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낳은 알, 민정당 국회의원들

5공 헌법 연좌제를 금지했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헌법상 박충훈 총리서리가 불과 10일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행사했다. 그달 21일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고 일주일 뒤인 27일 유신헌법 아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제로 선출해온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공화당의 박영수 사무총장(뒤에 서울시장 지냄)이 선거절차를 밟아 사실상 권력의 실세인 전 사령관을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당시 한영수 전 의원이 출마한다고 했다가 결국 전 사령관이 단일후보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다.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유신헌법 개헌과 신당 창당 작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전 대통령은 그 이듬해 1982년 2월 25일 이른바 ‘5공 헌법’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9호에 의한 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또 당선됐다. 당시 전 대통령이 민정당 후보로 나오고 유치송 민한당 후보, 김종철 국민당 후보, 김의택 민권당 후보와 경선을 벌였지만 전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당선돼 제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사실 제5공화국 출범에 앞서 개헌 작업 과정에서 대통령을 직선제로 6년 단임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과도기에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택했다. 직선제로 했을 경우 당락의 위험성도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사태 처리에 대한 부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 전에 선거인단을 먼저 뽑았는데 재벌 회장이나 유명인사, 지방의 유지들이 후보로 나와 당선돼 대선 투표권을 행사했다. 뒤에 그 당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선택하지 못했던 것이 불찰이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유신헌법 폐기
5공 헌법 개헌

대통령이 1년 만에 11대에서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신군부는 앞으로 정권을 새로 창출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개정하는 데 모든 신경을 몰두했다. 그래서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보안사에서는 이종남, 이건개, 정경식 씨 등 법률가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외부 인사로는 문홍주, 박일경, 권중돈 씨 등 헌법학자들이 대표적으로 개헌작업을 주도했다. 국보위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보안사에서 일하던 유병규, 박철언 씨가 개헌특위에 오가며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나로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의 뜻을 두 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개헌특위의 진행사항을 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개헌작업이 다 마무리되어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해 준비하던 시점에 전 사령관이 개헌특위 위원들을 고급 음식점에 초청해 위로의 만찬을 열었다. 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여기서 문홍주-박일경 씨는 “지금은 헌법을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하지만 뒤에 가서는 이런 헌법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된다”며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문-박 두 사람은 과거 3공 헌법 개정에도 참여한 법학자로서 유신헌법으로 재정할 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5공화국 헌법(헌법 제9호)이 잘 만들어졌다는 자부심을 갖는 듯했다.
사실 5공 헌법은 절대 권력을 뒷받했던 유신헌법을 민주적으로 환원하면서 권력구조뿐만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도 새로운 조항을 마련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아닌 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제와 상대적으로 대통령 권한을 조정해 국회 기능을 강화했고, 국민 기본권의 상징적 조항이라고 할 수 있는 행복추구권 및 연좌제를 금지하는 조항도 5공 헌법에서 시작됐다.
개헌절차는 유신헌법이 개정한 절차를 따라갔기 때문에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은 1980년 10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부쳐져 전부 개정, 확정됐다.
5공 헌법 부칙에 따라 그 이튿날인 10월 28일부터 국회는 해산되고 이듬해 1981년 4월 새 국회 개원 전에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구성돼 과도기 입법(국회) 기능을 대행했다. 입법회의 의장에는 이호 씨 (적십자사 총재)가, 부의장에는 정래혁 씨(공화당 의원)가, 채문식 씨(신민당 의원)가 맡았다. 후에 정-채 두 부의장은 11대 국회에서 차례대로 국회의장을 지냈다. 입법의원은 각계 인사 81명으로 구성됐고, 국보위 위원들도 참여했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입법회의에서는 5공화국 정권 수립에 필요한 법안 등 많은 안건을 통과시켰다. 새 헌법에 의한 새 공화국 출범을 위해 제한된 정치활동이 재개돼 민주정의당을 비롯한 각 정당이 속속 창당됐다.
봉황이 알 품은 풍수
따라 민정당 사옥 마련

