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강휘호 기자] 재계의 판도가 프로야구 그라운드에 그대로 옮겨진 것일까. 올해 프로야구는 모기업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거울로 작용하는 모양새로 구단의 성적표가 마치 모기업의 분위기와 평행이론을 보이는 듯하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점을 그룹 회장들도 눈치챘는지 갈수록 응원전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다. 또 과거 재벌그룹들의 이미지 제고 수단으로만 거론됐던 프로야구가 이제는 경제 시장 속에 중요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의견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요서울]이 이를 짚어봤다.
오너 일가 응원전 볼거리, VIP석 ‘NO’ 일반석 ‘OK’
기업 이미지 제고…구단마다 스며들어 있는 기업문화
지난 1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졌던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의 2013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 두산 측의 응원석이었던 3루 쪽 관중석엔 남색과 흰색이 멋스럽게 어우러진 두산 야구 점퍼를 입은 중년의 신사가 있었다. 게다가 이 신사는 ‘최강 두산’이라고 적혀 있는 노란색 머리띠까지 하고 있어 자신이 두산의 광팬임을 명백하게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숨어 있는 반전 첫 번째,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직장인 야구팬으로만 보이던 이 중년의 신사는 누구나 아는 재벌 총수인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날 모든 경영일정을 마무리한 뒤 곧장 잠실야구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진 박 회장은 자신이 그룹 수장에 오른 후 두산베어스가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자 응원을 위해 야구장을 찾은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엔 자신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 트위터에 “출발은 좋고, 잠실은 겨울”이라는 글과 “(최)준석아! 그 무게에 어떻게 그렇게 뛰었냐”는 글로 야구 사랑을 내보였다. 또 이날 박 회장과 함께 동석한 아들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는 지난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부터 올 포스트시즌 6경기를 모두 현장에서 관전하는 열성을 보이며 두산 오너일가의 야구 사랑에 대한 증명을 이어갔다.
두 번째 반전은 두산의 오너들만 유별나게 야구장에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프로야구가 본격적인 포스트시즌으로 접어들면서 또 다른 가을야구 구단의 모기업 LG와 삼성의 수장들도 야구장을 찾을 채비에 분주하다는 전언이다.
특히 올해는 두산의 서울 라이벌인 LG가 11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냄에 따라 재계의 소문난 야구광인 LG 오너일가도 직접 경기장을 찾아 열띤 장외 응원전을 펼칠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LG 오너일가 중에서도 재계 대표 야구광인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경기 일정에 경영일정을 맞추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구 회장 외에 LG 총수 가족들도 대거 야구장을 찾을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구 회장은 LG트윈스 구단주 시절 모친의 생가인 남 진주 단목리에서 매년 선수단 모임을 열 정도로 야구에 강한 열의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이자 현재 구단주인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학창시절 야구선수로도 활동했던 만큼 플레이오프 기간에 누구보다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3년 연속 정규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삼성라이온즈를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을 것이란 예상은 벌써부터 삼성 직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에도 잠실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 삼성과 SK의 경기를 권오현 부회장, 이인용 사장과 함께 관람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베이스볼…재계 미니게임
삼성·LG·두산,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성적표
이렇듯 경영 일정만으로 눈코 뜰 새 없어 보이는 재벌 총수들이 야구장을 찾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물론 단순하게 ‘야구가 좋아서’라는 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야구 구단의 모습은 각 기업 특유의 기업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관심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많다.
일부에선 야구판에서 보이는 각축전이 재계의 판도와도 쏙 빼닮은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추측, 그들의 성적표가 각 기업의 성적표와도 맞물리기 때문이라는 주장, 기업인들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야구만한 매개가 없다는 말들도 나오곤 한다.
우선 프로야구 사상 첫 정규리그 3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한 삼성라이온즈의 모습은 모그룹 삼성과 매우 닮아 있다. 언제나 1등 주의, 삼성이라면 1위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그것이다. 또 시즌 중의 모습도 그룹과 구단이 일치하는 구석이 많이 나타난다.
삼성은 올해 자사의 에이스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10조 원을 돌파하면서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워 놀라움을 안긴 바 있다. 이어지는 4분기에도 반도체부문을 중심으로 실적 개선이 예상된다는 전문가가 많아 주가 방향도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실적개선은 육성분야 투자로 직결돼 관련 부품업체와 장비업체들에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반도체 라이벌 SK하이닉스의 중국공장 화재로 인한 반사이익과 신제품 출시를 통한 이익 개선 등도 높은 실적의 근거로 꼽히고 있다.
이에 비춰 삼성라이온즈를 살펴보면 앞서 말했듯이 사상 초유의 리그 3연패를 이뤄냈다. 이는 삼성전자가 10조 원 돌파를 지속하기 힘들 것이라는 재계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고 고공행진을 달린 것처럼 올해는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고 예상한 야구 전문가들의 예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이다. 그리고 매년 삼성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곤 했던 SK와이번스의 몰락과 SK하이닉스의 중국공장 화재는 우연의 일치임에도 놀라움을 자아낸다.
올 시즌 2위를 차지한 LG트윈스 속에서도 모기업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한 해였다. LG트윈스는 재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삼성의 라이벌이 됐다. 1위를 넘보고 무조건 1위를 달성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올해 최고조를 찍었다.
