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 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1등 모바일 메신저로 우뚝 선 김범수의 ‘카카오톡’이다.
‘한게임 창업자 김범수, 모바일 벤처의 신화 카카오톡’ 이 두 가지만 놓고 볼 때 카카오톡은 처음부터 성공 대로를 걸었을 것만 같고, 김범수라는 사람이 손을 대는 사업은 모두 대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시가 총액 10조 원을 넘나드는 NHN을 박차고 나오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자신의 청년시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NHN이 아닌가.
게다가 한국은 창업 초기 자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범수는 다시 벤처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김범수가 지인들에게 얘기한 ‘벤처기업 100개 설립’ 의지도 공공연히 회자된다. 한게임과 NHN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벤처 기업을 키우는 데 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여러 가지 모험적인 시도를 하고자 했다. 또 자신이 배운 노하우를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카카오톡’의 시초가 된 ‘아이위랩’에 대한 구상은 시작됐다.
‘아이위랩’은 그가 당초 생각한 신규 혁신 서비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법인 이름이다. 단순한 영문 풀이를 해보면 나(I)와 우리(We)를 실험(Laboratory)해 본다는 의미의 아이위랩은 현재 인터넷 서비스의 화두인 소셜(Social)로 통한다.
김범수는 당시 신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2007년 스톡옵션으로 받은 NHN주식 25만 주를 매각, 약 345억 원을 현금화했다. 외부 자금을 거의 받지 않고 자신의 자금으로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해 보고자 하는 의지였다.
당시 그는 전 세계 인터넷 기업 중 최강자였던 구글의 사업 모델을 검토했다. 이 중 블로그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해 블로그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아이위랩 창업과 동시에 미국과 한국에 동시 사무소를 차렸다. 벤처 창업을 해야 하니 미국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얻었고,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해야 하니 경기도 분당에 사무실을 차린 뒤 미래에 아이위랩을 지주회사로 만들 계획도 세웠다.

한게임 창업자이자 NHN 공동창업자인 김범수가 미국에서 새로운 소셜서비스를 내놓자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한국에서 성공한 김범수가 미국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성공 모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곧 잊혀졌다. 성공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창업 1년 만에 문을 닫을 만큼의 실패를 맛봤다. 결과론적으로는 실패가 모바일 시장을 개척하도록 했고, 카카오톡의 시장선점도 가능케 했다. 실패가 있었기에 ‘실수는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교훈을 얻어 다른 기업의 문제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었다. 실패를 겪지 않았다면, 아이위랩은 지금도 PC 또는 인터넷 시장에 머물렀 을 확률이 크다.
그가 아이위랩 이사회 의장으로서 처음 내놓았던 서비스는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부루닷컴(www.buru.com)’이다. 부루(buru)는 데이터를 클리핑해 공유하는 아이디어를 담았던 서비스다. 사용자들이 작성한 블로그 콘텐츠를 주제별로 분류해 컬렉션으로 보여주고, 같은 관심사나 주제에 대한 블로그 페이지를 모두 연결시켜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동영상이나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웹 2.0 서비스라고도 할 수 있다.
2008년 한국에서 김범수의 컴백작이었던 위지아(Wisia)는 소셜 추천 사이트로, 사용자 스스로 정보의 중요성을 직접 결정하는 ‘집단지성’을 기반으로 한 소셜 추천 사이트다. 전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정보가 아닌 대중의 지혜로 쌓인 추천정보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궁금증을 묻고 평점을 주는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갔다. 네티즌들끼리 가장 적합하고 좋은 지식을 선별하도록 만든 사이트다.
첫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 위지아닷컴 공개 시범서비스를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가입자 1만 명을 돌파했다. 공식 서비스를 시작하면 10만 명 돌파도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 해 12월 아이위랩은 ‘위지아 베스트5’라는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선보이며 위지아 시즌2로 대폭 개편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좋은 다섯 가지를 찾아주는 서비스였다. 하지만 시즌 2에도 큰 성과는 없었다. 이미 검색은 포털이 장학한 상황이었다.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 모두 결과가 좋지 않자 김범수는 아이위랩을 지주회사로 만들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했다. 여러 분야에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투자를 하고 직접 뛰어들어 하나씩 키워가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두 번의 실패를 겪고 서비스를 닫은 김범수는 전혀 다른 시장에 눈을 돌리게 됐다. 인터넷에서 모바일로 항로를 변경한 것이다. 100명의 CEO를 키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전략을 대폭 수정한 셈이다.
게다가 기존의 서비스를 접어야 하나 고민을 하던 2009년 말에는 국내에서도 아이폰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2005년부터 미국에서 생활해온 그는 아이폰의 폭발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전의 아이템을 과감히 접었다. 그리고 수백 개의 아이디어가 오고간 후 나온 것이 바로 ‘카카오톡’이었다.
그래서 카카오 사람들은 두 서비스를 그저 시도였을 뿐,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위랩은 지주회사 형태에 머문 채 여러 분야에 씨앗을 뿌리는 데 그쳤을 가능성도 있다.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키우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툴을 만들려는 노력도 부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카카오톡이 없었다면 후발 주자들의 잇따른 진출도 없었을 공산이 크다. 실패가 있어 카카오톡의 돌풍은 가능했던 것이다.