5공 헌법 개헌작업과 동시에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창당 작업이 신군부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보안사에서 이를 주도했기 때문에 나는 보안사 정보처장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지고 창당준비를 해 나갔다. 사실 민주정의당 창당준비 작업은 개헌 이전부터 전 사령관의 지시로 이종찬, 윤석순, 이상연, 이상재 씨 등 안기부 요원들과 사전 실무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창당에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 자문하고 적임자를 영입하기도 했다.
이때 구(舊) 정치인 중에서 최초로 영입된 사람이 공화당의 최영철 씨, 신민당의 박권흠, 오세응 씨 등으로 기억된다. 1980년 11월 말경에 15인 발기주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발기인 대표는 유석현 씨(독립운동가)였고, 입법회의에서 윤길중(재야 정치인), 권정달, 이종찬, 정계에서 박권흠, 최영철, 군부에서 이범준 장군, 학계에서 이용희, 재계에서 정수창(대한상공회의 회장), 문화계에서 김춘수(시인), 송지영(문예진흥원장), 노동계에서 이찬혁, 이헌기, 언론계에서 박경석(동아일보), 여성계에서는 김현자 씨(이화여대) 등 각계 인사를 두루 참여시켰다. 15인 발기인 중에서도 나와 이종찬 씨가 신군부 대표로 참여해 사실상 창당 준비작업을 주도했다.
당시 언론에 발표된 창당 발기 취지문을 보면 『우리들 발기인 일동은 오늘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정당을 발기하기로 뜻을 모았다. 새 역사 새 질서를 창조해 갈 새로운 민족주도세력의 출현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 요청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 복지,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겨레의 염원인 조국통일의 꿈을 기필코 이루어 나가려는 새 시대의 국가지표를 달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당을 발족시키기로 했다. 우리는 국가관이 투철하고 개혁의지와 신념을 지닌 참신한 인사,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유능한 인사, 폐습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깨끗한 인사들을 널리 모아 새로운 정치주도세력을 형성할 것이며 지난날의 정파에 구애됨이 없이 범국민적 정당을 지향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직하고 성실한 새 시대의 정당으로서 국민과 호흡을 같이하며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정당을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한다. 국민 여러분의 동참과 성원을 호소한다.(1980년 11월 28일)』
본격적인 창당을 위해 시도별 조직책 영입에 나섰는데 전남에 정래혁, 전북 황인성, 충남 정석모, 충북 이해원, 강원 이범준, 경기 김영선, 경북 김용태 씨 등이다. 12월 총 300여 명으로 창당주비발기인대회를 서울고등학교 강당에서 열고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직책과 실무부서를 구성하여 종로구 관훈동에 새 당사를 마련했다. 또 이들과 함께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그 이듬해 1월 15일 잠실체육관에서 대대적인 창당전당대회를 열어 지도부를 구성한 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그때 당사 매입과 관련된 에피소드로 관훈동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는 풍수지리설이 있어서 당사를 국회 쪽인 여의도에서 찾지 않고 그 지역의 건물을 물색했다. 당시 민주당사도 관훈동에 있었다. 그래서 관훈동 ‘정일학원’이라는 건물을 당사 자리로 선정하고 건물주인 이모 회장을 만나 매입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씨가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 시절 정일학원은 대한재보험공사에 임대 중인 상태였다. 이씨는 그 건물을 사용하려면 재보험공사 사장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만난 공사 사장은 다름 아닌 공군 대령 출신의 김기환 씨였다. 공군조종사로 납북돼 송환되기도 했던 김씨는 신사적이고 똑똑한 사람으로 지금 성 김 주한 미국대사의 부친이었다. 내가 민정당사 사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니까 흔쾌히 건물 임차료 15억 원만 주면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렇게 당비로 15억 원을 모으고, 당 재정위원으로 활동하던 삼립식품 창업주인 허창선 씨가 당사 사옥 매입비용으로 11억 5000만 원을 내놓아 정일학원 이모 회장으로부터 인수했다.
5·16 군사혁명과
공화당이 창당 작업 롤모델
민정당은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민주와 정의를 상징해 당명을 정하고 당 마크가 보여주듯 4방의 원을 민족, 민주, 정의, 복지의 상징과 함께 중앙에 통일의 의미를 부여하는 5대 지표를 설정했다.
당시 민정당이 지향하는 목표는 ‘정의사회 구현’으로 설정하고 뒤에 ‘선진조국 창조’와 함께 정부 홍보의 구호로도 삼았다. 창당 과정에서 당의 이념이 담긴 강령을 만드는 데에는 학계의 노재봉 교수와 김학준, 김영작 교수 등이 참여했다. 학계 전문가들은 학술적으로 여러 가지 나열된 강령 문안을 작성해 왔는데 시간이 촉박해 내가 그 자리에서 ‘정강정책 1,2,3…’으로 불러주면서 급히 만들었던 생각이 난다.
당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이 추대되고 창당발기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형 씨가 당 대표위원이 되고 조직분과위원장을 맡았던 내가 사무총장, 창당작업을 같이 했던 이종찬 씨가 원내총무, 정책의장은 이진우 씨, 중앙위 위원장에는 왕상은, 정무장관으로 정종택 씨가 당 6역을 맡게 됐다. 대변인에는 봉두완 씨(동양방송 아나운서 출신)가 선임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정당 창당 과정은 5·16 군사혁명 이후 공화당 창당과정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실 나는 민정당 사전 창당 준비를 하면서 공화당 창당 과정을 참조하기도 했다. 민정당 창당에 이어 당시 정계 인사 상당수는 정치활동 금지로 묶여 있는 가운데에서도 유치송 씨를 중심으로 민주한국당이 이어 창당하고 김종철 씨를 대표로 국민당이 나왔다. 또 김의택 씨를 대표로 민권당, 고정훈 씨의 혁신계 인사들의 민주사회당이 창당돼 5개 정당이 제11대 국회 총선에 뛰어들었다.
그 시절 야당의 창당에는 신군부와 안기부의 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정부 여당인 민정당 외의 정당을 두고 2중대, 3중대라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이런 표현은 지금까지도 정부와 여당에 동조하는 야당의 태도를 비판할 때 종종 쓰이고 있다.
민정당을 창당하면서 이미지가 좋은 야권 인사들을 영입하려고 했는데 자신의 정치 이미지에 맞지 않고 자신이 야권에 있는 게 정국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입당을 사양하고 야당을 선호하기도 했다. 고재청 씨 등이 그런 인사였다. 당시 야당으로 나온 정치인들은 비교적 온건한 인물로 민한당의 유치송 대표와 신상우 사무총장, 국민당의 김종철, 이만섭, 민권당 김의택 대표 역시 그랬다.
민정당이 인물을 영입하는데 과거의 여야를 불문하고 좋은 인사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과거 여당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민정당에 영입되고 야당을 한 사람들은 대개 민한당과 국민당으로 입당했다. 이 외에 새롭게 출발하는 정치를 시작하는 인사들이 민권당으로 들어갔다. 제11대 총선이 1981년 3월 25일 실시됐는데 민정당이 반수를 넘은 여당이 됐다. 민한당, 국민당, 민권당 순으로 의석을 차지했다. 나는 1980년 혼란기에 5공 헌법과 민정당 창당 작업을 마치고 1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본격적으로 민정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의정활동에 나섰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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