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중국서도 ‘매운 맛’ 돌풍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네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튀김과 떡볶이만으로 한식 세계화에 동참하고 있는 기업 아딸(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이경수 대표다.
이경수 아딸 대표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개척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수입이 넉넉하지도 일정하지도 않았다. 가난은 그에게 익숙했고 또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도 가난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97년 침례신학대학을 졸업한 이 대표는 아버지의 교회에서 전임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회자가 천직인 줄 알고 지내던 그가 사업을 생각하게 된 것은 교회 사정이 나빠진 2000년의 일이었다.
돈 벌 궁리를 하던 그는 장사를 생각해냈다. 사실 이 대표는 대학 시절 안해본 일이 없는 장사꾼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당시 사촌 형을 도와 특산품 할인 행사장에서 마른 오징어를 팔았고 과일 가게, 수영장, 중국집의 매출을 올리는 알바를 한 바 있었다. 또 미용실 인테리어까지 해 그에겐 장사꾼의 기질이 몸에 배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장사를 결심했지만 그에겐 자본이 없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업종을 찾던 중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장인어른의 튀김 가게였다. 이 대표의 장인어른은 1972년 경기도 문산 극장 앞에서 시작해 30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파 온 튀김의 달인이었다.
그러니 맛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그는 장인어른의 튀김에 떡볶이를 함께 파는 분식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 대표는 친지에게 빌린 2500만 원으로 신금호역 3번 출구 앞에 26.4㎡(8평)짜리 가게를 얻었다. 하지만 장사에 필요한 기계들을 구입하자 인테리어에 투자할 돈이 없었다. 이 대표는 아내와 직접 벽지를 붙이고 가게를 꾸몄지만 간판만은 직접 만들 수가 없었다.
결국 기존 가게였던 ‘자유시간 호프’의 간판에서 ‘호프’를 떼어내고 분식을 붙여 넣었다. 장인 어른의 튀김과 분식집 1등 메뉴 떡볶이를 기본으로 순대, 어묵, 탕수육을 더해 총 5가지 메뉴를 가지고 2000년 11월 ‘자유시간 분식’이 시작됐다.
평범한 진리에서 찾은 성공의 노하우
그런데 가게를 오픈한 지 며칠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었다. 원래 있던 간판에 분식만 바꾸어 놨으니 사람들은 그 자리에 분식집이 있는지도 몰랐다. 또 30년 노하우의 장인어른표 튀김이 그의 차별화 전략이었지만 먹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고민하던 이 대표가 생각해 낸 것은 평범한 진리였다. 요식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과 청결, 서비스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하나하나 충족해 나갔다.
첫째로 장인어른과 아내에게 유니폼을 입게 했다. 청결을 강조하기 위한 유니폼의 효과는 생각 외로 좋았다. 특히 오색머플러를 목에 묶은 아내의 유니폼은 스튜어디스를 연상시켜 ‘스튜어디스 아줌마가 만드는 떡볶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어 이 대표는 가게 앞에 대형 어묵통을 만들어 놓고 빨강, 노랑, 파랑 3가지 색깔의 어묵 꼬지를 몇백 개씩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이는 사람들의 눈길, 발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늘 몇백 개의 어묵이 삶아지고 있으니 제때 팔리지 않는 문제도 발생했다.
이 대표는 퍼지기 직전의 어묵을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어차피 팔지 못하는 것들을 홍보에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지니까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님에게 자연스레 홍보를 이어나가게 됐다. 부모님들은 아이와 손을 잡고 가게에 들렸고 얼마 후 손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대표는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튀김, 떡볶이 등의 배합비율을 기록 정리한 매뉴얼화를 이뤄 나가고 있었다.
웰빙을 콘셉트로 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허브 튀김을 만들었고 튀김 기름을 동물성 기름에서 식물성 기름으로 바꿨다. 6개월의 시험 끝에 콩기름, 옥수수기름, 채종유를 비율에 맞게 섞은 혼합유를 사용한 바삭한 튀김이 완성됐다.
그리고 그의 작은 분식집은 날로 유명해져 하루 매출 120만 원대의 대박 분식집이 됐다. 26.4㎡(8평)짜리 분식집에서 그가 기울인 마케팅 전략과 연구 개발 노력은 어느 대기업 연구실에 뒤지지 않았다. 어떤 환경에서도 손님을 끌어 들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쏟아 붙지 않으면 손님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던 것이다.
제 2의 출발 프랜차이즈 발을 담그다
그러던 2002년 1월, 이 대표는 방송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방송 관계자는 “아버지가 튀김을 만들고 딸이 떡볶이를 개발해 2대째 이어져 오는 분식집이라는 소재로 방송을 하고 싶은데요”라며 방송출연을 권했다.
그리고 2월 1일 그의 분식집 이야기가 방영됐다. 역시 방송의 힘은 대단했다. 손님들이 밀어 닥치기 시작한 것. 또 방송을 본 5촌 당고모에게선 신촌에 있는 자신의 가게와 동업을 하자는 제의도 받았다. 이 대표는 고민 끝에 동업을 결심했다. 이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던 프랜차이즈로의 출발이었다.
이 대표는 금호동 가게를 처분한 돈 6000만 원을 모두 인테리어에 투자해 패스트푸드점처럼 115㎡(35평)짜리 대형 분식집을 꾸미기로 결심했다.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이 대표는 건물 밖에 플래카드를 걸어 방송의 소재가 된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를 크게 적고 가게의 스토리를 덧붙였다.
