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베네]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카페베네]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강휘호 기자
  • 입력 2013-10-28 10:14
  • 승인 2013.10.28 10:14
  • 호수 1017
  • 4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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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3년만에 600개 매장…스타 마케팅 ‘대박’

▲ 김선권 카페베네 대표 <사진=뉴시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세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우글거리는 해외 커피 프랜차이즈를 모두 제치고 국내 커피 시장에 우뚝 선 카페베네(CaffeBene)의 김선권 대표다.

김선권 카페베네 대표의 어린 시절을 장식하는 단어는 가난이다. 아홉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전남 장성의 두메산골 어디쯤에서 살았던 그에게 가난과 고생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더구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후 외롭게 고생하던 홀어머니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자라야 했다.

이에 김 대표는 꼭 돈 많이 벌어 보란 듯이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꿈을 가지고, 27살 때 새로운 인생의 도전을 위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는 취업이 아닌 창업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 경험도 돈도 없던 그였기에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빨리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월급쟁이 보다는 창업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때 돈이 될 만한 사업 아이템을 찾던 김 대표의 눈을 사로잡은 건 오락실이었다. 오락실은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고 투자 대비 수익도 쏠쏠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조건 현금 장사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김 대표는 망설임 없이 첫 사업으로 오락실을 선택했다. 이때만 해도 소규모 오락실을 운영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시장조사를 위해 오락기 중개상이 모여 있는 청계천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이었다. 체계적인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견적을 물어보면 대충 ‘99㎡(30평)에 얼마’라고 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김 대표는 이런 식으로는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선진시장인 일본으로 견학을 가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떠났던 일본의 오락실 문화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호텔 버금가는 인테리어, 가족 모두가 함께 오락을 즐기는 모습은 미처 상상해 보지도 못한 것었다. 즉 김 대표를 놀라게 한 것은 구멍가게처럼 운영되던 한국 오락실과는 달리 일본 매장은 체계적인 프랜차이즈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이은 성공 주식으로 ‘쪽박’

일본 견학을 마친 김 대표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자금을 확보하고 시장조사를 거치는 등 1년여 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1977년, 오락실 프랜차이즈 ‘화성침공’의 문을 열게 됐다.

화성침공은 일본 오락실 문화를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기존 오락실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쾌적한 분위기와 최신 시뮬레이션 게임기에 어울리는 우주공간을 콘셉트로 한 인테리어는 어린이 고객의 발길을 모았다.

그리고 김 대표의 사업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성장했다. 사업 개시 2년 만에 가맹점은 300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그 무렵 그는 한 가지 맹점을 발견했다. 오락실 프랜차이즈는 초기 매장 개설 수익 외에 추가적인 관리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고,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바로 삼겹살이었다. 김 대표는 당시 유행하던 닷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왕삼겹살 닷컴’을 브랜드명으로 정하고 2000년 요식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당시 톡톡 튀는 브랜드명은 매스컴의 많은 시선을 받고 사람들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1년 만에 가맹점 300개를 돌파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연이은 사업의 성공으로 그는 ‘사업의 귀재’라는 칭송을 받기 시작했다. 그 역시 스물아홉에 오락실 프랜차이즈를 성공시켰고 30대 초반에는 외식업 프랜차이즈마저 성공시켜 그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자만과 오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모든 꿈을 이룬 것 같았고 초심을 잃은 채 건방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성실하고 열정적이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일은 모두 직원들에게 맡겨 놓고 여유를 즐기기에 바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가 김 대표가 손을 댄 것이 주식이었다. 통상적으로 주식은 100명이 입문하면 2~3명만 성공하는 어려운 게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단 주식의 고수가 되려면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하고 또 5년 이상 경험이 쌓여야 돈을 버는 2~3명의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 대표가 주식으로 빈털터리가 되는 데는 채 일 년이 걸리지 않았다. 때마침 몰아친 구제역 파동이 결정타를 날렸던 것.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그토록 야심차게 뛰어들었던 ‘왕삼겹살 닷컴’ 프랜차이즈 사업을 접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패의 쓴잔 감자탕으로 재기하다

이때 오만과 자만 그리고 주식 때문에 실패의 쓴잔을 마신 김 대표는 실패 이유를 명확히 인지하게 됐다. 하지만 실패는 그에게 좌절보다 더 큰 열정을 가져다줬고 전국을 수개월 동안 떠돌아다니며 새 아이템을 찾기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접하게 된 허름한 감자탕 집이 그의 눈을 번뜩이게 했다. 당시 감자탕은 중장년 남성들이 소주 한잔에 곁들이는 안줏거리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으나 김 대표는 또 한 번 생각을 뒤집었다. 

중장년 남성들 위주의 허름한 감자탕 집이 아닌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중대형 감자탕 집으로 변신을 떠올렸던 것이다. 김 대표는 다음 사업 아이템으로 단박에 감자탕 프랜차이즈를 결정했고 전국을 돌며 감자탕 고수들에게 맛 배우기에 나섰다.

전국 감자탕 맛집의 장점을 고루 취해 나만의 맛을 개발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나만의 맛이 완성된 것은 200 년 2월 무렵이었다. 그리고 김 대표는 경기도 의왕에 그의 세 번째 프랜차이즈 ‘행복 추풍령 감자탕’의 문을 열었다.

당시 넓고 쾌적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갖춘 감자탕 집은 파격 그 자체였다. 또한 묵은지를 결합해 내놓은 새로운 메뉴는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결과는 이번에도 대박 행진이 이이었다.

