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외하고 투표 순위는 국민당 김 후보가 2위, 민한당 정 후보가 3위를 차지했다. 국민당 김영생(의성 출신) 후보는 상이군인이어서 나로서는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민한당 정 후보가 나와 같이 협력했더라면 나는 그를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야당이라고 해서 나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런 이유로 국민당 김 후보와 내가 협력했는데 결과는 민한당보다는 당세가 약한 국민당이 2위에 올랐다. 사실 나는 유세 기간 지역 유권자들에게 “나를 찍고 남은 표는 김영생 후보를 찍어주라”고 지원하기도 했다. 또 3·25 선거 당시 나로서는 전국적으로 민정당 후보자들을 챙기다 보니 내가 출마한 안동-의성 지역구에는 합동 유세 때만 가서 연설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당직 인사에 배제된 이재형 대표의 분노
제11대 국회는 4월 11일 개원했는데 앞서 총선 직후 나는 원 구성 과정에서 청와대 허화평 보좌관 등과 여러 자료를 갖고 서로 협의했다. 이렇게 해서 국회의장에는 정래혁, 여당 부의장에는 채문식, 이 밖에 각 분과 상임위원장을 결정했다. 당직 인선에는 이종찬 의원이 원내총무가 됐다. 당시는 국회 상임위원장을 다수당이 차지했던 때다. 그래서 법사위원장에 김숙현, 내무위 김종호(서정화 씨의 부탁), 국방위 김영선, 재무위 김용태, 농수산위 김식, 상공위 이태섭, 문공위 이흥수, 노동복지위 이찬혁 의원 등이 배정됐다. 정무장관에는 정종택 의원으로 결정하고 인선 초안을 들고 청와대로 들어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대표였던 이재형 의원(민정당 전국구 1번)을 건너뛰고 대통령 결재를 받은 것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렀다. 당시 내 생각은 이재형 대표에게 일일이 결재를 받다 보면 선임 원칙이 다 헝클어질 것 같아서 먼저 대통령 결재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로 커지고 말았다. 또 본의 아니게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노태우 장군과 유학성 중앙정보부장이 인사 내용을 알려 달라고 하기에 먼저 노 사령관에게 이렇게 저렇게 인사들의 선임 배경을 알려준 것이 주영복 국방부 장관을 거쳐 국방부 출입기자들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이런 경로로 이 대표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공개적으로 보도됐다.
이 대표는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각하! 모든 당의 운영을 당헌 당규대로 하도록 해주십시오. 이 약속을 해주십시오”라며 “지난 인선 문제에 대해 저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했다. 이에 전 대통령은 “그러겠다”고 약속해 이 사건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나로서는 이 대표의 분노를 수습하기 위해 인사 안을 다시 복수로 만들어서 이 대표의 결재를 받아 다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오는 시늉을 하려고 차에 올라 북악산 한 바퀴를 돌고 당으로 돌아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 후 4월 11일 제11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이 대표는 장출혈로 청량리에 있는 성바오로병원에 입원했다. 그래서 내가 병원으로 찾아가 “대표님 국회 개원식은 저희들이 잘 치르도록 하겠으니 병원에서 치료하면서 계시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 말을 듣고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소리냐. 개원식에 참석하겠다”며 팔에 꽂혀 있는 링거 바늘을 빼내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 보면 이 대표(아호 운경 雲耕)는 민정당 창당 정치인 중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참여한 분이다. 전주 이씨 왕손이기도 한 그분은 일찍이 30대에 제헌 국회의원과 상공부 장관을 지낸 거물 정치인이다. 이 대표는 당시 연로한 나이에도 전통적인 기풍과 권위의식이 대단했다.
민정당과 세칭 1중대·2중대·3중대 야당들
다수 의석을 가진 민정당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제11대 국회는 통상 1중대, 2중대, 3중대라는 말이 흔하게 나돌았다. 민정당은 원내 제적 176석 중 92석의 전국구에서 제1당이 3분의 2를 차지했기 때문에 반수인 138석에서 13석을 웃도는 151석을 차지했다. 이어 민한당이 81석(지역 57석. 전국구 24석), 국민당이 25석(지역 18석. 전국구 7석), 그 다음으로 민권당-신정당-민주사회당이 각각 2석, 민주농민당과 안민당 각 1석, 무소속 11석 순이었다.
원내 의석을 12개 상임 분과위원회별로 배치하면 여당이 1~2명 많은 분포였다. 당시 12개 분과위원장은 다수당이 독점했다. 야당으로 민한당(대표 유치송)과 국민당(김종철), 민권당(김의택)이 있어서 국회 내에서는 오늘의 야당 못지않게 역할과 몫을 다했다. 다만 제1야당의 경우 당직을 선임하는 데는 어느 정도 여당과 협의가 오갔다. 민한당 사무총장으로 신상우 의원을 선임하는데 당시 유학성 중정부장과 대략 이런 사람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정도의 얘기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로서는 안동 출신 김노식 의원을 신상우 사무총장과 잘 알고 있던 처지에서 간접적으로 추천한 적은 있지만 야당에 직접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은 아니었다.
