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스물아홉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본가, 새마을식당, 한신포차, 해물떡찜0410, 홍콩반점0410, 한국본갈비, 알파갈매기살 등 많은 브랜드를 오픈해 모두 대박집으로 만든 음식 프랜차이즈 ‘더본코리아’다.
백종원 대표가 집을 짓고 손을 터니 17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의 빚만 남았다. 이에 백 대표는 우선 장사가 잘되던 고깃집 원대포를 보증금만 받고 팔았다. 쌈밥집 역시 팔아야 했지만 빚을 감당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고민 끝에 이를 잘 운영해 이자라도 내야겠다 싶어 남겨뒀다.
이처럼 빈털터리가 된 채 예전의 자리인 쌈밥집으로 돌아와보니, 쌈밥집은 어느새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적자를 보는 식당이 돼 있었다. 백 대표는 갑자기 머리가 띵 해지면서 ‘여기서 내 인생은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백 대표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별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너무나 막막했지만 도를 닦는 마음으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심했다.
죽은 가게를 살리는 일은 맨땅에 헤딩하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IMF 때문에 소비 심리가 극도로 위축됐다. 게다가 계절은 겨울이라 여름 음식으로 인식되던 쌈밥 장사는 더욱 힘들었다. 결국 백 대표는 부산 아줌마와 백 대표 그리고 단 두 명의 직원을 남겨둔 채 과감하게 직원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쌈밥집으로 빚쟁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 식당까지 정리하면 나는 깨끗이 망하는 거고, 당신들 역시 빚을 못 받습니다. 이 쌈밥집이라도 해서 빚을 갚을 테니, 이 식당만은 남겨주십시오.”
백 대표의 진심이 통했던지 빚쟁이들은 그대로 물러갔다. 이후 백 대표는 어음 빚은 대강 막고, 사채 빚부터 조금씩 갚기 시작했다. 방법이라곤 쌈밥집에 목숨을 거는 것뿐이었다. 식당으로 손님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며 식당 운영에 매진했다. 하지만 하루 벌어 일수까지 막아야하는 상황에 전단지를 신문에 끼워 돌릴 비용이 없었다. 결국 백 대표는 새벽마다 꽁꽁 언 길을 달리며 집집마다, 차마다 전단지를 꽂으러 다녔다.
쌈밥집 사장으로 새출발
백 대표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단지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은 겨우 2~3명뿐이었다. 때문에 새벽녘에 돌린 전단지를 들고 가게로 오는 손님을 보면 백 대표는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너무나 반가워서 자신도 모르게 막 뛰어나가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리 앉으세요” 하며 무의식중에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을 대하듯 손님을 맞이했다.
하지만 백 대표에게 넉살을 떠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무역회사 건설회사 사장님이라는 직함으로 잘나갈 시절에 단골이었던 술집의 직원이 쌈밥집에 방문할 때면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해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전단지를 돌리고 손님을 기다리며 보낸 지 1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어떤 깨달음 하나가 백 대표의 머릿속을 휙 스쳐갔다.
‘내가 정말 미쳤구나. 나는 보통 인간 백종원이야. 손님이 들어오면 그저 반갑고 기분이 좋아지는 식당 주인일 뿐이라고. 그래 솔직하게 살자. 창피할 게 뭐 있어? 내가 지금 뭘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그 후 백 대표 얼굴에 깔린 가면은 싹 벗겨졌다. 단골 술집 사람들이 오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 하던 사업 망했잖아” 라며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식당은 슬슬 자리가 잡혀갔다.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였다. 백 대표는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 심야 영업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12시가 넘어서도 사람들이 쌈밥을 먹으러 올까?’
처음 몇 달 동안은 고작 하루 2~3팀 정도만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아주 비참한 숫자였다. 그래도 아침 11시에 출근해서 새벽까지 장사를 했고, 새벽 4시쯤에는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그리고 오전 7시 정도에 가게 문을 닫고 잠깐 눈을 붙이는 식의 강행군을 계속했다.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생활하던 아주 고단한 나날이었다.
백 대표는 ‘진짜 고생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매일 밤 아픈 몸을 두들기며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차츰 식당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후배의 제안으로 한신포차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IMF라는 특이한 상황과 맞아떨어져 깨끗하고 대형화된 포장마차에 매일 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을이 되면서 점차 한신포차의 수입이 치솟았고, 그 덕택에 점차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도르르 말린 삼겹살 인기
원조쌈밥집 최고의 히트 메뉴이자 대박집이 되게 해준 일등 공신은 ‘대패삼겹살’이다. 불판에 구워 쌈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한 대패삼겹살이 만들어진 건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백 대표는 정육 시장에서 삼겹살을 사다가 직접 썰면 원가도 절약하고, 또 고기를 썰면서 나온 자투리라도 쌈장이나 된장찌개에 넣어 활용할 요량으로 아예 고기 써는 기계를 구입하기로 했다. 어차피 고기만 잘 썰리면 되니 300~400만 원씩이나 하는 비싼 기계를 살 필요가 있나 싶어 100만 원대의 싼 기계를 구입했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와서 실험을 해보니 문제가 생겼다. 햄 종류를 써는 기계였는지 삼겹살이 반듯하게 썰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도르르 말리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걸 어쩌나. 백 대표는 동그랗게 말린 고기를 하나하나 손으로 펴서 접시에 담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써는 것보다 접시에 담아내는 게 일이었다. 정말이지 싼 기계를 구입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발등이라도 찍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문이 밀려드는 바람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 말린 고기를 접시에 소복하게 담아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손님들이 너무나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게 아닌가.