가맹점이 100개를 넘어서자 김 대표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경영 시스템을 갖추기로 결정, 한국능률협회 컨설팅의 김재일 지도사의 코치로 조직관리 컬설팅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컨설팅을 통해 효율적인 조직과 시스템이 만들어지자 가맹점은 더욱 빠르게 늘어나 급기야 2006년 6월엔 300호 점이 문을 열었다. 이처럼 김 대표는 보란 듯이 실패를 딛고 다시 한 번 성공을 손에 쥐었다.

이후 4년 동안 줄기차게 뛰어 오던 김 대표는 잠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커피를 위주로 한 카페사업이었다.

김 대표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또 다시 본능적으로 시장조사에 들어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커피전문점은 장점이 많은 아이템이었고 이것이 카페베네의 시작이었다.

스타벅스 지워버린 토종 브랜드의 힘

특히 커피전문점은 한식당에 비해 매뉴얼이 훨씬 간단했다. 또한 셀프서비스로 종업원 숫자가 적어 인건비 부담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도 빨랐다. 더구나 커피는 국가나 인종을 초월하는 글로벌 아이템이라는 점도 그의 마음을 끌었다.

하지만 김 대표가 커피전문점을 구상할 무렵 커피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대기업과 스타벅스라는 큰 산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스타벅스의 아성에 도전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개의치 않았다. 차별화만 이룬다면 얼마든지 해볼만 하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물론 주변에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네가 아무리 프랜차이즈의 귀재라지만 스타벅스가 있는 한국에서는 안 된다니까’라고 만류했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1년의 준비 끝에 드디어 서울 천호동에 ‘카페베네 1호점’을 열었다. 상호면 ‘Caffe Bene’는 좋은 카페라는 의미의 이탈리아 말이다. 기존에 볼 수 없는 더욱 좋은 카페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그의 카페베네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오랜 준비 끝에 내놓은 것이라 김 대표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망만 하고 있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타개책을 찾느라 밤낮으로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브랜드 인지도 향상과 메뉴의 다양한 개발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 대표는 ‘왜 미국의 커피전문점에는 젤라또가 없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젤라또는 유럽식 아이스크림으로 유럽카페에서는 기본적인 메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카페에서는 젤라또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를 착안한 김 대표는 젤라또를 차별화된 메뉴 전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커피와 젤라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와플도 다양하게 갖췄다. 그러자 카페베네 메뉴의 종류는 95가지를 넘었고 국내 커피 전문점 중 가장 다양한 메뉴판을 가지게 됐다.

이 ‘메뉴의 다양화’ 전략의 고객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 고객들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했지만 기존 커피전문점의 간략한 메뉴와 인테리어로는 이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아쉬움이 충족된 것이었다.

또 가족 단위의 고객이 부쩍 늘었다. 20~30대 고객들이 주를 이루던 매장에 엄마는 커피를, 아이는 젤라또를 먹으며 여유로운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풍경이 자연스러워 진 것이다. 이때까지 그 누구도 아이들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변화를 이뤄낸 셈이었다. 

이어 성공가도를 위해 김 대표는 스타 마케팅을 머리에 떠올렸다. 지금은 스타를 활용한 마케팅이 자연스럽지만 당시 커피전문점의 스타 마케팅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급스러움을 대표하는 커피와 연예인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인 믿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김 대표는 광고모델로 탤런트 한예슬을 과감히 선택했다. 밝고 예쁜 이미지의 한예슬의 TV 광고가 나가기 시작하자 카페베네는 ‘한예슬 커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예슬 효과가 나타나자 김선권 대표는 TV 광고 외에도 연예인이 참석하는 각종 자선 바자회나 이벤트 행사를 열어 붐을 이어가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 밖에도 김 대표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매장을 제공해 브랜드를 알리는 제품 간접광고(PPL)를 시도했다. 그가 처음으로 매장을 제공한 드라마는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었고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후부터 처음 목표를 했던 40~50대 고객은 물론, 10대 고객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가져 온 것이었다.

결국 스타 마케팅의 힘으로 카페베네 가맹점 수는 급격하게 늘어 2010년 400개를 넘어서며 자리를 잡아가자 김 대표는 커피 맛을 고급화하기 위해 국내에 로스팅 공장을 갖추고 브라질 농장과 계약을 체결해 우수한 원두까지 확보했다. 이런 일들은 전부 국내 커피전문점으로는 최초가 되는 일이었다.

카페베네는 오픈 3년 만에 전국 600개 매장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자 거대하게만 보이던 해외 브랜드들도 카페베네의 급성장에 뒷걸음질을 쳤다. 게다가 1000억 원이 넘는 본사 매출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성과라는 평이 이어졌다.

사업 초기부터 전력을 다해 차별화를 시도하던 김선권 대표의 노력 결산물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리고 카페베네는 스타벅스의 본고장인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 진출했다. 타임스퀘어 주변 상권 내 스타벅스를 제외한 브랜드 커피전문점은 단 한 곳도 없었지만 그 일을 카페베네가 이룬 것이다.

또 이는 김 대표가 토종 커피전문점을 들고 거대한 산에 도전하기 시작한 첫 발이었다. 직원 650명, 전국 11개 사업장, 26개의 직영점과 698개의 가맹점을 가진 카페베네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정리=강휘호 기자>
<출처=네이버 블로그 ‘꿈을 찾아 떠나요’>
<참고자료=처음에 도전이 있었다
|작가 정완진 |출판 아라크네>
 

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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