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불교문화의 영향
통일신라 문화가 한국문화의 모체
신라가 통일하고 삼국문화가 하나가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문화가 형성돼 통일된 신라문화를 한국문화의 모체라고 한다. 삼국시대엔 삼국이 다투어 건립한 거대한 사찰과 사찰내의 목탑과 거기 걸맞은 궁궐이 있었을 것이고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려는 화려하고 위엄이 넘치는 관모와 장신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문화도 중국의 위엄과 권위에 넘치는 거대함이나 화려함에 비하면 소박한 것이었다.지금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서 보면 통일신라의 사찰인 석굴암과 불국사는 삼국시대의 황룡사나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청암리 유적에 비하면 아주 왜소해진 것이지만 우리의 산하에 딱 걸맞은 규모의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규모는 작아졌지만 모든 지혜를 모으고 고도의 미감과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을 총 동원해 하나가 돼 이루어낸 결과인 것이다. 통일신라 미술이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이상과 불국토의 이상이 어우러져 하나가 된 경지일 것이다. 그것은 신라 고유의 전통문화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들어온 새로운 불교문화가 충돌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화합해 전통문화의 기반위에서 독특한 미술문화를 창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의 조형문화는 주변 산하와의 조화, 주변 조형물과의 조화, 전후좌우고저의 비례의 적정성 위에 전후좌우고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뿐 아니라 세부와 전체가 간결하게 표현돼 우리 마음에 반갑고 아름답게 자리 잡는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거대한 조형물인 황룡사 구층목탑과 미륵사지 석탑과 통일신라 초기의 고선사지 석탑과 감은사 석탑과 통일신라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의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과 석굴암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석가탑을 예로 들면 탑의 높이와 크기의 적정성, 기단에서 탑신 상륜부에 이르는 각 부위의 크기 높이 폭의 체감률이 어찌 그리도 적정하고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수백 번을 봐도 완벽해 어느 한 구석도 조금이라도 허술하거나, 어디가 좀 이랬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어디라도 억지로라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 완벽한 조형물은 구석구석을 따져 봐야 하고 보는 사람도 조형물에 따라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그런데 석가탑은 완벽하면서도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안하고 저절로 어떤 희열이 가슴에 가득해진다. 완벽한 조형물이 이와 같이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이 조형물의 특별한 매력이고 그 깊은 원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석가탑은 사람이 만들었으되 자연의 조화로 땅속에서 사뿐히 솟아올라 그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일신라 미술은 석조의 조각, 건축조형물과 제반 석축의 아름다움이 단연코 눈에 띈다. 공예에서도 사리장치의 아름다움, 사리 장엄구의 아름다움, 세계 최고 최초의 목판인쇄 다라니경과 성덕대왕 신종 등 금동작품의 아름다움 등 수없이 많지만 모두가 불세계의 이상향을 지향하고 국태민안을 소망하는 국가의 이상이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여기에는 신라인의 예지와 정성이 깃들어 있고 우수한 설계자와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귀족적 가계와 국가적인 힘이 후원하고 결집시킨 결과이며 그 조형에는 그 이전의 전통문화에 기반을 두고 외래문화도 과감히 수용한 결과이며 역시 자연에서 배운 것이다.
대중에 한발 다가선 고려 공예미술
고려 미술은 공예에서 두드러진다. 신라의 석조, 조각, 건축, 토목의 아름다움은 왕실, 귀족, 불교라는 큰 힘이 결집된 것이어서 국가 발전에 공헌하고자 하는 거국적 미술 사업이라면 고려의 공예는 미술이 한발 대중에 다가서서 왕실과 귀족의 실생활에 큰 발전이 있었지만 대중의 생활에도 깊숙이 그 영향이 미치고 있었다.
공예문화의 발전은 미술의 향유권이 그 전보다 확대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 예 중 하나가 이때까지 토기 도기의 상태에서 신라 말기부터 시작된 청자와 백자 문화가 고려시대에 크게 발전하고 청자의 전성기를 이룬 것이다. 토기에서 도기로의 발전도 큰 성과이고 실생활에 큰 편익을 제공했지만 도기문화에서 자기문화로의 발전은 대발전이요, 엄청난 성과이고 생활문화의 일대 혁신이고 일대 혁명적 발전이었다.
도기문화에서 자기문화로의 발전은 우리 생활 문화 전반과 특히 식생활문화에 엄청난 큰 혜택이고 편리함이었다.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불교는 대체로 왕도를 중심한 명산 등 요지에 대가람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고려조에 들어서면 전국 방방곡곡의 크고 작은 사찰이 들어서서 「사사성장 탑탑안행」 「절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들은 곳곳에 기러기가 날아가듯 들어서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불교문화도 방방곡곡의 백성들에게까지 그 혜택이 미치고 있었다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며 이러한 전국적인 성황이 팔만대장경의 조성과 같은 큰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저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구름학무늬매병
최고의 고려청자로 꼽히는 12세기 구름학무늬매병(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풍만하고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며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매병의 몸통 전면에는 학과 구름이 상감돼 있는데 원 안의 학과 구름은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고, 원 밖의 학과 구름은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나머지 부분은 구름무늬로 장식됐다. 학과 구름의 진행방향이 다른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장시켜 짜인 구획에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문양처리의 능숙함은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보게 한다.
이 매병은 우리시대 최고의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이 1935년 서울의 일본인 골동품 상인 마에다에게서 2만 원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서울의 괜찮은 집 한 채 가격은 1000원인 물가와 비교하면 엄청난 거금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일본인이 4만 원에 물건을 되팔기를 간청했지만 간송이 이를 거절한 건 유명한 일화다.
간송은 1938년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현재 간송미술관)을 설립해 수탈된 문화재를 사들여 정리·연구를 시작했다. 구름학무늬상감매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8호로 지정됐고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사진= 한국미술발전연구소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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