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접할 수 있는 만화로 이한열 열사 뜻 기려”
[일요서울|조아라 기자] 1987년 6월 9일. 젊은 청년 이한열은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머리를 맞았다. 한 달간 사경을 헤매던 그는 7월 5일 스물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한열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26년 후인 2013년. 이한열 열사의 사망 이후 꾸준히 추모사업을 이어오던 이한열기념사업회가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 열사의 뜻을 기리기 시작했다. [일요서울]이 이한열기념사업회 이경란 사무국장을 만나봤다.
신촌 로터리에는 순백의 기념관이 하나 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가 1991년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터를 마련한 ‘이한열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몇 차례 이전 끝에 지난 2000년이 돼서야 현재의 자리에 겨우 온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시민성금으로 건물이 지어지기까지는 4년이 더 걸렸다. 이한열 기념관 전시실의 문이 열린 건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난 2005년 6월 9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념관을 국가 혹은 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에서 지어준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이곳은 국내 유일의 민간 설립 기념관이다. 때문에 어떠한 국가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어머님이 항상 말씀하세요. 땅값은 이한열 열사의 목숨 값이고 건물은 사람들의 마음이라고요.”
이한열기념사업회는 1987년 이한열 열사가 세상을 떠난 후 만들어진 연세대 민주동문회를 전신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민주동문회는 이후 각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이경란 사무국장은 이때부터 사업회와 인연을 맺었다. 연세대 85학번인 이 사무국장도 1987년 당시 이 열사와 함께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이한열이라는 인물과 그의 뜻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1000여명이 이한열 기념관을 다녀가지만 이곳을 찾는 이는 대부분 초등학생 관람객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하는 민주나래 사업의 일환에서다. 민주나래는 이한열 기념관, 국회 또는 김대중 도서관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안타깝게도 학생들을 제외하면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 수는 많지 않은 편이다.
“민족민주열사추모회에 모셔진 480분의 열사 중에서 박종철 열사 전시실을 제외하면 기념관이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더라고요.(박종철 열사 기념 전시실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인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내에 있다) 민주열사들을 기념할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하다보니 우리가 그분들까지 기릴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앞으로는 기념관을 알리고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활동을 더욱 활발히 진행하려고 해요.”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이 열사의 유품 전시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이한열만화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을 하고 전시회도 열고 있다. 이 상은 이 열사가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던 것에서 착안됐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만화는 ‘B급 문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이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건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전태일 문학상, 만해 문학상처럼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분을 기리기 위한 상이 문학 분야에는 많이 있어요. 하지만 민간에서 만화로 상을 주는 경우는 드물더라고요.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한열 만화상’은 박재동 화백, 장진영 교수, 박건웅 만화가 등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작품 구성력, 스토리의 힘, 기술적 표현력 등을 평가해 최종 수상작이 선정됐다. 올해는 10명의 작가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작은 오는 27일까지 이한열 기념관에서 ‘2013 이한열 만화사랑 展’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 수상작 이외에도 박건웅, 박순찬, 박재동, 최규석, 서나래 등 기성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한하지 않기 위해 주제도 자유였던 만큼 ‘이한열 만화상’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한열 장학회도 눈에 띄는 활동 중 하나다. 특히 이 장학회는 한국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로 손꼽힌다. 2008년부터 이어온 장학회는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장학회는 1988년도에 총학생회를 했던 친구들끼리 의기투합해서 시작됐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이한열을 모른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한열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자고 의견을 모았죠. 보통 장학금은 기금을 조성해 그 이자로 운영되는데 그렇게 했다가는 시작도 못하고 끝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한 달에 1만원씩 후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장학회를 운영하게 됐어요.”
알알이 모인 장학금은 2009년 첫 수여 이후 현재까지 8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금액으로는 1억 원이 넘었다. 민주열사의 이름으로 조성된 장학금인 만큼 장학생 선정도 남다르다. 가장 먼저 고려되는 대상은 역시 민주화에 기여한 자의 가족들이다.
“고문 피해자나 노동운동을 하느라고 가족과 생계를 돌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의 자녀들 역시 마음의 상처가 굉장히 많고요. 그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부모님의 삶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원망스럽기도 하다고요.”
민주화에 대한 인식이 옅어지고 있지만 아직 우리사회에는 이한열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지난 7월에 진행됐던 이한열 열사 유품 보존 시설 마련을 위한 모금이 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모금액은 이 열사가 최루탄 피격 당시 입었던 파란색 티셔츠와 러닝셔츠, 밑바닥이 삭아 절반 이상 부스러진 운동화, 이 열사의 시신을 압수할 것이 명시된 압수수색 구속영장 등 관련 유품을 보존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또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는 전태일 열사의 유품도 함께 보존하는 데 쓰일 계획이다.
“민주화 열사의 유품은 국가에서 보존해야 하는 일이에요. 민간에서 관리를 하더라도 국가의 보다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봐요. 앞으로 이한열기념사업회는 기획전시와 6월항쟁 관련 학술연구, 교육활동도 진행할 예정이에요. 배은심 여사 구술사를 정리할 계획도 있고요.”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