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박시은 기자] 올 하반기 채용이 본격화된 가운데 기업들이 경쟁사와 필기시험 일정을 같은 날짜로 지정하는 관행을 굳히고 있어 구직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대개 인재 선점, 자존심 싸움이 그 이유인데 특히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금융공기업들이 경쟁사 채용 견제 분위기 조장에 앞장서 있다. 이번 하반기에도 금융공기업들은 일제히 입사 필기시험 날짜를 다음달 19일로 잇달아 발표한 상태다. 이에 지원자들은 “선택권 침해”라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라 토로하고 있다.
기업 간 자존심 싸움에 피멍 드는 구직자들 ‘울상’
대다수 대기업 채용 과정에는 인·적성검사 등의 필기시험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기업들이 필기시험 일정을 채용시장에서까지 타사와 경쟁을 벌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번 하반기 채용에서도 몇몇 기업을 포함해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산업은행 등 금융권 대부분이 다음달 19일을 대졸 신입 공채 필기시험 날로 잇달아 발표했다.
이 같은 현상은 2000년대 초반 금융공기업들이 인위적으로 시험 날짜를 맞추면서 시작됐다. 공들여 채용한 인재를 뺏기는 일을 방지하려는 것. 이를 두고 금융권 안팎에서는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 간 자존심 싸움이 연관돼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2000년대 중반 이러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매년 논란을 일으켜 왔지만 금융사들은 “인위적인 지정이 아니다”며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이로 인해 재계 전반으로까지 경쟁사와 채용 일정 맞추기 분위기는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지난해 A매치 데이는 10월 20일로 한국은행, 금감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정책금융공사, 한국거래소, GS칼텍스, 에쓰오일, SK, KT, CJ 등 30개 기업이 같은 날 입사시험을 치른바 있다. 2010년, 2011년에도 역시 약 30개의 주요기업이 A매치 데이에 참가한 바 있다.
금융권은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른바 ‘꿈의 직장’이다. ‘사오정(사십오세에 정년)’이 늘면서 금융권의 안전성과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로 인해 매년 응시생만 수만 명이 몰리고 있다.
그 때문에 구직자들 사이에서는 축구 국가대표팀 간 경기가 열리는 날을 말하는 ‘A매치 데이(Day)’가 입사 필기시험 일정이 겹치는 날을 의미하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번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고 있는 A씨(25·인하대)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단 한 곳에 올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다”며 “기업들의 이기심에 지원자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고 말했다.
서류전형을 모두 통과했다 하더라도 A매치 데이 때 선택한 업체에서 떨어지면 구직자들은 또다시 다음 공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가고 싶은 기업에 한 번이라도 더 응시해보고 싶은 취업 준비생들에게 도전의 기회가 차단된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취업 준비생들은 ‘한국은행은 경제학, 금융감독원은 경영학이 강해야 한다’는 등 해당 기업이 선호하는 스펙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치열한 눈치작전을 펼치고 있다.
“불필요한 시간·비용 투자 방지” vs “비겁한 변명”
올 상반기 금융권 취업에 성공한 B씨(28)는 “대입 수능시험도 아니고 수년간 취업을 준비해온 것들이 단 하루에 끝나는 경험을 했을 땐 눈앞이 깜깜했었다”며 “다른 곳으로 시험을 치러 가야 했나 하는 후회와 고민을 반복했던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지난 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일반 대기업들도 경쟁사들과 같은 날짜에 시험 날짜를 잡는 등 채용 시장에서조차 무한경쟁에 돌입해 취업 준비생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4월에는 재계 맞수인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적성검사를 같은 날 시행해 지원자들에게 소위 ‘멘붕(멘탈붕괴)’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번 하반기에는 지난해 ‘A매치 데이’에 동참했던 GS와 S-Oil의 필기시험이 다음달 20일로 같은 날 예정돼 있다. 이 밖에 SK, KT, CJ 등은 구체적인 일정이 미정인 상태지만 이 두 기업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으로 예측된다.
한 관계자는 “경쟁사와 입사 필기시험 일정이 겹쳤던 것은 일부러 그랬던 것”이라며 “자존심 싸움이다”고 털어놨다. 이어 “회사로서는 채용 과정에 필요한 비용도 줄이고, 회사로 오지 않을 사람을 미리 가려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금융권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업 간에도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어 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인재를 잃을 뿐만 아니라 결원으로 발생한 공백을 메우려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필요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금감원 관계자 역시 “일부 취업준비생들은 필기시험 날짜가 겹쳐 선택의 기회를 제한받는다고 불평하지만 기업으로서는 결원이 생기는 문제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취업준비생으로서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거세다. 취업준비생 C씨(23·동덕여대)는 “요즘 같은 취업난과 경제 침체기에 어느 누가 단 한곳의 입사 준비만 하겠냐”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일들이 늘어나니 취업에 대한 압박만 커진다”고 말했다.
한편, 한화는 국내 기업 최초로 인·적성 검사를 폐지하고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인·적성검사 시험 날짜 지정 논란이 거세진 가운데 한화의 움직임이 공채 시장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