시간은 지나 2002년 4월 3일 드디어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가 오픈했다. 역시나 이 대표의 가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섰다. 그 줄은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로 이어졌고 급기야 인근 대학 홈페이지에 맛집으로 등록되는 유명세까지 타기에 이르렀다.
2003년 일평균 매출이 180만 원일 정도로 장사가 잘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를 하기 위해 가게를 처분하고 둔촌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231㎡(70평)짜리 월세였다. 2층이라서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반 지하인 신촌점에서도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보증금 포함 인테리어에 총 1억 원, 이 대표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했다. 그런데 장사는 이경수 대표의 생각과는 달리 지지부진했다. 2층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메뉴의 단가가 낮은 분식은 포장이 많아야 되는데 2층까지 올라와 포장을 해 가는 손님은 거의 없다는 문제였다.
또 가맹점 사업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조건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가맹점 조건으로 대학가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장소와 99㎡(30평) 이상의 매장 규모를 고집했다. 떡볶이 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그만한 여유가 없다는 문제의 본질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프랜차이즈의 꿈을 안고 시작한 가게는 2억5000만 원을 삼킨 채 빚만 남겼다. 그의 실패 원인은 자만이었다. 이때 2층에 가게를 얻은 것도 예비 가맹점의 엉뚱한 개설 조건도 자신의 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 대표는 깨닫게 됐다.
이 대표는 매일 기도를 통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10시가 넘은 시간 이 대표는 또 다른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한 여성은 대뜸 분식 재료를 납품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8년 동안 그릇 가게를 했었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요식업으로 업종을 바꾸려던 차에 우연히 이대점에서 떡볶이를 먹어 보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었다.
여성의 가게는 26.4㎡(8평)였지만 떡볶이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여유 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이 대표는 마침내 초심으로 돌아갔다.
기회라 생각하고 재기를 다짐한 이 대표는 인테리어부터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꾸몄다. 대부분의 공사도 직접 자신의 손으로 했다. 그리고 떡볶이 기계를 사려고 여자와 함께 중앙시장에 들렸다가 우연히 운명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대표는 상일동 점주와 함께 들린 중앙시장에서 당시 꽤나 유명했던 외식업 광고 디자인 전문업체 RTM의 간판을 보게 됐다. 그는 몇 해 전 잡지에 소개된 것을 보고 로고 디자인을 문의했지만 상당히 비싼 비용에 다음을 기약했던 적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 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 대표는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잡지에 실린 사진으로 안면이 있었던 RTM의 이사를 본 것이다. 그리고 둘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 대표는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가맹점 1000개를 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RTM의 이사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모든 디자인을 도맡아 할 테니 자신과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이 대표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 대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로고, 사진, 문구, 홈페이지까지 전부를 최고의 퀄리티로 제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케팅 전문가의 협력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릇 가게에서 시작된 아딸의 첫걸음
그릇 가게였던 상일점 오픈 날은 아딸의 탄생일이기도 했다.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라는 이름의 첫 자를 딴 새 이름은 RTM 이사의 아이디어였다. 간판에는 아버지와 딸이 투박하지만 재미있게 그려져 있었다.
오픈 첫날부터 가게는 북적였고 가맹점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손님의 발길은 연일 이어졌고, 오픈한 지 몇 개월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가맹점을 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광고를 낸 것도 아니었는지라 이 대표는 의아했다.
알고 보니 연락해 온 사람들은 모두 상일점의 소개를 받은 것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이니 믿을 만하다는 점주의 이야기는 광고보다 10배 이상 효과가 있었다. 순식간에 10호점을 넘어서더니 가맹점을 하겠다는 연락은 더욱 폭주했다.
이 모든 것은 가맹점을 낸 점주들의 추천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여기서 이 대표는 프랜차이즈 사업은 본사와 가맹점의 간에 진심이 담겨 있어야함을 깨닫게 됐다. 진심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상대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 영업의 첫 번째 비결이었고 그리고 아딸에는 진심이 놓여 있었다.
이후 이 대표는 창업설명회 때마다 요식업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어떻게 성공하느냐보다 왜 실패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용기를 주기보단 찬물을 퍼부었다. 때문에 항상 창업설명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다음 날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날 근심이 가장 많아 보였던 사람들이었다.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찾아온 그들에겐 열정이 더 커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대표가 바라던 점이었다. 그는 다른 업체들처럼 상권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오라고 한다. 대신 3가지 팁(tip)을 알려줬다. 첫째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아파트나 동네 들어가는 입구, 두 번째는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편 가게들을 보게 되는 횡단보도 앞, 그리고 마지막은 파리바게트 옆이었다.
이 대표는 “파리바게트는 매장이 전국에 2000여 곳이 넘는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또 하나는 파리바게트 수익 대부분이 포장 매출이고 우리도 포장 매출이 주목표다”라고 설명한다. 또 아딸은 전 매장의 맛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전국 3곳에 물류센터 거점을 두고 하남의 자체공장은 전자동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2년 7월 아딸은 중국 북경 오도구 지역에 가맹점을 오픈했다. 길거리 음식에 불과했던 떡볶이를 들고 세계인의 입맛을 훔치려 나서게 된 것이다 1000여 개에 이르는 가맹점, 2011년 매출 1600억 원, ‘사양 기업은 있어도 사양 산업은 없다’는 것을 아딸이 실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리=강휘호 기자>
<출처=네이버 블로그 ‘꿈을 찾아 떠나요’>
<참고자료=처음에 도전이 있었다
|작가 정완진 |출판 아라크네>
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