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장거리 미사일 등 대량살상 무기의 해외 판매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고 있는데다 핵개발에 따른 엄청난 소요재원을 어디서 끌어다 쓰고 있느냐 하는 점도 비자금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케 해준다. 여기에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성사과정에서 현대를 거쳐 북한에 들어간 5억 달러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 위원장이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막대한 비자금을 소유하고 있는 지도자란 얘기다.북한 언론들은 남한 내에서 각종 비자금 사건이나 뇌물 사건이 터질 경우 ‘남조선 사회의 부패상’운운하며 비난한다. 또 주민들에게 “남조선에서 이번에 드러난 비자금은 속도국수(라면)상자에 담으면 얼마의 분량”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썩어빠진 자본주의’라며 대남 비난의 호재로 삼는다. 하지만 김정일 체제 내부에서의 비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1994년7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고스란히 김정일 위원장에게 넘어온 북한 정권의 비자금은 그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것으로 우리 정보당국은 보고 있다. 비자금의 규모가 국가예산의 20~30%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지금까지 김 위원장의 개인금고에 대해 가장 구체적인 공개진술을 한 사람은 강성산 전 북한총리의 사위로 알려진 강명도씨다. 90년대 중반 한국으로 망명한 강씨는 우리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주석궁 직할 외화벌이 회사인 능라888 무역의 부사장이었다. 강씨는 귀순 직후 우리 정보당국에 “스위스 은행내의 김정일 비밀계좌에는 20억 달러 상당의 비자금이 예치돼 있다”고 밝혔다. 이런 규모의 비자금은 여전히 비밀계좌에서 잠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예금 자체가 북한 정권 붕괴나 해외 도피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자금이란 점에서 평시에 이를 사용하거나 손을 댈 필요가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자금의 관리를 위해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심복인 이철을 스위스 주재 대사로 일하게 하면서 계좌를 관리해 왔다는 것은 북한의 핵심 권력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란 얘기도 있다. 북한군 고위 장교 출신 탈북자인 최주활씨는 “이철은 본명이 이수영으로 김정일의 사생활을 보좌하는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김정일 비자금은 사용 목적에 따라 크게 통치성 자금과 향락성 자금으로 나뉜다. 통치성 자금은 김정일 위원장의 이른바 광폭정치를 위해 주로 쓰인다.
통 큰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대형 건축물을 짓는다거나 핵심 권력층의 환심을 사기 위한 데 사용하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자기의 맘에 드는 예술인이나 당·정·군의 간부들에게 호화주택이나 수입 가전제품을 집단적으로 선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군단장급 이상의 핵심 군 장성들에게 신형 벤츠 승용차를 선물한다거나 대동강변에 인민무력부 간부들이 살 수 있는 특별주택을 지어주는 일도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일종의 통치 비자금을 이용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향략성 자금의 경우 당·정·군 간부들과의 비밀파티 등에 쓰이는 고급 식자재와 술 등을 조달하는데 쓰이고 있다. 또 여기에 참가하는 관계자나 이른바 기쁨조라고 분류되는 여성들에게 입막음이나 대가로 지불된다. 김 위원장 가족의 외유나 해외체류 비용에도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관계당국은 보고 있다.
김 위원장은 국내 비자금의 관리를 위해 전담부서까지 두고 있다. 핵심측근으로 짜여진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39호실’이 바로 그 곳이다. 39호실은 김정일의 비자금 확보와 운용을 위해 대성무역총회사와 같이 수익성이 높은 알토란 기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이를 통해 금은 같은 귀금속은 물론 송이버섯 등 주요 수출품을 독점적으로 관장한다.또 원활한 자금 조성을 위해 해외에 독자적인 금융기관까지 진출시켜 놓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북한 현지법인인 금성은행과 마카오의 조선광명성대표부가 대표적이다. 오스트리아 재무부의 특별감사를 받은 금성은행은 서유럽에 개설된 북한 유일의 은행이다.
이 은행은 조선노동당 소속 대성은행이 빈에 설립한 현지법인으로 자산규모가 1,500만유로이며 주로 환전업무와 유럽에 진출한 북한 기업의 재정지원 등의 업무를 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명성대표부는 경제관련 직원보다 대외첩보기관인 당중앙위 조사부와 김정일의 경호를 맡아보는 호위사령부, 비밀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 등의 요원들이 더 많다. 이들은 다른 국가에서 발생한 북한의 외화수입도 현지법인을 통해 세탁한 뒤 일정부분을 스위스 계좌로 예치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회사 이름인 광명성 자체가 김정일을 우상화해 부르는 호칭이란 점에서 이 기관의 성격이 드러난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은 북한 내에서는 이른바 ‘주석폰트’라고 불린다. 김정일은 국가주석 자리를 물려받지 않았으나 과거 김일성 주석 때부터 일컬어진대로 주석폰트로 통칭된다.
‘폰트’란 용어는 북한에서는 일정한 목적에 쓸 자금이나 물건을 말한다. 주석폰트는 과거 김일성이 직접 특정 경제분야의 부흥이나 지원을 위해 특별히 대주는 자금의 성격이었지만 차츰 규모가 불어나면서 통치자금으로 자리했다고 한다. 주석폰트의 운용이 원활치 못할 경우에 대비한 ‘주석예비폰트’의 존재도 눈길을 끈다. 이는 사전에 계획되지 못했거나 돌발적으로 필요해진 새로운 사업이나 사안에 들어가는 일종의 예비 비자금인 셈이다.아무튼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서는 북한체제의 상속자로서 막대한 자금을 손아귀에 넣고 당·정·군에 대한 통치의 고삐로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이 더욱 수위를 높이면서 비자금의 원활한 운용에도 비상이 걸렸을 것이란 게 우리 정보기관의 판단이다.
미사일 등 돈벌이가 되는 무기체계의 해외수출 길이 사실상 막힌데다 해외에서의 자금흐름도 철저히 차단되거나 감시받고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자본주의 풍조를 바탕으로 한 북한체제 내부의 개혁개방 바람 속에서 북한 고위층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유도하려면 더욱 많은 통치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게다가 집권 2기 부시행정부의 대북 압박은 북한을 더욱 숨막히게 할 것일 뻔한 상황이다. 체제붕괴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상황에서 스위스 계좌의 김정일 비자금이 언제 어떤 식으로 베일을 벗게 될지 주목된다.
이현진 북한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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