김범수는 위지아닷컴과 부루닷컴의 실패를 겪으면서 선점효과를 각인하게 됐다. 오랜 기간 준비하기보다 한 기능에 초점을 맞춰 재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그렇게 그 유명한 ‘4-2 법칙’이 만들어졌다.
카카오에서는 새 프로젝트에 착수할 때마다 팀원을 4명 넘게 배정하지 않는다. 보통 2명의 프로그래머, 1명의 디자이너, 1명의 기획자로 팀이 이루어진다. 이 팀이 2달 동안만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기간 동안 좋은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그 프로젝트는 과감히 접는다. 팀은 해산되고 멤버들은 다른 프로젝트로 배정받게 된다. 직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 일을 시작한다. 이것이 ‘4-2 법칙’이다.
그는 PC 시장에서 참패를 경험한 후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발굴했다. 이제범 대표는 “데스크톱 인터넷에서는 검색을 중심으로 가장 큰 시장이 형성됐다면, 모바일 인터넷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 말했다. 분야를 달리 하니 방향도 바뀌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자 모바일 메신저가 유력하게 떠올랐다. 프리챌 출신으로 PC 메신저를 만든 경험이 있는 이상혁 최고서비스책임자(CSO)가 키를 잡았다. 소통기능과 무료에 포커싱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애플리케이션인 ‘왓츠앱’은 아이위랩에 큰 교훈을 줬다. 이것은 서비스 모델이지 다운로드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툴이 확산되고 이용자가 몰리면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발굴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이것은 이미 인터넷에서 배운 교훈이다.
개발은 세 팀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개발에 몰두했다. 카카오톡, 카카오수다, 카카오아지트가 그렇게 나왔다. 카카오톡은 네티즌 입소문만으로 2주일 만에 11만 명에게 선택을 받았다.

초반의 실패가 있었지만 다행히 카카오톡이란 결과를 이끌어내기까지 낙오자는 한 명도 없었다. 김범수와 뜻을 함께 했던 팀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축적된 경험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카카오톡을 만들어 냈다.
카카오톡에 집중키로 한 것은 김범수 스스로도 가장 잘 한 판단이었다고 자평한다. 오죽하면 사명도 아이위랩에서 카카오로 바꿨겠는가.
모바일에 집중키로 한 만큼 모바일의 성격에 사업의 성격도 맞췄다. 모바일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스피드다. 편리함과 간결함도 필요하다. 수백만 개의 애플리케이션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사람을 편리하게 만드는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그 하나를 누구보다 빨리 만들어야 한다. 홍보에도 그게 더 좋다. 추가기능은 출시 후에나 생각해 볼 이야기다.
카카오톡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기능도 사실상 하나다. 연락처 기반의 메신저. 다시 말해 연락처를 추가할 필요가 없는, 게다가 무료 메신저라는 뜻이다. 카카오는 서비스를 개발할 때 특정 기능 하나에 집중한다. 직원들에게 어떤 모바일서비스를 만들지 제안을 받고 그 중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을 추리는데, 기능 하나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제안들은 여러 가지 콘셉트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이를 추리고 간결화 시키는 것이 팀장, 경영진의 역할이다.
하나의 서비스 기능에 충실해야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사용자들이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 카카오의 설명이다. 카카오톡도 그랬다. 연락처 기반의 모바일 메신저이면서 친구들의 소식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자고 기획됐다. 하지만 복잡했기 때문에 그냥 연락처 기반 모바일 메신저 하나로 시작했다.
앞서 강조했듯이 복합적인 서비스는 그만큼 개발 기간도 길어진다.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개발기간이 길어지면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이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는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시장에 내놓아야 시장 선점이 가능하다.
처음에는 ‘카카오아지트’라는 서비스도 같이 만들었다. 하지만 카카오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카카오아지트 팀까지 카카오 톡 개발에 집중토록 했다.
카카오가 고집하는 또 하나는 ‘무료’라는 것이다. 카카오톡이 나오게 된 데는 미국의 왓츠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바일 분야에 집중키로 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찾고 있을 때였다. 당시 왓츠앱이 인기를 끌었고, 카카오 직원들도 사용하면서 만족했다. 무료 문자를 사용하고 싶은 사용자들이 나서서 왓츠앱을 주변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것을 보니 더더욱 관심이 갔다.
그런데 그 때 무료 문자 메시지 앱이었던 왓츠앱이 유료모델로 전환했다. 카카오는 이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이 서비스가 가능하려면 우선 많은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데, 유료 모델이 이를 가로막는다. 주변인들에게 계속 추천하던 사람들도 유료라는 벽 앞에서 홍보활동을 접을 수박에 없다. 내가 무료로 사용하자고 다른 사람에게 유료를 강요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유료가 되는 순간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어야 강력한 서비스가 될 수 있는데, 이용자들을 주저하게 만드는 순간 그 힘은 쇠락한다.
그래서 카카오는 1억 명 가입자를 모을 때까지 가입자 저변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할 계획을 세웠다. 과감히 투자를 하고 소탐대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카카오톡은 광고가 아닌 정보를 사용자간 주고받게 하는 모바일 ‘생태계 허브’가 되겠다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톡톡! 국민앱 카카오톡 이야기 中│문보경·권건호·김민수 지음│머니플러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