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조선조 도자공예 우리 민족의 위대한 조형성 지녀”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조선조 도자공예 우리 민족의 위대한 조형성 지녀”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3-10-14 10:43
  • 승인 2013.10.14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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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교문화와 건축문화
 
공예문화 아름다움 
드높인 고려
 
고려문화는 이 외에도 자아의 발견, 자신의 뿌리의 탐색으로 국조 단군숭모사상의 발현, 불교와 고유 신앙체계의 화합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공존 등이 기층문화와 귀족문화의 화합과 외래문화를 과감히 받아들여 고려공예문화의 독창적 아름다움을 드높이는 데 공헌했다고 생각된다. 너무나도 크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전통문화의 발전을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는 많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가 될 역사적인 문헌이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조의 성립은 역성혁명이라고 하지만 신왕조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왕 씨를 중심한 고려의 지배계층이 궤멸당하고 거기에 따른 그 하부구조도 제대로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불교 중심국가에서 유교의 성리학 중심 국가로 그 정신세계가 바뀌어 가고 있었고 그에 통치이념과 교육산업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으니 단순한 역성혁명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문화의 시대에는 불국토의 이상을 생각하고 내세를 염두에 두고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치를 둔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불력에 의해서 외세의 침략을 우선 정신무장으로 이겨보자는 의도로 여러 차례의 대장경 경판제작인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제작 인쇄 등 인쇄술의 발달은 문화발달 전파의 큰 핵심이며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또한 차 문화의 큰 발달과 대성황, 아름다운 주심포 중심 건축문화의 큰 발달과 불교적 저력이 스며 있는 청자문화의 큰 발전, 나전칠기 등 칠기의 발달, 섬세한 금속공예의 발달에 따른 크고 작은 무수한 범종과 반자, 운판 같은 청동기 기명 등의 발달도 고려의 귀족문화, 불교문화와 관련이 깊고, 고려의 장례문화인 화장제도와 작은 석관묘지 장식의 발달도 물론 불교문화와 관련이 깊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러한 고려적 불교문화의 성황은 어찌되었는가. 건축문화와 인쇄문화는 계승 발전됐지만 그렇게 성행하던 사찰문화가 수그러들어 사찰과 탑파의 건립과 범종 반자 등 불교 공예품 등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불교와 연관이 깊은 차 문화의 급격한 쇠퇴와 유려한 형태와 비색과 상감으로 세계 도자사에서 우뚝 서 있던 청자는 분청사기로 탈바꿈하고 복채를 곁들여 화사했던 나전칠기의 쇠퇴, 섬세한 금속공예의 쇠퇴와 화장제도가 거의 없어지고 따라서 작은 석관 매장도 석관지석도 없어지게 됐다. 
 
이것은 조형문화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만 짚어본 것이므로 큰 틀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계승 발전된 것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쇠퇴하고 새롭게 탈바꿈하게 됐다.
 
한국적 조형 발전 
거듭한 조선
 
조선시대의 조형문화는 한국적인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나라의 특징이 두드러지지만 조선조의 조형 문화는 현대 조형문화보다 영원히 한 발 앞서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중시하면서 활달, 대범하고 해학적이고 익살스럽고 단순, 간결한 우리 민족만이 나타낼 수 있는 위대한 조형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조 미술은 고려조보다 매우 다양해지고 대상 속으로 훨씬 깊숙이 널리 확산돼 조형 미술에 참여하는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보다 한국적인 특징과 독창성을 발휘하게 됐고 생각한다.
 
불교문화도 점차 토착신앙과 결합돼 고려시대의 정밀하고 유려한 불화와는 전혀 다른 흥미 있는 조형물과 대범하게 그린 불화가 제작됐다. 명산대천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마다 무속신앙이 깊숙이 자리 잡아 가지각색의 신물 조형물과 당집이 만들어지고 무속인집에 형형색색의 의상과 조형물과 무속화가 제작된다.  
일반 회화도 소위 동양화라고 불리지 않을 수 있는 한국화의 기초가 되는 지도와 각지의 방관도, 산수유람도 등이 실경에 가깝게 제작되다가 17세기 말경부터 18세기에 걸쳐 겸재와 단원, 혜원 같은 한국화의 천재 화가가 등장해 조선조 회화(한국화)에 큰 빛을 발휘하게 됐다.
 
전문 화가와 문인화의 작품이외에 경향 각지에서 무명화가의 활동이 활발해져서 18세기부터 뛰어난 속화(민속화, 민화)가 대량 생산돼 그 중에는 어떤 면에서 일반 회화의 명화와 견줄 수 있는 일반 회화와 전혀 다른 표현의 수작이 상당량에 달해 조선조인의 꿈과 낭만과 해학을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회화 언어로 솔직 대담하게 표현했다.
 
뛰어난 기량으로 대담한 구도, 과감한 변형, 생략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작가의 상상과 뜻을 자유분방하게 표출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뛰어난 속화가 제대로 평가돼 큰 전시가 이루어지고 세계에 진출한다면 일본의 우키요에보다는 훨씬 높은 호응과 평가를 받게 되리라 확신한다. 그런데도 아직도 정말 뛰어난 속화를 수집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드물고 제대로 된 전시 한 번 없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조선예술은 고려보다 더 다양해지고 깊숙하고 넓게 대상 속으로 확산돼 불교 미술과 회화 외에도 독특한 한국적 조형의 발전을 거듭한다. 조선전기 분청사기의 활달, 대담하고 익살스러운 조형 등이 눈부시게 발전하며 전개되고 있었고 조선 전·중·후기에 큰 발전을 이룬 백자는 시대마다 장식문양보다는 형태의 조형성에 치중해 백색과 형태만으로 아름답고 잘 생긴 백자를 만들어 냈으며 따라서 우리 조선조의 도자공예는 중국과 차별화되는 한국인만이 나타낼 수 있는 독창적 예술로 세계적으로도 특출한 것이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온 뒤 습기를 머금은 인왕산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평생의 벗이었던 이병연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그의 집을 방문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인왕제색도>는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1984년 국보 제21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삼성문화재단 리움에서 소장 중이다.   
 
한편 겸재는 우리 산하를 사랑해 전국 명승고적을 두루 다니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사생하고 화폭에 담아 진경산수를 완성한 대가다. 진경산수란 관념적 풍경이 아닌 실제 풍경을 화폭에 담는 화풍이다. 한국 산수의 실경에서 아름다움과 드높은 기를 느낀 겸재의 필치와 구도는 활달하고 대담하다. 겸재가 조선시대 한국화를 완성했다는 평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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