당시 원조쌈밥집 근처에는 이미 유명한 삼겹살집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백 대표 또한 대학 시절부터 즐겨 찾았던 잘나가는 고깃집들이었다.
“그래, 어차피 똑같은 삼겹살로는 그 식당들을 못 이긴다. 차라리 지금보다 더 얇게 더 말리도록 썰어보자.”
동그랗게 말린 삼겹살을 기술적으로 소복하게 담아내니 당연히 손님들의 시선을 끌게 됐다. 대패로 민 것처럼 말린다고 해서 ‘대패삼겹살’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대패삼겹살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양뿐만 아니라 맛으로도 대박이 났다. 보통 삼겹살은 쌈에 싸서 입에 넣고 씹다 보면 나중에는 질긴 고기만 남게 마련인데, 이 대패삼겹살은 얇기 때문에 쌈에 싸서 먹기에 딱 좋았다.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너도나도 대패삼겹살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백 대표는 굳이 따라하지 못하게 할 것은 없지만 누가 대패삼겹살을 개발했는지에 대한 것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대패삼겹살에 대해 특허를 내고 상표 등록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특이한 음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백 대표는 모양이 특이한 삼겹살에서 더 나아가 맛까지 특이한 삼겹살을 개발하고 싶었다. 특이한 맛의 삼겹살이라고 해도 고기 자체에 변화를 줄 수 없으니 곁들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그러다 백 대표는 문득 찍어 먹는 소스를 특이하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삼겹살은 참기름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양념을 섞어가며 소스를 연구했다.
결국 백 대표 입맛에 딱 맞는 달달하면서도 새콤한 간장 소스가 만들어졌다. 고기를 찍어 먹어보니 역시 맛이 괜찮았고, 손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다만 문제는 구운 고기를 2~3점 찍어 먹다 보면 소스에 지저분하게 기름이 뜬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날마다 고민하느라 백 대표는 자면서도 고기 구워 먹는 꿈을 꿀 정도였다. 한번은 혼자 앉아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삼겹살을 구워서 소스에 찍어 먹는 게 아니라 소스에다 삼겹살을 찍어 구워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냐, 이게 아니지, 아니야’ 하고 도리질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고민했으면 그런 꿈을 다 꿀까 싶었다.
그런데 다시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듯싶었다.
‘그래, 소스에 찍어 굽는 것도 괜찮겠어.’
새벽 4시. 백 대표는 식당에 혼자 나와 앉아서 정말 꿈에서처럼 소스에다 얇게 썰린 대패삼겹살을 찍은 뒤에 구워보았다. 구운 고기를 소스에 찍어 먹는 것보다 맛이 좋았다.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고, 더 감칠맛 나고 고소했다.
‘그래, 아예 큰 대접에 소스를 담고 대패삼겹살을 거기에 담갔다가 구워먹게 해야겠다.’
그런데 이 맛 좋은 대패삼겹살을 시키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백 대표의 예상으로는 쌈밥집에 오는 손님 중 80퍼센트 이상이 대패삼겹살을 주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소스에 찍어서 구워 먹는 대패삼겹살 위주로 판매가 돼야 하는데 아직도 그냥 삼겹살을 찾는 손님이 더 많았다.
다른 식당과 차별화를 둬야 했던 백 대표는 주문을 받으면서 “대패삼겹살을 시키시면 나중에 밥을 볶아드립니다”라며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리고 대패삼겹살을 주문한 테이블은 고기를 먹고 나면 직접 가위를 들고 와 고기와 파무침을 잘게 잘라 신 김치를 넣고 밥을 볶아줬다. 당연히 손님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한번 먹어보면 일반 삼겹살보다 월등히 좋은 맛 덕분에 삼겹살보다 주문이 많아졌다. 그리고 백 대표의 예감대로 히트 메뉴로 떠올랐다. 물론 가위질을 해대느라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손에 물집이 잡히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말 신명이 났지만 그만큼 힘들었다.
3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손님이 “여기 대패삼겹살이 아주 유명해. 맛있다니까”라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한마디에 백 대표는 온몸에 전기가 짜릿하게 흘렀다. 그 후 백 대표는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고 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걸 최고의 보람으로 여기게 됐다. 드디어 백 대표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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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무조건 성공하는 작은식당 中 │백종원 지음│서울문학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