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1등 모바일 메신저로 우뚝 선 김범수의 ‘카카오톡’이다.
김범수는 살아 있는 벤처 신화다. 한게임으로 인터넷게임 붐을 일으켰고, NHN을 통해 대한민국 최대의 M&A도 성사시켰다. 그렇게 시가총액 10조 원대의 기업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만한 벤처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김범수가 다시 벤처로 돌아와 ‘카카오톡’의 신화를 썼다. 삼성 SDS의 PC통신 ‘유니텔’을 개발, 한게임을 설립, NHN의 공동 창업자 경험을 바탕으로 카카오톡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혼자만 신화가 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누구나 신화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한다. 모바일에서는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자존심 강했던 젊은 청년 네트워킹 시대 준비
김범수는 1966년 서울에서 사업가 아버지, 교육자 어머니 아래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는 뭘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김범수와 형제들은 자기 일은 늘 자기가 스스로 해야 했다. 개구쟁이처럼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공부도 알아서 했다.
김범수는 목표를 세우면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대학 입학 때도 그랬다.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한 후부터는 매일 새벽 1시면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때론 친구들과 놀고 싶기도 했고, TV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예 방과 후 집에 오면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곤 한밤중에 다시 일어나 공부한 것이다. 1년 재수를 하며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진학했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친구들에게 백과사전을 읽고 알게 된 것을 문제로 내고, 놀이에 응용하는 일을 즐겼다. 그는 백과사전을 뒤져 퀴즈를 만들고, 반에서 퀴즈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문제해결 능력이 키워졌다고 얘기한다. 그는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아이들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곧 ‘창업자 DNA’가 되는 셈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졸업 이후 같은 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분야는 ‘신뢰성 공학’. 제품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확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전공을 통해 컴퓨터, 인간공학, 경제, 경영 등의 다양한 분야를 넓게 훑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미래’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991년 봄,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때였다. 후배의 자취방에서 BBS(Bulletin Board System·10명 내외의 동시접속이 가능한 채팅 지원 네트워킹 시스템)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며 무릎을 쳤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삼성 SDS에 입사했다. 미래의 네트워킹 시대를 준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컴퓨터 분야가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지나고 보면 삼성 SDS에 입사키로 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원 없이 컴퓨터를 만지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삼성 SDS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첨단 시스템을 개발해보는 기회를 갖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외환위기 이후 삼성 SDS를 떠난 수십 명의 임직원들은 벤처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다. 김범수도 그 중 하나였다. 삼성 SDS를 ‘벤처 사관학교’라고 부르던 시절도 있을 정도였다.
김범수는 양식편집기 ‘폼 에디터’와 호암미술관 소장품 화상관리시스템 등을 개발했다. 그러던 중 1995년, 그는 삼성의 PC통신 사업인 삼성유니텔 설립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에 지원했다.
유니텔 팀에 있다 보니, 통신시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 국내 통신시장의 대세는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때부터 인터넷이라는 분야에 자신이 생겼다. 이를 게임과 효과적으로 결합하면 빠른 시일 내에 대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던 그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은 유니텔에서 이건희 회장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취임 기념으로 88 문제를 가장 빨리 푼 사람에게 노트북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면서다. 간단한 게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어떤 종목으로 창업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은 것이다. 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인 만큼 게임이 가장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고 판단했다.
당시는 PC통신으로 게임에 접속하던 단계에서 웹 시대로 가는 중간지점이었기 때문에 사업성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대기업 조직에서는 이런 아이디어가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창업을 위해 1998년 9월, 사표를 던졌다.

‘NHN’으로의 합병
우선 뜻을 같이 한 대학 선후배 5명과 오피스텔을 빌려 모였다. 큰 흐름은 잡고 있었지만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없었다. 개발대행으로 수익을 낸다고 해도 미래가 없었다. 막막했다. 차라리 애초 목표인 게임 개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둑, 장기 등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게임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개발대행을 하지 않으면 당장 수익을 낼 게 없으니 난감했다. 결국 문태식(전 NHN게임즈 대표, 현 엔플루토 이사회 의장)을 제외하고 3명이 중도 포기했다.
김범수는 우선은 입에 풀칠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게임을 만들 것이니, 돈도 벌고 최신 게임의 흐름도 볼 수 있는 PC방을 차리기로 했다. 친인척들에게 돈을 빌려 어렵사리 문을 연 전국 최대 규모의 PC방 ‘미션넘버원’은 다행히 PC방이 막 뜨기 시작하던 때였던 덕으로 운영이 순조로웠다. 그는 PC방 한쪽 구석에 ‘개발실’을 만들어 연구하며 PC방 운영으로 들어온 돈을 자본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1998년 11월, 자본금 5000만 원의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이 설립됐다. 한게임커뮤니케이션 설립 후 한동안은 PC방 사업과 솔루션 개발로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곧 장기적인 비전을 위해서는 이러한 사업모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당분간 수익사업은 접고 한게임 오픈이라는 목적사업에 전념하자.”
