈 아니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우려 섞인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씨를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꼬리 자르기를 두고 이씨가 오히려 외부에서 폭로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긴장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실제로 국정원이 이번에 이씨를 파면하면서 이씨의 향후 행보에 사정기관과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친이계와 친박계 내부에서는 “이씨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불안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국가정보원은 최근 전임 정권 때 국정원 최고 핵심 실세로 지목된 3급 이모씨를 파면조치하고 이 외에 이씨와 연결된 관련 직원 수명에 대해서도 중징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를 파면한 표면적 사유는 ‘인사 전횡’이다. 국정원은 이씨가 지난 MB 정권 당시 심각하게 인사 전횡을 일삼았다고 판단하고 이 같은 극약처방을 내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공안 및 사정당국에 따르면 국정원은 최근 내부 감찰을 벌여 인사 담당이던 이씨 등이 원세훈 전 원장 재임 시절 직원들에게서 각종 인사 청탁을 받고 인사권을 휘두른 비리 사실을 확인하고 최근 인사위원회를 열어 징계를 확정했다.
국정원은 비리 정도의 경중에 따라 수위를 결정했지만 대다수가 중징계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씨 등은 본인들과 가까운 직원은 요직에 배치하고 사이가 좋지 않으면 한직으로 발령낸 것으로 국정원 조사 결과 드러났다. 심지어 이씨는 자신의 상관인 1〜2급 직원들에게도 비슷한 형태로 인사권을 휘두른 것으로 전해져 “원 전 원장이 아닌 이씨가 국정원 핵심 실세”라는 세간의 소문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MB정부 여러 의혹 이모씨가 열쇠
국정원 소식통에 따르면 이씨는 원 전 원장 취임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국정원은 원 전 원장이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부터 이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사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이씨가 원 전 원장 뿐 아니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러한 인사전횡의 실체를 밝혀냈다.
국정원이 지난 정권 당시 국정원을 움직였던 이씨를 파면하자 그와 관련된 여러 소문과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최근에는 검찰이 지난 정권 비리와 관련해 이씨를 수사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국정원 내부 동향에 밝은 한 소식통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씨에 대한 국정원 자체 조사가 진행됐다. 이씨에 대한 조사는 국정원 내부에서도 높은 보안사항으로 처리됐으며 그에 대한 징계처리 문제를 놓고도 국정원 내부적으로 많은 논의와 검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MB 정부 시절 국정원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대통령과 독대하는 등 청와대 업무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때 이씨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국정원 소식통들 사이에서는 당시 이씨가 “언젠가부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연락도 닿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
일부에서는 이씨에 대해 “국정원 댓글 사건을 비롯해 정치 대선 개입의 핵심이 원 전 원장이 아니라 이씨일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그가 국정원 최고 핵심이었기 때문에 해당 사건에 직접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검찰 주변과 야권 일각에서는 검찰의 국정원 수사를 두고 “유인책에 말려 실체를 못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몇 가지 정황이 석연치 않아서다.
예컨대 국정원 정치개입과 관련해 대선 전에는 경찰이 ‘없다’고 했다가 대선 후에 특별한 이유 없이 ‘있다’고 말을 바꾼 것, 원 전 원장이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보란 듯이 해외로 출국하려 했다는 점 등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다. 말하자면 애초 원 전 원장의 행동은 이씨를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려는 ‘시선 끌기’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 전 원장에게 세간의 이목이 쏠린 사이 이씨가 MB 정부의 비밀문건 등을 파기 또는 소각하거나 다른 곳으로 빼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정권이 바뀐 직후 원 전 원장의 출국은 국정원 내부에서도 여러 말이 무성하다. 국가기밀을 취급했던 이들은 말단 직원에서 고위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기밀유출 우려 등으로 해외 출입국에 일정 부분 제한을 받는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원 전 원장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또 국정원 여직원 사건으로 파장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보란 듯이 해외 출국을 준비했다. 이런 점에서 원 전 원장이 시선 끌기를 시도한 것 아니냐는 추측에 무게가 실린다.
