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확대 개편해 정보처로 부활시켰다가 10·26사태로 계엄령 아래에서 정보국으로 창설됐다. 정보국에는 정치과, 사회과, 그리고 경제과 3개과를 두게 되었는데 정치과는 국회 및 국회의원에 대한 정보 수집과 정당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사회과는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 종교, 학원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경제과는 기업과 경제단체 및 제반 경제활동 상황과 동향 등을 수집했다.
그뿐 아니라 정보국 요원들은 계엄령 하에서 정부 각 부처와 자치단체 등 행정기관을 비롯해 사법기관에 대해서도 첩보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보안사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영역의 정보활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맡았던 정보국장의 위치는 상당한 권력행사가 자연스럽게 가능했고 여러 측면에서 처신이 조심스러웠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군부대 울타리 안에서 모든 업무를 취급했기 때문에 외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고 외부인이 날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국난을 맞이했던 때라서 하루빨리 나라의 기반이 올바르게 잡혀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일했다.
12·12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국가적으로 정말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권력이 합동수사본부로 쏠리면서 정보국의 역할이나 소임은 더욱 커졌다. 특히 언론통폐합에 관한 문제는 다른 전문적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정보국 내 언론반이 뒷받침하는 식으로 개혁 작업이 진행됐다.
자연히 앞으로 전개될 정치적 사항을 분석하고 방안을 모색하는 일도 겸해야 했다. 또 사회 곳곳의 여러 개혁에도 의견을 제시하고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드는 일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이때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우병규 국회사무차장과 박철언 전 의원이 보안사에 파견돼 돕기도 했다. 일상이 온통 어떻게 하면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까에 매달려 있었다.
시국수습방안을 만들어 소위 신군부 주체들에게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 시행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실질적인 정치 제도와 기반을 만들어 가는 사안들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장영자 사건의 전말
이 사건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의 뇌리에 박혀 있을 정도로 언론보도와 드라마로 각색될 정도로 숱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알려진 내용 중에 장영자 사건이 민주정의당 창당자금을 마련했다느니 또는 정치적 후원금을 마련했다는 등의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장영자라는 사람을 단 한 번도 실제로 대면한 적이 없다.
1981년 봄 내가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다. 어느 날 공영토건의 변광우 사장과 감사인 김동희라는 사람이 날 찾아왔다. 김동희는 나와는 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롯데호텔에 진을 치고 사채놀이하는 장보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남편은 이철희라는 국회의원이고 장성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액을 움직이고 있는데 (정권을 등에 업은) 실세다. 청와대와도 잘 통하고 요로에 다 잘 알고 있어서 든든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큰 자금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알려지기로는 정치적 배경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제 질서를 혼란하게 해도 어떻게 처리할 수 없다고 하더라”며 하소연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게 말이 되느냐. 정의사회를 구현하자고 탄생한 5공화국이 무슨 그런 사람을 두둔하겠느냐.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말도 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유학성 부장은 나와 동향이고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평소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 조언을 구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유학성 부장이 나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중정으로 초대했다. 내 기억으로 1981년 3월 초쯤 남산에 있던 중정을 방문했다. 나는 중정부장실에서 유 부장과 5공 초기 인사문제와 현안들을 논의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가 문득 김동희의 말이 생각났다.
“롯데호텔에 진을 치고 있는 장보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경제 질서를 많이 어지럽히는 바람에 피해자가 많다고 합니다. 중정에서 알아보고 처리를 잘 해야 될 듯합니다.”
이 말을 전하고 출입구로 나가던 중에 당시 중정 현홍주 차장이 들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래서 현 차장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줬다. 이후 유 부장은 장영자와 관련된 내용을 파악해서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보고한 뒤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정이 나서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조사해 단호하게 처리했더라면 조용하게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중정은 장영자에 대해 대수롭게 여기고 간단한 사건으로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게 문제였다. 중정으로선 당연히 검찰로 넘겨 사법처리하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장영자가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검찰이 수사를 벌이자, 언론 보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영자와 이철희 부부에 대한 유아시절부터 성장배경과 과정, 사파리클럽에서 결혼한 장면들을 일일이 들춰져 보도됐다.
언론들은 장영자가 귀부인같이 꾸미고 군부대를 방문하고 해외 순방까지 하면서 실력자인 양 허세를 부렸다는 내용으로 2주간에 걸쳐 앞 다퉈 대서특필을 쏟아냈다. 결국 장영자 사건은 5공화국에 타격을 입히고 전 대통령의 부도덕성으로 비치면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으로 비화됐다.