직원들에게도 퇴근 불가라는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훗날 한게임의 대명사가 된 고스톱과 바둑 등이 이때부터 6개월간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이후 1999년 12월, 한게임 무료서비스가 시작됐고 PC방을 적극 활용했다. 전국 PC방에 관리프로그램을 무료로 깔아주는 대신 한게임을 PC방 컴퓨터 기초화면에 띄우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서비스를 개시한지 3개월 만에 무료 회원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뒀다. 서비스 개시 불과 한 달만인 2000년 1월, 한국기술투자로부터 10억 원대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게임이 사상 초유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급속한 성장세를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절박함을 공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삼성 SDS 입사 동기 네이버 이해진 사장(현 NHN 이사회 의장)이었다. 네이버는 당시 4위였다. 5억 원의 자본으로 시작한 이 의장은 회사 설립 이후 곧바로 한국기술투자로부터 1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회원이 많았지만 자금이 없었던 한게임, 자금 여력이 있었지만 4위로서 트래픽을 끌어오기 힘들었던 네이버. 둘 다 위기 속에 있었다. 김범수는 자연스럽게 합병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만큼 위기를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과 검색이라는 두 모델을 두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합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M&A가 성사되고, 기대했던 대로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고, 2010년 1조5000억 원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료화’로 흑자기업 전환
해외진출까지
결과론적으로 성공적인 합병이었지만 합병 직후 상황은 좋지만은 않았다.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당시 재무 상황은 막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유료화’는 위기 탈출을 위한 유일한 카드였다. 그는 유료화 결정을 당시 최고의 결단의 순간이라고 떠올린다.
당장의 사이트 운영도 시급한 상황에 유료화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전에 유료화 방침이 새나가면서 사이트는 반대하는 회원들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실패하면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부분이 실패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 3월, 유료서비스를 선보인 첫날 1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한 달 만에 7억 원을 기록하는 폭발적인 성과를 거뒀다. 한게임의 성공적인 유료화에 힘입어 NHN은 2000년 79억 원의 적자기업에서 2001년 53억 원의 흑자 기업으로 전환한다.
그는 전자신문 ‘결단의 순간들’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담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날 기자간담회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사상 최대의 폭설이 내려, 참석률도 좋지 않았다. 비나 눈이 오는 날 이사하면 잘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행사 후 차를 버려둔 채 산만한 눈을 머리에 이고 사무실로 걸어오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중략) 지금도 당시 그 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유료화의 성공은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김범수는 단독 CEO 경영진 체제에서 대표를 맡으면서 해외진출을 위해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준비를 시작했다. 해외시장 진출을 준비하면서 NHN은 해외사업과 국내 사업을 분리해 대표이사를 각각 두기로 결정했다. 국내시장은 최휘영 네이버 부문장이 맡았고, 김범수는 해외사업을 진두지휘하기로 했다.

인생 2막 시작
10년 동안 그는 그렇게 쉬지 않고 일했다. 너무 달렸던 걸까, 아니면 너무 이른 나이에 성공해서였을까. 상상한 것 이상의 성공을 하고 나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미국으로 가 있던 가족 곁으로 가 휴식을 취하며 ‘인생 2막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미국에서 새로운 것(웹2.0과 아이폰)을 보았고, 그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확산되던 시절 삼성 SDS를 뛰쳐나왔고, 한게임을 창업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오버랩 됐다. 지금의 변화에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2007년 8월, 돌연 NHN USA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제 안락한 집이 되어 버린 NHN을 쉽게 떠나가기 힘들었지만 김범수는 다시 벤처로 돌아오고 싶었다. 혁신적인 인터넷 서비스에 목말랐던 그는 여러 가지 모험적인 서비스를 시도하고자 했다. 자신이 배운 노하우를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카카오톡의 시초가 된 ‘아이위랩’에 대한 구상은 시작됐다.
아이위랩은 ‘나’를 뜻하는 영문 ‘아이(I)’와 우리를 뜻하는 영문 ‘위(We)’를 합쳤다. 그리고 실험실을 뜻하는 랩(Laboratory)을 붙였다. 하지만 창업 초기 서비스인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은 결과론적이지만 실패했다.
그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방향을 틀고 개발한 ‘카카오톡’으로 실패를 기회로 만들었다. 실패했어도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여러 가지를 실험해 본다는 뜻을 가진 회사였다. 그래서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은 아일위랩에게 실패가 아닌 시도였을 뿐이다. 결국 그는 모바일에 집중한 ‘카카오톡’을 탄생시켰고, 출시 3년 만에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했다. 사명도 ‘카카오’로 바꿨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톡톡! 국민앱 카카오톡 이야기 中 │문보경·권건호·김민수 지음│머니플러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