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달 회고록]5共비화(秘話)-#5 신군부 국보위의 탄생
[권정달 회고록]5共비화(秘話)-#5 신군부 국보위의 탄생
  • 고동석 기자
  • 입력 2013-10-07 10:36
  • 승인 2013.10.07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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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떠내려가는 시냇물 정국

 

▲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8월 11일 문화방송·경향신문 이진희 사장과의 회견 때 모습.<연합뉴스>
행정부 조정-통제하는 무소불위 권력 국보위 

이른바 1980서울의 봄으로 회자되던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권력 공백 상태에서 최규하 임시정부가 국정을 이끌고 있었다. 정국 불안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나라 경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국가위기 상황을 맞았다.

전국 대학은 연일 학내 시위로 소요가 계속됐고, 유신시대 정치 규제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된 주요 정계 인사들이 정치일선에 복귀하려는 움직임에 국가질서가 매우 혼란했다. 당시 ‘3’(김영삼-김대중-김종필)으로 지칭되는 유력 정치인들 역시 사면 복권돼 전국 도처에서 연설과 강연회를 열었다. 이들 세력은 세 갈래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지역에서 최규하 임시정부 이후의 집권을 목표로 뛰고 있었다.

차기 집권을 노리던 3김 세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당 기득권 세력을 배경으로 영남-충청권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한 김종필과 구() 신민당의 민주화 세력 일부를 포함해 영남지역의 지지를 받는 김영삼, 야당과 민주화 세력에다 호남지역의 절대 지지를 받는 김대중 진영으로 갈려 정국 혼란이 가중됐다. 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합법적으로 승계해 국정을 대표했지만 실상 신군부 세력이 국가 권력을 주도하고 있었다.  

신군부 궁정동 안가서 시국수습대책 협의

197912·12사태 이후 19805월까지 정국 혼란이 심해지자, 심지어 보안사령부 앞까지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려와 군부는 물러가라며 시위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국의 중심에서 보안사 정보처장의 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시국수습 대책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또 시류에 민감해하던 친()정부 인사들이 속속 보안사로 찾아왔다. 내 기억으로는 김종호 전 내무부 장관, 유흥수 치안본부장, 정종택 농림부 장관 등은 이대로 혼돈에 빠진 정국을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시냇물처럼 지켜볼 수는 없다며 나라를 걱정하는 의미에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 일단 질서를 잡고, 대책을 세워야 된다고 건의했다.

나는 고민 끝에 문서로 시국수습 대책방안을 작성해서 신군부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특전사령관), 유학성(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1군단장), 차규헌(수도군단장) 등을 중심으로 궁정동 안가에 모여 논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고 뒤에 내가 별도로 보고했다. 신군부 세력은 부분 계엄으로는 안 되고 전국 비상계엄으로 확대해 행정-사법권을 군이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토대로 1980517일 주영복 국방부 장관 주재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소집됐다. 여기서 군부 주요 지휘관들(육해공군 사단장급 이상)은 부분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정호용, 노태우 장군이 나서 적극적으로 찬성했지만 군수사령관이었던 안종훈 장군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의석상에서 반대 의견을 밝힐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발언으로 안 장군은 뒤에 불이익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보위 명칭을 놓고서도 고민이 많았다. 결국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라는 명칭으로 정해졌는데 내 기억으로는 전 사령관이 국가보위라는 단어가 들어갈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보위비상기구를 설립해 행정-사법권을 조정-통제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워 나가자는 방향으로 귀결됐다. 이 모든 조치는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시행됐다.  

국보위 용어 놓고 총리 설득 진땀 대치

결국 517일 전국 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됐지만 시국 수습대책의 핵심 축인 국보위 설치는 근거 법률을 마련해야 하는 절차에 부딪혀 난항을 겪었다.

당시 국회는 비상계엄으로 공전 상태였기 때문에 입법부로서 국보위 설치법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득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각 정당 원내대표에는 여당인 공화당 김용호, 신민당 황낙주, 유신정우회 이해원 원내총무가 맡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수시로 만나 국보위 설치를 위해 상의 해봤지만 쉽게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이 중 황낙주 원내총무는 권 처장, 왜 거짓말을 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크게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나는 3당 원내총무와 자주 만나 국회와 군부 간에 필요한 자료를 교환하고 서로의 입장을 밝히고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국회 기능이 마비된 비상정국 아래에서 국회 원내총무들이 생각하는 대로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 무렵 국회 정문 앞에는 탱크를 한 대 배치해놓고 출입을 통제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의원회관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도록 해 달라고 부탁해 왔고 이를 허락해주는 일도 있었다. 국회가 닫힌 상태에서 국보위를 설치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유신 헌법상에 명시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대통령령의 초안을 이원홍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청와대 율사 출신 김유후 비서관의 도움을 받아 국보위 설치 근거를 작성해 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런 다음에 국무총리-대통령 결재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국보위 설치 대통령령을 만들어 당시 박충훈 총리서리(국회 동의를 얻지 못했음)에게로 결재를 받으러 갈 때 나 혼자서는 설득하기 힘들 것 같아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김용휴 총무처 장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을 대동하고 총리실로 들어갔다.

