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동양그룹의 유동성 위기에서 불거진 계열사 법정관리 사태가 채권 불완전판매와 사기 발행 논란으로 번지며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동양증권 고객들이 앞다퉈 빼낸 종합자산관리계좌(CMA)의 돈은 대략 어느 정도 규모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 세부적으로는 저마다 어떤 금융사로 움직였는지와 그 이동 경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CMA 명가(名家)였던 동양증권과 타 증권사들의 희비가 갈리는 순간이다.

자금 몰린 한투ㆍ우투證…표정관리 들어가
상도의 어긋난 메리츠證…편법 영업 지적도
원래 동양증권은 초기 CMA 판도에서 정상을 차지한 후 줄곧 1위를 달려왔던 금융사다. 그러나 동양그룹 사태가 터지면서 주력으로 계열사 채권을 팔아온 동양증권은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됐다.
게다가 고객들의 CMA에 들어있는 여윳돈을 상대로 채권매입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불완전판매 논란이 불붙듯 번지며 신뢰도 역시 추락했다. 또 그룹이 위험한 상황이니 동양증권에 넣은 돈 역시 불안하다는 인식이 번지면서 고객들의 인출은 급격히 늘어만 갔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동양증권의 CMA 잔액은 지난 8월 말 기준 4조 원을 웃돌았으나 대량 인출을 겪은 9월 말에는 1조 원가량으로 급감했다. 본격적으로 불완전판매 논란이 일어난 이달 초를 계산에 넣으면 현재 동양증권의 CMA 잔액은 1조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기존 동양증권의 CMA 잔액이 7조 원을 찍었다는 집계를 감안하면 동양증권은 그야말로 날개 없는 추락을 한 셈이다.
한 달 새 4조서 1조로 급락
그간 동양증권의 CMA 잔액은 동양그룹의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마다 조금씩 출렁이곤 했다. 동양증권이 그룹을 돕기 위해 CMA 고객들을 상대로 “계좌에 있는 여유자금을 수익률이 높은 채권에 투자하라”며 영업을 펼친 것이 주된 이유였다.
물론 일부 발빠른 고객들의 경우 아예 타 증권사로 갈아타는 것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앞서 부실 저축은행 사태로 자금이 묶여 발을 동동 구르는 사례를 접한 학습효과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객들은 단순히 ‘안전하다’는 말만 믿고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열심히 사들였다.
그러나 지난달 추석연휴를 기점으로 동양그룹이 곧 막아야 할 채권 규모가 거론되면서 동양증권의 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게다가 한핏줄인 오리온그룹마저 ‘지원불가’ 방침을 밝히면서 동양증권에 들어있던 고객들의 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금융감독원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려 애썼고 이에 대량 인출은 잠시 줄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이 기습적으로 이뤄지면서 남아 있던 고객들마저 동양증권에서 등을 돌렸다.
그렇다면 동양증권 CMA에서 빠져나온 이 3조 원은 과연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대부분이 은행권으로 옮겨가 대기 중일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상당수는 증권업계에 남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각 증권사의 CMA 잔액 현황을 보면 우리투자증권의 경우 지난 6월 말 기준 4조1200억 원에서 9월 말 4조5400억 원으로 4000억 원가량이 늘어났다. 또 한국투자증권은 같은 기간 3조8400억 원에서 4조5300억 원으로 7000억 원 가까이 상승했다. 삼성증권의 경우에는 개인과 법인을 합산한 잔액이 5조3600억 원이었다. 결국 부동의 1위를 차지하던 동양증권이 급락하면서 빈 왕좌를 두고 삼성ㆍ우투ㆍ한투가 겨루는 모양새다.
더불어 미래에셋증권은 같은 기간 4조600억 원에서 4조4100억 원으로 3500억 원이 불어났다. KDB대우증권도 3조9000억 원에서 3000억 원 늘어난 4조2000억 원 선으로 집계됐다. 이 외에도 신한금융투자는 2조3900억 원에서 2조6600억 원으로 2700억 원 증가했으며 대신증권은 2조5800억 원 선으로 나타났다. 전체 증권사의 CMA 잔액은 동양그룹 위기가 불거지기 직전인 추석연휴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보였다가 조금씩 회복 중이다.
비어 있는 1위 둘러싼 각축전
하지만 증권업계가 동양그룹 사태로 입은 혜택을 마음 놓고 즐길 수도 없는 처지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일부 대형증권사가 동양 사태로 일시적 수혜를 보고 있지만 증권업계 전반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며 “중위험 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면 신탁, 채권형 펀드 등 자산관리시장 성장이 저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타 증권사 관계자는 “동양증권 이탈 자금은 증권사보다는 은행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좀 더 많은 듯하다”면서 “대개 CMA 잔액은 투자자들의 주식거래에 따라 변동성이 큰 편이기 때문에 아직은 웃을 때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일부 증권사의 경우 CMA 잔액이 늘어날수록 편법 영업이라는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다. 증권사들은 지난달 말 동양그룹 위기가 불거지자 동양증권을 비롯한 경쟁사 고객유치 활동 등 과당경쟁을 지양하기로 합의한 바 있으나 소용없었다.
실제로 서울 강남의 한 동양증권 지점 앞에서는 인출 고객들을 상대로 타 대형증권사 지점 직원들이 전단을 돌려 몸싸움이 일었다. 또 동양증권 지점을 나오는 직원을 고객으로 착각한 타 중소형증권사 직원이 대놓고 영업을 벌이다가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증권업계에서는 “상도의가 실종됐다”는 비판과 “업황이 나쁘니 실적이 먼저”라는 변명이 교차했다.
특히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우에는 온라인에서도 동양증권 CMA의 불안정성을 열거하며 자사로의 자금유입을 유도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메리츠종금이 운영하는 공식 블로그에는 “동양증권의 CMA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스크랩되는가 하면 “메리츠종금의 CMA는 동양증권과 달리 예금자보호가 가능하다”는 취지의 게시물이 등장했다.
앞서 동양증권의 종금업 라이선스가 종료되면서 메리츠종금은 현존하는 증권사 중 유일하게 종금업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다. 또 종금형 CMA가 예금자보호법상 5000만 원까지 예금자보호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업계에 몸담은 증권사를 깎아내리고 이탈하는 고객들을 잡으려 한 메리츠종금의 도 넘은 마케팅은 비난을 받으면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메리츠종금의 CMA 잔액은 한 달 새 급속도로 불어났다. 금투협에 따르면 메리츠종금의 CMA 잔액은 지난 9월 초 2조171억 원에서 동양 사태가 불거진 9월 중순 2조842억 원으로 늘어났다. 또 이달 1일에는 2조1672억 원을 기록하며 총 1500억 원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존 메리츠종금의 잔액을 고려할 때 상당히 급속도로 이뤄진 결과로 또 다른 구설수를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