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웬만한 회사들은 한 번씩 다 나오더라고요.” “정부가 바뀌어서 그렇다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요.”
최근 뉴스를 보는 일반 국민들의 고개가 갸우뚱한다. 과연 대기업 회장들이 요즘 들어 집중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새 정부의 재계 길들이기와 세원 확보가 맞물린 작품인지 알 수 없어서다. 국내 유수 기업의 총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잡혀가거나 물러나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현황을 들여다 봤다.
잡혀가거나 물러나거나…숨죽인 오너들은 은신 중
“묵혀뒀던 옛일은 정권 초 끄집어내야 제 맛?”
회삿돈 횡령ㆍ배임은 약과…제 돈 챙기려 사기까지
“어떻게든 감옥 밖으로…” 정형화된 코스 밟아 눈총
대기업 총수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회장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SKㆍCJ 등 굵직한 대기업 오너들이 감옥에 갔거나 형집행정지 중이다. 또 퇴진 압력에 못 이겨 물러났거나 곧 사퇴가 예상되는 회장들도 STXㆍ포스코ㆍKT 등 부지기수다.
금융권 역시 산은금융지주를 시작으로 우리ㆍKBㆍ농협ㆍBS금융지주가 차례로 수장을 갈아치웠다. 게다가 강도 높은 세무조사로 긴장한 기업들은 앞서 언급한 곳들을 제외하더라도 현대차ㆍ롯데ㆍ효성 등 여전히 넘쳐나는 형국이다.
정권 초 수장들의 수난시대
이처럼 회장들의 숨죽이기가 극에 달하는 상황에서 구자원 LIG그룹 회장이 마침내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구 회장에게 지난 13일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구 회장의 장남이자 전 LIG대표인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에게는 징역 8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구 회장 등이) 분식회계를 저질러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저해하고 주주와 채권자 등에게 예측 불가능한 손해를 입혔다”면서 “회생절차를 계획하고도 담보주식 회수를 위해 기업어음을 발행하고 LIG건설의 자금을 조달한 행위는 비난 받을 가능성이 높고 죄질이 불량하다”고 밝혔다.
구 회장 일가는 계열사가 부실에 처한 것을 알면서도 2011년 2150억 원대의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수많은 투자자들을 울렸다. LIG그룹이 LIG건설 채권자에게 담보로 제공했던 계열사 주식을 회수할 목적으로 사기성 CP를 부정발행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들은 정상적인 투자금 상환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은폐한 채 CP를 남발함으로써 그 피해를 투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겼다. 구 회장 일가의 범행으로 피해를 본 투자자는 800명가량으로 적게는 1000만 원에서 많게는 1050억 원까지 약 3400억 원 규모다.
투자자들의 항의와 소송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구 회장 등은 LIG건설의 CP는 계열사의 문제로 그룹과는 상관이 없다며 버젓이 기업을 경영해 왔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구 회장 역시 먼저 수감된 회장들을 따라 수의를 입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비자금은 기본인데…왜 이제 와서?”
이미 구속돼 있는 회장들도 전부 얌전하게 수감돼 있는 것은 아니다. 형집행정지로 감옥을 나와 병원에 가는 것이 거의 코스처럼 정형화돼 있기 때문이다. 탈세ㆍ횡령ㆍ배임 등 혐의로 지난 7월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그 예다.
앞서 2008년 이 회장은 차명재산이 수천억 원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또 2010년에는 이 회장이 비자금으로 70억 원 상당의 CJ 주식을 사들인 것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요하던 CJ에 본격적인 칼날이 떨어진 것은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다. 묵혀둔 옛일을 다시 재수사해 죄를 물은 것이다. 재계에서는 “첫 타깃이 된 기업이 CJ였을 뿐”이라는 말이 돌면서 다음 차례를 점치기도 했다.
한편 이 회장 주변에서는 구속 직전부터 건강이 나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이 회장은 구속 직후 만성신부전증과 CMT(Charcot-Marie-Tooth Disease, 샤르코-마리-투스 질환)로 불리는 유전병을 앓고 있음을 공개했다.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형집행정지를 이해받기 원했던 셈이다.
결국 이 회장은 지난달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해 부인의 신장을 이식받았으나 여론은 여전히 싸늘했다. 법원의 집행정지 결정이 나기도 전에 이미 이 회장의 수술 일정이 잡혀 있었던 사실이 알려져서다. ‘꾀병’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일반인과 다른 ‘로열패밀리’ 대우에 국민들은 씁쓸함을 맛볼 뿐이었다.