검찰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검찰 안팎에서 MB 정부 비밀기록물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소식통은 “MB 정부는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노무현 정부가 청와대 비밀기록물을 빼돌렸다고 주장하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에 불을 붙였다”며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다른 모습이다. 이명박 정부를 승계한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부의 문건이 파기된 사실을 확인했으면서도 이를 특별히 문제 삼지 않고 있는 모습”이라고 의구심을 드러냈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비밀기록’을 단 한 건도 남기지 않고 모두 폐기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인 적 있다. 당시 새누리당 이혜훈 최고위원은 지난 3월 7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MB 정부가 비밀기록을 단 한 건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 지정기록물 자체도 이전 정부에 비해서 30% 줄었다는 보도가 있었다”며 “만약 폐기했다면 이는 엄중한 사안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 최고위원이 참고한 해당 보도내용을 살펴보면 MB 정부의 대통령 기록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과 비교해 8분의 1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 파면은 징계 아닌 면죄부
이때 드러난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측은 MB 정권 때 청와대 대통령실과 대통령 자문위원회 등에서 지난 4년간 통보한 기록물 생산은 총 82만5701건이라고 밝혀졌다. 연평균 20만6425건의 자료를 생산한 셈이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5년간 총 825만3715건, 연평균 165만743건의 기록을 남긴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참여정부의 기록물을 문제 삼았던 MB 정부 기록물이 참여정부에 비해 8분의 1 수준(12.5%)에 불과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민주통합당의 2012년 국정감사 정책자료집에 따르면, 대통령실이 직접 생산한 기록량을 비교했을 때도 현저한 차이가 나타났다. MB 정부 대통령실은 지난 4년간 54만1527건의 기록물(‘위민 시스템’을 통한 전자기록 18만5570건, 종이기록 9422건)을 생산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 비서실은 5년간 204만449건이었다.
이 최고위원은 “이명박 정부가 넘긴 기록물 대다수가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물, 아니면 온라인 시청각 기록이었다는 보도는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이 최고위원은 이어 “중요한 기록물들을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폐기했다면 이는 엄중한 사안이라고 본다”며 “차기 정부에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국가의 중대한 기록물들을 폐기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성토했다.
정치권에서는 “이상득 전 의원 등 MB 정부 실세들이 구속되는 가운데 비밀기록이 단 1건도 없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라며 “차기 정부가 참고할 기록이 없어지게 되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국정원 주변에서는 이씨가 MB정부 시절 생산된 극비 X파일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 이 같은 소문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 전직 국정원 직원 L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는 인사권을 쥐고 국정원 내 호남인맥 축출에 앞장섰으며, 역대 국정원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부서를 신설해 자신이 부서를 총괄했다고 한다. 또 복수의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원 전 원장은 사실상 결재만 하는 바지 원장에 가까웠으며, 이씨가 국정원 실무를 총괄하는 사실상 실무 총책이었다. 대통령 보고도 원 전 원장이 아니라 이씨가 했다는 말도 있다.
이씨는 박주원 전 안산시장에 대한 검찰 수사를 사실상 배후 조종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검찰 수사에도 개입해 박 전 시장의 검찰구속을 뒤에서 지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박 전 시장은 검찰 수사로 옥살이를 하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지만 아직 당시 수사 배후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 당시 국정원 내 핵심 부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리 수집 업무를 하던 한 국정원 직원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비밀파일을 들고 지방으로 잠적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슬그머니 복귀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는 K라는 가명을 썼으나 실명은 Y씨였다. 그의 주변인들에게서확보한 증언에 따르면 관련 내용은 대부분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
국정원 내부에서는 이씨 등에 대한 중징계를 조직 내에서 ‘원세훈 잔재’ 청산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남재준 원장 취임 이후 시도된 내부 개혁작업이 본격적으로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정원에서 조만간 대규모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 “이씨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어 국정원이 이씨에게 미리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국정원 직원이 아닌 일반인 신분이 되면 직원으로 근무하던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뀐다. 우선 현직이 아니기 때문에 현 국정원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가 없다. 또 국정원직원법에 의거해 재직 중 취득한 정보는 발설할 수 없다. 이런 점들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야권에서는 “이씨가 더는 국정원 핵심이 아닌 일반인 신분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검찰 수사 대상에서 비켜갈 수도 있다는 노림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국정원에 재직하면서 많은 비리에 연루됐음에도 검찰조사 한 번 없이 파면이라는 조치만 받고 끝난다면 이는 사실상 면죄부나 다름없다”며 “만약 국정원이 이씨에게 전 정권 비리와 관련해 면죄부를 줄 생각이 아니라면 이씨를 파면할 게 아니라 검찰에 고발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정원의 이씨 파면이 검찰 수사를 피하게 해주고 지난 정권 비리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병호 프리랜서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