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본코리아 ①]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더본코리아 ①]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9-02 10:09
  • 승인 2013.09.02 10:09
  • 호수 1008
  • 4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조쌈밥집’서 출발… 맛으로 우뚝 서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스물아홉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본가, 새마을식당, 한신포차, 해물떡찜0410, 홍콩반점0410, 한국본갈비, 알파갈매기살 등 많은 브랜드를 오픈해 모두 대박집으로 만든 음식 프랜차이즈 ‘더본코리아’다. 
 

백종원 대표는 군대 시절, 계급이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식당을 관리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백 대표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제대 후에도 ‘계속 식당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직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 뒤, 백 대표는 뜻이 맞는 친구 몇몇과 힘을 합쳐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 근처 부동산에 들러 농담 반, 인사치례 반으로 말을 건넨 한 마디에서 백 대표의 밥 장사길이 시작됐다.
“사장님, 여기 식당 할 만한 자리 없어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간부 식당을 관리했었거든요”라며 한마디를 던진 것이 화근이었던 것. 백 대표의 말을 들은 부동산 사장이 마침 좋은 자리가 하나 났다며 백 대표의 손을 끌고 ‘대구 쌈밥 서울 분점’이라는 식당으로 갔다.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장사가 신통치 않고, 주인에게 사정이 생겨서 식당을 처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식당을 하겠다는 작자가 나타났으니 당장이라도 넘겨버릴 기세였다.
1993년 초, 당시 그 집은 보증금과 권리금을 합해 9000만 원이었다. 금액도 금액이었지만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기에 백 대표는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죄송하지만 사실 제가 지금 이 돈밖에 없어서요”라며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고는 ‘이제야 위기에서 벗어났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음 날 새벽에 부동산 사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가격에 식당을 넘기겠다는 말이었다. 다시 한 번 벗어날 핑계거리를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턱도 없이 계약금 50만 원만 달랑 들고 부동산으로 나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정말 넘기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결국 9000만 원짜리 가게를 단돈 50만 원에 계약하게 됐다. 그리고 겨우겨우 끌어 모은 돈으로 식당을 인수했다. 그렇게 해서 백 대표는 신의 장난처럼 밥장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식당 사장’ 부끄러웠다

식당을 인수한 뒤 백 대표는 제일 먼저 이름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구 쌈밥 서울 분점’ 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식당 이름을 ‘원조쌈밥집’으로 바꾸었다. 쌈장을 시작으로 음식을 하나씩 업그레이드 하다가 연구 끝에 대패삼겹살까지 개발해 히트를 쳤다. 그때 돈을 좀 벌어서 근처에다 ‘원대포’라는 작지 않은 고깃집까지 오픈하게 됐다. 하지만 해물쌈장이 성공을 거둔 것을 기점으로 슬슬 방황의 시기가 다가왔다. 그 당시만 해도 식당을 한다고 하면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고 만만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스물일곱여덟 살에 식당을 시작했으니 젊은 나이에 돈은 벌었지만, 사회에서 인정할 만한 번듯한 일이 아니라는 자격지심에 백 대표의 자존심은 점점 상했다. 
“야, 여기 반찬 더 줘!”
“여기 물 좀 갖다 줘!”
겉으로는 “네네!”하면서 싹싹하게 달려갔지만 반말을 들을 때마다 백 대표는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음식을 파는 게 아니라 손님들 심부름을 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나이 드신 분들이 그러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 또래의 젊은 친구들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정말이지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집안 출신에 부모님께 사랑 받으며 자란 자신이 아니던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도 다녔고,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 생활까지 했다. 그런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남에게 굽실대고 있다는 사실에 백 대표는 그 재미있던 음식 만드는 일도 점점 시들해져 갔다. 그나마 성격이 낙천적인 편이라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백 대표는 아침마다 간이며 쓸개를 꺼내 장롱 속에 넣어두고 식당에 나갔다. 그리고 저녁에 들어와서는 그날 번 돈을 세며 억지로 웃었다. 아직 젊고 혈기 왕성했던 시절이라,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손님에게 “안녕하세요?”하고 겉으로는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너보다 낫다’라는 꽁한 생각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지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피폐해져갔다. 

