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 전통미술의 풍요로움
파격적 조형물 등한한 18-19세기
도자공예가 발전을 하게 된 획기적인 요인이 된 것 중 하나는 문방공예를 도자기로 만들고 나서부터다. 때로 단아 단정하고 때로 해학적이고 때로 파격적인 아주 흥미 있는 조형물이 많이 등장하고 18~19세기가 그 절정기이다.
문방공예 외에 조선전기 분청사기 제기와 17세기 백자제기 그리고 18세기 이후 백자제기의 발전 역시 눈부신 조형성을 보여 또한 도자공예발전에 요인이 돼 우리 백자 미술의 높은 조형역량을 보이게 됐다. 그 외에도 목공예 나전공예는 18~19세기에 한국인만이 나타낼 수 있는 간결, 단순하고 대담하고 화사한 명품이 많다. 또한 조선조 의상의 품위 있고 멋스러움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목면이 고려 말에 들어와 우리 민족의 의상과 상거래에 핵심이 됐지만 모시와 베(그 중 안동포)의 시원하고 날아갈 듯한 멋스러움과 높은 격조, 명주의 아름다움, 우리 보자기의 아름다움과 우리 자수의 아름다움 등은 조금은 알려졌지만 좀 더 깊이 연구해 세계에 홍보한다면 현대미술 발전과 세계문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미술이 우리의 조각미술, 건축미술, 회화미술, 장식미술 등에 크나큰 공헌을 해 삼국 신라의 조각과 통일신라의 석탑건축, 건축 장식, 장엄장식 발전과 불교회화와 일반회화 발전 등에도 크게 공헌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다. 국가에는 종묘사직이 세워지고 성균관이 있고 각지에 서원과 향교가 들어서고 집집마다 사당이 있었다. 충효와 조상을 숭배하고 예의 염취와 청렴결백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노력한 나라였다.

지조와 절개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도의정치와 선비문화는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을 우리에게 심어줬다. 그래서 화려한 장식을 피하고 단순 간결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데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또한 이것은 절제미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단순간결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은 우리 백자, 우리 목공예품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 일반 건축물과 정원과 선비의 방 등 선비문화와 우리 의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면도 우리 조형문화의 근간이지만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담하고 파격적인 미술이 공존한다. 이것이 우리 문화의 다양성이다.
음악에서 엄격, 장중한 정악이 있는가 하면 자유분방한 산조가 있고 가곡이 있는가 하면 판소리가 있듯이 조선전기 절제된 백자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담한 분청사기가 공존하고 불교와 유학과 무속이 공존하고 일반회화와 속화(민속화) 등이 공존하여 우리 문화가 한 곳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활기 넘치고 다양성 있게 발전하던 모습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거기서 배우고 그 순리에 따른 우리 선조들의 심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시대마다 전통 미술문화의 조형정신이 무엇인가를 깊이 인식하고 계승 발전시켜왔다. 그 바탕 위에서 외래문화를 과감히 받아들여 우리 미술 문화의 내용과 표현이 더 다양하지고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제보다 높은 수준의 우리 문화
문화는 한나라를 지키고 보위하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일제보다 낮은 문화를 지녔다면 우리는 벌써 일제문화에 동화돼 나라와 민족이 그냥 스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은 역대로 이민족이 여러 차례 다스려 왔다. 흉노족이 쳐들어왔고 오호16국이 중원을 차지하고 요나라와 굴안이 강성해 동북지방을 다스리고 금나라가 양자강 이북 전체를 통치했다. 몽골족 원나라는 중국 전체뿐 아니라 서방세계의 일부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뤘으며 청나라는 다시 중국 전체를 아우르고 거의 300년에 가까운 긴 기간 중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이들 이민족들은 한때 강력한 무력과 뛰어난 전략 전술로 중국을 침략하고 지배해 왔지만 지금 그 이민족들은 그 자취마저 스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훌륭하고 뛰어난 고급문화와 길고 긴 역사적 전통과 드높은 자부심을 지니고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한족의 문화에 동화돼 나라와 민족과 문화마저 흡수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조선 말기는 우리가 국제정세에 너무 어두워 얼빠진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국력과 국방력은 허약, 허술한데 관리와 서리는 부패하고 파쟁으로 허송세월하는 사이 서구 열강과 청나라, 일본이 우리를 두고 서로 야욕을 채우려는 와중에 일본 제국주의가 결국 우리나라를 강제로 침략 점령했다.
이후 일본의 무단정치와 문화정치는 우리를 총칼로 마구 죽이고 협박하고 마음대로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우리 문화도 말살하려고 갖은 악랄한 계책과 위협과 협박과 회유로 이미 1904년 을사늑약 이전부터 그 마수 속에 살아야 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백자제기
고려자기 의기(儀器) 가운데는 중국 은대와 주대 고동기의 형태와 문양을 약간 단순화시키면서 그 특징을 살려 본떠 만든 것이 많았다. 조선 왕조에서도 청동기로는 고동기와 흡사한 의기가 많이 사용됐다.
하지만 도자기로 만든 제기(祭器) 등 의기의 경우에는 고동기의 복잡하고 난해한 형태와 문양을 극도로 단순화해 의기로서의 품격만을 나타냈다.
백자 제기는 입 둘레 위의 네 군데를 조금씩 도드라지게 한 후 그 아래쪽 몸체에 톱니무늬(거치문)가 있는 긴 띠를 세로로 붙이고 굽도리에서 몇 군데를 삼각형으로 잘라낸 것 이외에는 제기로서의 위엄이나 엄정한 격식을 따른 것이 없다.
오히려 위와 같은 몇 가지 꾸밈이 특이한 장식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체에 물레자국을 그대로 둔 것이 톱니무늬 띠와도 어울리면서 소탈하고 대담한 공예 의장의 일면을 보여 준다.
백자 제기에는 옅은 푸른 기가 감도는 굳은 질감의 백자유가 입혀 있다. 굽바닥에 모래받침으로 구운 자국이 있다.
<글=국립중앙박물관>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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