당시 민한당 인사들은 대부분 기존의 야당에 몸담았던 인사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고재청-한영수 의원은 앞서 민정당에 영입하려고 했었지만 본인 스스로 여당으로 가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극구 사양해 야당에 남았다.
그들은 야당에 있으면서 건전한 민주정치에 기여하는 것이 좋겠다며 민한당으로 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권흠-오세웅 씨 등은 스스로 여당을 하겠다고 해서 민정당에 참여했다. 이처럼 주로 11대 국회 이전부터 야당 사람들이 민한당으로 간 것이지 의도적으로 2중대 야당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민권당도 과거 야당에 있었던 사람들이 김의택 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국민당의 경우는 여당에 참여하겠다고 희망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김종철 씨(한화그룹 김종희 회장의 형)를 대표로 삼아 후에 당대표가 된 이만섭 씨와 이종성 씨(충남방적 경영자) 등이 참여해 세력이 있는 인사들이 또 다른 야당을 창당해 총선에 나와 제3당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세간에서 불리던 2중대, 3중대 당(黨)이라는 비아냥거림과 달리 각자 나름대로 정치적인 신념을 갖고 정당을 조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정국운영상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야당 창당 과정에서 전혀 관여를 안했다고는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박정수 씨도 여당을 희망했으나 무속이 됐다.
이렇게 구성된 5공 초기 정당구도에서 여야는 국회에서 각종 의안을 둘러싸고 대립과 타협을 병행하면서 풀어나갔다. 민정당이 원내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야당들이 공조해서 상임위에서 1표 차로 법안 처리가 부결될 때도 있을 정도로 여야 간 대립 속에 표결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제11대 총선을 앞장서 총괄하고 국회 개원을 앞두고 사실상 상임위원장과 당직 인선안을 만들었다.
최근에도 호남과 충청 지방에 내려가서 여러 차례 공식 또는 사적인 행사에 참석하면 그 지방의 면장이나 동장 또는 지방 공무원을 지낸 사람들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만나 대화할 때가 있다. 그러면 1980년대 민정당 조직 지도장(당시 면 조직 책임자)이나 활동장(동-리 조직 책임자)을 했던 사람들과 그 당시의 얘기를 나누는 일이 종종 있다.
나는 그분들을 일일이 잘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1980년대 민정당 시절을 되새길 때마다 항상 감회가 새롭다.
내가 자유총연맹 총재로 있을 때도 지방에 가보면 1980년대 민정당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민정당 조직의 경력으로 사회 활동의 기반이 됐다는 얘기를 듣다 보면 자부심이 들게 하는 만남도 여러 차례 접했다.
제11대 총선이 끝난 후 내가 당 사무총장으로서 먼저 한 일은 당원교육이었다. 당시 100만 당원을 소집해서 교육하는데 수련복과 모자를 마련해서 착용시키고 훈련을 했다. 당시 비용이 모두 30억 원이었는데 염가로 했는데도 1인당 3000원이 들어갔다. 그 비용을 당 총재인 전 대통령에게 요청해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민정당 당원교육을 철저히 했던 이유는 첫째로 북한의 조선노동당 당원과 이념대결을 하기 위해서는 강한 당원을 만들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당이 중심이 돼서 행정부에 가 있는 사람이나 국회의원도 당에서 파견된 소속 당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정권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첫 당원교육은 서울 가락동 중앙연수원에서 열렸는데 소집 합숙교육은 읍면동 책임장(조직 지도장) 이상이 참여했다. 그 밖에 일반 당원은 현지에서 역할에 맞춰 교육시켰다. 특히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사람들과는 지금도 동질감을 갖게 되는데 서로를 ‘평생동지’라고 불렀다.
당시 당원교육 프로그램은 연수원 전임교수를 비롯해 외부 강사로 대학교수, 연구소 연구원, 언론인을 초청해 이념 교육을 중심으로 다양한 내용의 교육이 이뤄졌다. 연수원장은 이상연, 정창화, 이영일 의원이 차례로 맡아서 했고 교육성과도 좋았다.
그러나 1990년 노태우 정부 들어 민정당은 통일민주당-신공화당과 3당 통합되면서 당명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바뀌었다. 이후로 민정당의 정체성은 희석됐고, 교육할 때 당원교육 때 입었던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우리나라 정당이라는 것이 아무리 이념적 동일체를 추구한다고 해도 아직까지도 정권과 같이 사라지는 행태를 거듭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