혼란의 시기 "맘 둘 곳 없었다"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하던 무렵, 백 대표는 미국에서 왔다는 L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는 백 대표의 식당에 와서 자주 밥을 먹곤 했는데, 식당 운영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백 대표에게 충분한 자금력이 좀 있다고 판단한 듯 했다.
L씨는 “백 사장은 이런 데서 썩기는 아까운 데 말이야. 당신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할 타입이야”라며 백 대표에게 칭찬을 아낌없이 보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백 대표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당시 백 대표의 어머니가 큰 누나를 결혼시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하다는 사주가에게 누나의 궁합과 함께 백대표의 사주를 봤었다. 사주가는 “역마살이 있고 집안도 좋은 편이니 무역업을 해야 한다”며 백 대표의 사주 운을 풀었던 것.
당시 슬럼프에 빠져 있던 백 대표는 L씨의 말에 확신을 얻어 ‘우여곡절 끝에 잠시 식당을 하게 된 것이지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다’며 ‘내가 이분을 만나 드디어 무역업을 하게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백 대표는 L씨의 소개로 건축 자재 수입 사업에 뛰어들었다. 먼저 폼 나는 사무실이 필요했다. 커다란 사무실을 얻어 근사하게 인테리어도 하고 사무실 직원도 새로 뽑았다. 백 대표는 이제 뭔가 사업다운 사업을 하는 것 같았다. 새 일을 하면서 자신의 원래 자리를 찾은 듯해 신이 났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 과감하게 발을 뺐어야 했는데 오기가 생긴 백 대표는 갈 때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오히려 한발 더 깊숙이 들여놓았다. 주로 목조 주택과 관련된 자재를 수입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백 대표가 한발을 더 들여놓는 순간 슬슬 우리나라에도 목조 주택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 봐, 그만두지 않길 잘했지. 나는 역시 뭐든 하면 잘돼!’
백 대표가 두 발을 다 담근 목조 주택 사업이 급속히 번창했기 때문에 백 대표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돈도 많이 벌었다. 내친김에 아예 시공 회사까지 차려 일산에 단독 주택 단지를 짓는 욕심까지 부렸다.
이렇게 사업이 잘되자 예전에 식당을 했다는 것도, 아직도 그 식당을 유지한다는 현실이 부끄럽게만 여겨졌다. 건설업계 사람들과 골프를 치고 운전기사가 딸린 큰 차를 타는 자신에게 식당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커다란 한정식집도 아니고 이름도 ‘쌈밥집’인 그 작은 식당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지금이야 쌈밥집이 유명세를 타고 워낙 번창해 다들 알아주지만 그때만 해도 이름 없는 작은 식당에 불과했다. 그래서 남들이 물으면 취미로 큰 한식집을 한다고 둘려댈 정도였다.
그때부터 백 대표는 눈에 띄게 식당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주택 사업이 잘 되고 바빠지자 아예 믿을 만한 친구들을 데려다 카운터에 앉혀 놨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들이 얼마 못 견디고 자꾸만 그만두었다. 알고 보니, 주방장으로 일했던 부산 아주머니가 친구들을 들볶는 것. 그분은 부산에서 사기를 당한 경험도 있고 식당을 시작할 때부터 백 대표와 함께한 분이어서 백 대표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니 백 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 아주머니는 불안해했다. 주방에서 음식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밀고 자꾸만 쳐다보거나, 뭔가 속이는 것 같다며 추궁해댔다. 아주머니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고 운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보니 식당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다.
“차라리 아주머니가 카운터를 보세요.”
아주머니가 카운터에 앉은 뒤, 장사는 더욱 힘들어졌다. 그때만 해도 쌈밥과 삼겹살을 따로 시켜야 했는데 보통 손님 3명이 오면 쌈밥 둘에 삼겹살 2인분을 주문하곤했다. 먼저 쌈밥을 주문 받고 추가 메뉴를 시키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아주머니는 그새를 못 참고 무조건 3명이면 쌈밥 셋에 삼겹살 3인분을 주문해야 한다고 우겼다. 결국 단골 손님들까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매상은 줄고 손님이 떨어지자 쌈밥집은 당연히 적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백 대표는 적자가 나든 말든 나 몰라라 하며 식당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IMF 위기…해법 찾기 혈안

그러던 차에 IMF가 삽시간에 들이 닥쳤다. 백 대표가 운영하던 사업이 수입 자재로 집을 짓는 것이었던 만큼 IMF로 인해 인상되는 환율 앞에서 백 대표는 무릎을 꿇어야했다. 당시 계약한 집만 수십 채로 평당 300만 원에 계약했지만 환율이 올라 자재 값만 평당 300~400만 원이 들어가게 됐다. 상황이 이러니 아예 부도를 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부도를 내버리면 계약은 자연스럽게 파기되겠지만, 법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사업을 함께한 백 대표와 그의 친구들 중 누군가는 감옥에 가야만 했다. 며칠 동안 잠도 못 자면서 고민한 끝에 백 대표는 정도로 가기로 결심했다. 계약한 집을 다 지어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때부터 남의 집을 백 대표 자신의 돈을 들여가며 짓기 시작했다. 빚을 내고 또 빚에 빚을 내면서 한 채 한 채 지어갔다. 그때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빚 때문에 몸 고생은 물론 마음고생도 너무나 심했지만, 결국엔 마지막 집까지 다 지었다. 다른 건설업자는 IMF가 터진 상황에서도 새로 계약을 받아 그 계약금으로 집을 지어주는 식으로 빚을 눈덩이처럼 불리다가 부도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백 대표는 더 이상의 계약은 받지 않고 이미 계약한 집만 빚을 내서 지어주고 끝냈기 때문에 최소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욕을 먹는 일은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무조건 성공하는 작은식당 中 │백종원 지음│서울문학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