먼저 수감됐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구속집행정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재 김 회장은 감옥이 아닌 서울 종로구 가회동 주거지와 서울대병원, 순천향대병원 등 일부 병원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수천억 원대의 배임 혐의를 받은 김 회장은 지난해 8월 구속된 이후 당뇨 및 우울증,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감옥 밖으로 나갔다. 벌써 세 번이나 구속집행정지가 연장돼 앞으로도 계속 외부에서 치료할 것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역시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도 마찬가지다. 이 전 회장은 간암 치료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거듭하다 지난해 6월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했다. 개인의 건강은 어쩔 수 없는 사안이지만 시기상으로 보면 ‘아프니까 재벌이다’라는 풍자가 나올 법하다.
반면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하는 회장도 눈에 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연초인 지난 1월 구속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형집행정지 없이 감옥에 있는 상태다. 최 회장은 수백억 원대의 계열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지난 3일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징역 6년을 구형받아 복역 기간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못다한 임기, 쓸쓸한 퇴장
감옥까지는 아니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로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많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지난 9일 채권단의 강경한 방침으로 총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강 회장은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채권단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강 회장이 자신의 회사를 나가게 된 것은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강 회장을 곱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이미 채권단은 산은의 주도로 강 회장의 조선해양 경영권을 박탈한 바 있다. 산은이 국책은행인 만큼 새 정부가 강 회장을 탐탁잖게 여긴다는 설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포스코와 KT는 아직 수장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현재 정준양 포스코 회장과 이석채 KT 회장은 모두 퇴임설을 부인한다. 그러나 정계와 재계에서는 정부의 압력으로 미뤄볼 때 이들의 퇴임은 시간문제라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본래 포스코와 KT는 과거 정부가 지분을 가진 공기업이었다. 그런 탓에 양 기업은 민간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좀처럼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재임 중인 수장들 역시 이전 정부의 입김을 등에 업고 전임 수장들을 밀어내다시피 하며 올라온 터다.
이외에도 강도 높은 세무조사로 총수 자리를 위협받는 기업들이 있다. 현대차는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세무조사로 재계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앞서 2007년 세무조사가 마지막이었던 현대차는 통상적인 정기 세무조사임에도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또 롯데그룹의 경우 롯데호텔 세무조사가 끝난 지 한달 만인 지난 7월 다시금 롯데쇼핑에 칼날이 이어졌다. 효성그룹은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세무조사가 최근 조세범칙조사로 전환되면서 조석래 효성 회장의 구속이 예견되고 있다.
오너 아니라도 칼날 맞아
금융권도 얼마 전까지 연일 금융사 수장들의 중도사퇴가 이어지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비록 오너는 아니지만 최고경영자가 정부의 압력 등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은 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특히 금융지주사들의 경우 산은ㆍ우리ㆍKBㆍ농협금융지주 수장의 물갈이에 이어 BS금융지주 회장에 대한 사임압력을 정점으로 관치금융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독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권에서 수장 교체 칼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상적으로는 ‘새 술은 새 부대에’를 강조하며 인적쇄신 차원이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지만 그 비밀은 따로 있다.
금융 부문은 아무리 민간 자본으로 설립됐더라도 특성상 정책과 연계되는 등 일정한 공공성을 띠기 마련이다. 일각에서는 금융을 잡아야 정책이 편해지는 만큼 이미 관치금융이 국내 금융의 고질병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초반에 흔들기를 해놓아야 길들이기가 편해진다”는 무서운 농담도 오고 간다.
그중에서도 정부가 지분을 가진 국책은행이나 금융공기업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 수장의 임기는 두말없이 자동종료된다. 꼭 정부 지분이 없더라도 주요 금융지주사들은 이미 4대 천왕의 전례를 겪은 만큼 교체가 당연시됐다.
이번에는 BS금융의 사례처럼 중앙도 모자라 지역 금융지주사까지 금융당국의 압력에 시달리는 행태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물론 일부 금융지주사는 아예 관료 출신을 적극적으로 기용함으로써 칼날을 피하기도 했다.
이처럼 금융지주사들이 국책ㆍ민간, 중앙ㆍ지방을 가리지 않고 정부 입김에 휘둘리면 지주사 회장은 물론 애꿎은 계열사 수장들도 목이 간질간질해진다. 대부분의 금융지주사는 은행 외에도 증권ㆍ보험ㆍ카드 등 여러 계열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상반기에도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 수장들은 임기가 다하기도 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중도사임 의사를 밝혔다. 모기업인 지주사 회장의 거취가 사퇴로 가닥이 잡힌 마당에 실적이 좋고 나쁘고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아예 계열사 전체 대표들이 일괄사표를 낸 뒤 신임 회장에게 재신임을 묻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는 어떤 기업이든 몸 사리고 숨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정권과 연계된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가야 제대로 된 기업 활동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
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