여론에 떠밀린 사건은 일파만파 커져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이 직접 지휘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또 검찰의 수사 내용이 전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정치권까지 들썩이게 만든 대형사건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 시점에 전 대통령이 날 청와대로 불렀다. 전 대통령은 “(장영자 사건은) 아무리 조사해도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지만 정치적으로 누군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러니 권 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 있다가 조금 후에 다시 중책을 맡으면 되지 않겠느냐?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하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나왔다. 그런 뒤 다음날 아침 신문 헤드라인에 ‘권정달 총장 사퇴’ 라는 기사가 대문짝같이 실렸다. 내가 민정당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전 내각 사표’라는 제목보다 더 크게 보도됐다.
검찰 수사 결과 장영자는 공영토건에 돈을 빌려주고 어음을 받았다. 장씨는 공영토건이 10억 원을 빌려가서 한 달 뒤에 못 갚으면 20억 원짜리 어음으로 다시 받아냈다. 이런 식으로 한 달 만에 100% 이율을 매겼던 것이다.
공영토건은 그 다음 달에도 갚지 못해 40억 원짜리 어음으로 바꿔줘야 했다. 장영자는 매달 곱으로 불어난 이 어음을 사채시장에 돌렸다. 이 사기 행각으로 피해를 본 공영토건과 일신제강 등의 기업이 도산했다. 조흥은행장과 상업은행장이 구속됐고 금융가에는 거센 사정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공영토건 사장은 내 고향 친구이고, 감사는 사장의 매부로서 나와는 초중고를 같이 다닌 동기동창생이었다. 감사가 구속되면서 내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권정달 총장은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기사가 계속 보도됐지만 ‘없다’는 부정이 오히려 숨겨진 내막이 있는 것처럼 둔갑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나는 이 사건으로 민정당 사무총장에서 물러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배후에는 날 끌어내리려던 특정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日야쿠자 보스 양원석의 모국 충성
보안사 시절로 돌아가 정보국장으로 있을 때 흥미로운 일은 일본의 야쿠자 단체를 인수해 운용했던 적이 있다. 겉으로는 ‘아시아민족동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일본의 야나가와구미(柳川組)라로 불리며 주로 일본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야쿠자 조직이었다.
일본에서 이 조직을 다룬 ‘야나가와구미의 전투’라는 책이 발행돼 많이 팔리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울 때에 ‘호랑이가 온다’고 하면 그치지 않아도 ‘야나가와구미가 온다’고 하면 울던 애들이 뚝 그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박종규 전 경호실장은 이런 단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끔 일본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해결사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 단체를 정보국이 인수해서 관계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박종규 실장을 통해 야쿠자 조직 보스를 만났다. 이 조직의 보스는 양원석이라는 재일교포로 60대 초반 나이에 백발인데도 체격이 건장해 보였다.
이후 그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면 박 실장과 함께 인사동 일대 요정에서 일본 정치 사회의 실상에 대해 듣는 술자리를 가졌다. 아시아민족동맹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해서 각국에 지부를 두고 운용할 정도로 재력도 상당했다. 제5공화국이 탄생한 이후 양원석 씨와 ‘산오’라고 부르던 일본 스모선수 등 아시아민족동맹에 참여하고 있던 많은 단원들은 한국을 위해 투철한 후원정신을 갖고 있었고 언제라도 몸을 던져서 보답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뒤에 내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후버연구소에서 초빙교수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본 오사카 시를 방문했다가 양원석 씨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그 후에 양씨는 눈의 동공에 암이 와서 고생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재일교포로서 야쿠자 보스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지만 모국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누구 못지않게 뜨거웠던 사람이었다.
일본發 북한 남침설 첩보에 긴장 조성
1980년 봄. 일본의 내각조사실로부터 ‘한국의 정세가 혼란하기 때문에 북한이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중앙정보부 제2차장 김영선 장군이 일요일인데도 “급하게 보고할 사항이 있다”며 보안사령부 각 처장을 소집해 보고했다.
일본 정보기관으로부터 흘러나온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보고였다. 북한이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남한의 어수선한 비상시국을 오판해 남침할 수 있다는 첩보였다. 이 보고를 듣고 여러 가지 대책을 논의했다. 먼저 일본발 첩보의 신빙성을 재차 확인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대비 태세를 유지하며 바짝 긴장했다.
첩보라는 것은 항상 확인 과정을 거쳐 분석이 끝난 뒤에 정보로서 신뢰성을 가질 때에만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는 실행 단계로 돌입한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 정보는 예외로 분류한다.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하고 최우선적으로 완벽한 대비 체제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더욱 예민해지고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일본은 총리 산하의 내각조사실이 우리의 국가정보원과 같은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첩보라고 보고 백방으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일본에 정통한 우리 정보요원들이 파견돼 있어 깊숙한 첩보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에 담당 공사를 비롯해 빠르게 확인 작업을 한 결과,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여러 날 초긴장 상태에서 대북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kds@ilyoseoul.co.kr
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