지난해까지 LG트윈스의 모습은 삼성과 전자업계에서 오랜 맞수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조차 무색했다. 매년 초반엔 순위가 오르며 부활을 알리는 듯했지만 중반기를 지나면서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삼성의 뒷모습은 멀기만 했다.
이는 스마트폰 시장이 열린 이후 침체기에 빠진 LG전자의 분위기와도 흡사하긴 마찬가지. LG전자는 과거 그룹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실적 측면에서는 삼성전자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구단과 모기업 모두 희망만 보일 뿐, 잡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올해만큼은 재계와 야구, 양쪽 모두에서 달랐다. 야구에선 두말할 것도 없이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고 포스트시즌에서 한국시리즈를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LG그룹은 올 상반기 M&A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면서 활발한 사업조정을 보였다. 비주력이나 한계사업을 부지런히 정리해 계열사 증가를 최소화하는 가운데서도 스마트TV의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고자 HP사의 웹OS를 사들이는 등 다채로운 움직임을 드러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LG그룹은 상장사 영업이익이 2조2288억 원으로 26.6% 증가해 10대그룹 중 가장 높은 영업이익 증가폭을 자랑했다. 주력 계열사인 LG전자와 LG화학에선 영업이익이 하락했지만 그 외의 계열사들 실적은 호조를 보였다. LG유플러스 영업이익이 316.3% 급증한 가운데 LG이노텍, LG하우시스 역시 2배 넘는 성장률을 보였다. 가히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을 위협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올해 두산은 어땠을까. 두산베어스는 모그룹 총수 박 회장의 평소 모습처럼 팬들과의 소통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두산베어스는 올해 내내 ‘퀸스데이’ ‘직장인의 날’ 등 고객 맞춤형 마케팅을 통해 관중을 끌어 모았다. 두산의 팬 서비스로는 시즌 중에 마련되는 베어스 클럽 회원들을 위한 ‘베어스데이’ 행사와 시즌이 끝나면 여는 선수와 팬의 만남 행사인 ‘곰들의 모임’이 유명하다. 선수와 코치진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끈끈한 화수분 야구는 마치 박 회장이 평소 젊은 직원들과도 여러 방면으로 소통하는 것과 일치했다.
성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두산에 포스트시즌이란 매년 참여하는 잔치였지만 매번 넘지 못하는 벽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번 시즌엔 준플레이오프를 무사통과하면서 성적으로 인정받는 한 해가 됐다. 이 과정에서도 그룹과 구단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었는데 먼저 그룹을 보면 당초 두산건설 유동성 리스크가 두산을 흔들었다.
그러나 두산중공업은 총 1조 원의 자금을 수혈키로 했다고 밝히면서 그간 두산그룹의 디스카운트 요소로 작용했던 두산건설에 대한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이에 지주회사인 두산의 경우 자체 사업부의 실적 개선이 지속되고 있어 앞으로 두산이 본연의 실적 자체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졌고, 다소 주춤했던 전자사업부의 실적 성장 추이에 따라 향후 주가 회복세가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짙었다.
이와 비슷하게 올해 두산베어스는 주포였던 김동주의 부상과 부진이라는 리스크를 떠안았지만 돌아온 주장 홍성흔이라는 카드로 약점을 메웠다. 또 계속해서 팬들은 두산의 성적에 대해 의구심을 보냈지만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성적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냈다는 점이 그룹과 공통적으로 눈에 띄었다. 또 한때 두산과 두산베어스의 발목을 잡았던 타격의 호재는 실적 성장 추이 그래프와 동반 상승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 세 그룹의 재계 및 야구장 모습은 유난히도 일치하는 한 해를 보냈다. 또 각 구단은 “모기업의 정신을 아주 명확하게 나타냈다”거나 “그룹 총수의 이미지 상승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는 평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파급력 어디까지 ‘상상초월’
야구판 단순 스포츠 넘어 경제 시장까지 움직인다
아울러 앞서 예로 들었던 삼성과 LG, 두산을 비롯해 한국 프로야구는 관련 산업에도 활기를 불어넣을뿐더러 경제 요모조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많아지는 추세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프로야구는 지난 6년간 연속 500만 관중을 돌파했을 만큼 거대한 시장이다. 그리고 이를 경제 효과로 환산했을 때 1조 원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구단별로 살펴봐도 1000억 원을 웃도는 숫자들이 경제효과로 나타난다. 단순한 스포츠로 치부하기엔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로 성장한 것이다.
또 프로야구 산업에 영향을 주고 그 파급효과와 연관된 산업을 분류하면 무려 15개 산업에 이른다. 섬유 및 가죽, 출판 및 인쇄, 음식업 및 숙박, 통신업, 미디어 기타 서비스업 등 야구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산업은 없다고 해도 반박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경제 효과들이 점점 분석되다 보니 주변 지역경제까지 함께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부각된다. 더불어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야구를 콘텐츠로 한 온라인·모바일 게임의 성장, 광고업계의 성장 등은 프로야구가 하나의 체계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이쯤 되자 국내프로야구가 일각에서 “스포츠인데 너무 기업 중심의 문화가 아니냐”는 비판을 듣는 것은 당연하게도 느껴진다. 산업 경제와 프로야구는 어느덧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다.
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