내가 국보위 설치안을 박 총리에게 보고하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박 총리는 행정부를 조정-통제하는 기관을 설치해서 되겠느냐며 조정-통제라는 용어에 이의를 제기하고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완강하게 굽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조정-통제라는 단어에 붙들려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박 총리와 나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나로서는 총리에게 시국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행정부에 대한 조정-통제를 하지 않는다면 국보위를 설치하는 의미가 없다며 여러 차례 거듭 설명하고 사정하면서 결재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박 총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조정이라는 말은 영어로 ‘CO-ordination’ 인데 여기에 통제를 의미하는 ‘Control’이 포함된 것이니까 통제라는 용어는 빼고 조정만 두자고 맞섰다. 나 역시 “‘조정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조정하는 것이고 통제는 그렇게 가서는 안 되고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로 두 용어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통제라는 말이 빠지면 국보위 설치의 의미가 없으므로 꼭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박 총리는 권 처장! 참 고집도 되게 세네라면서 3~4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지못해 결재를 해주었다.

나는 중앙청에서 총리 결재를 받고 보안사로 돌아갔다. 국보위 설치령은 이렇게 박충훈 총리서리의 결재 후에 정식 절차를 밟아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최규하 대통령까지 최종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최 대통령이 결재를 할 때 전 사령관이 청와대에 갔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 1980년 초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국보위가 설치되기 전 행정부를 이끌었던 최규하 대통령과 박충훈 국무총리서리.

조순 교수 국보위 참여 요청 끝내 사양

 국보위 설치안은 이렇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대통령과 국무위원을 중심으로 국보위가 설치돼 아래 조직으로 상임위원회가 구성됐다. 국보위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 상임위원장은 전 사령관이 맡았다. 각 분과위원회를 조직해 삼청동에 있던 교육공무원교육원에 사무처를 차렸다.

당시 상임위원들로는 국보위 당연직 위원으로 분과위원장에 국방위원장 이기백(육군 소장), 법사위원장 문상익(대검찰청 검찰국장), 외무위원장 노재원(외무부 기획관리실장), 내무위원장 이광노(육군 소장), 경과위원장 김재익(기획원 기획국장), 재무위원장 심유선(육군 소장), 문공위원장 오자복(육군 소장), 농수산위원장 김주호(농수산부 차관보), 보사위원장 조영길(해군 준장), 교통위원장 이우재(육군 준장), 건설위원장 이규호(건설부 기획관리실장), 상공자원위원장 금진호(상공부 기획관리실장), 정화위원장 김만기(중앙정보부 감찰실장), 사무처장 정관용(교육공무원교육원 부원장) 등이다.

국보위 상임위 인선 영입과정에서 얽힌 얘기도 많았다. 법사위원장으로 선임된 문상익 검찰국장은 검찰에서 그의 부인이 부동산 투기 등으로 재산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 물러나고 뒤에 육군 법무감 출신인 김영균(육사 11)으로 바뀌었다. 국보위 상임위원들은 군인과 고위 관리들로 구성돼 사실상 기존 내각의 조정 역할을 수행했다.

경과분과위원장의 경우 나의 육사생도 시절 교관이었던 조순 교수(서울대)를 영입하려고 했다. 내가 나서 두 차례에 걸쳐 점심식사를 하면서 전 사령관의 뜻을 전하고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학교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끝내 사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는 김재익 씨에게로 돌아갔다.

조 교수는 뒷날 6공화국 초기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국보위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로는 한승수 전 총리, 이경숙 전 숙대총장(이명박 정부 인수위원장 지냄), 김종인 전 보사부 장관, 현홍주, 전 주미대사, 이종찬 전 국정원장 등을 들 수 있다.

국보위에 참여했던 위원 대부분은 훗날 장관과 국회의원 등 주요 공직에 기용됐다. 나는 내문분과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나와 현홍주(당시 중정 정보국장) 두 사람은 국보위를 통해 주기적으로 시국에 관한 전반적인 정세 현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당시 시국수습 방안 등 종합적인 조정 업무로 바빴기 때문에 내무분과 회의에 불참할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러자 이광노 분과위원장으로부터 회의에 참석하라는 경고성 연락을 받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시류를 분별 못하는 그가 철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도 같은 내무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보위의 주요 활동상은 정화위원회의 삼청교육대 설치, 문공위원회의 과외금지, 경제위원회의 중화학공업육성의 지속적인 투자와 조정을 들 수 있다.

특히 삼청교육대 설치 운영에는 국보위 정화위원회가 정책을 결정해서 시행에 들어갔지만 실제로 대상자 선별은 현지 경찰에서 맡아 진행했다. 그 때문에 다소 사적인 친소관계가 개입돼 취지를 흐리게 하는 일도 있었다. 이를 테면 당시 한 서울지역의 조직폭력 두목을 삼청교육대로 보내야 하는데 보안사의 어느 누가 이 사람을 빼달라고 한다면서 서울시경 형사과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묻기에 난 원칙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역에서 연결된 사람이 또다시 나를 찾아와 사정했지만 야단을 쳐 돌려보낸 일이 있다. 후에 삼청교육대에 갔다 온 사람들 사이에서 지옥에 가라면 갔지 거기는 못 갈 데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조폭 두목은 겉으로 보기엔 용모가 잘 생기고 유력한 사업가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사정을 들어주지 못해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 1980년 제5공화국 정권 창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정화’라는 미명아래 삼청교육대 입소생들이 봉 체조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5개헌작업 착수 

국보위가 설치된 뒤 곧바로 유신 헌법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국회 외교 분과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우병규 씨와 노태우 장군의 처고종사촌 처남으로 검사출신인 박철언 씨가 위원으로 추천돼 들어왔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정보처에 두고 유신헌법 개정에 필요한 기초 작업을 지시했다. 아울러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민주당 정권 때 국방부 장관을 지낸 권중돈 씨, 헌법학자 문홍주·박일경 씨 등을 위원으로 위촉해 5공화국 집권을 위한 본격적인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kds@ilyoseoul.co.kr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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