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빙세대 큰 인기 끌며 활동 예능 내레이션으로 대중 소통 톡톡
적자생존 성우 입지 낮은 처우에 스타성우 등장 막아
[일요서울 | 조아라 기자] 흔히들 성우를 두고 천의 목소리라고 한다. 한가지로 정해진 형태가 아닌 다양한 목소리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혜정은 성우라는 직업 때문에 이름보다 목소리가 더 잘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대표작을 몇 개만 언급해도 ‘아~ 그 사람!’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중·장년층에게는 외화드라마 ‘X-파일’의 스컬리 목소리로, 젊은 층에게는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내래이션으로 익숙한 성우 서혜정을 [일요서울]에서 만나봤다.
“성우는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에요. 아마 성우 누구한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할 거에요. 영화, 애니매이션, 라디오, 다큐멘터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기자 생활을 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사생활도 완벽히 보장되죠. 제가 한 프로그램을 맡으면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성우에 대한 애정 때문일 거예요. 다시 태어나도 저는 성우가 되고 싶어요.”
서혜정은 1982년 성우로 데뷔했다. 어느새 데뷔 30년을 훌쩍 넘긴 그녀는 외화드라마 ‘X-파일’ 스컬리 역으로 성우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다. 이 외화드라마는 인기리에 9년간 방송됐다. 배역에 녹아든 열연 때문인지 서혜정은 상대배역인 멀더의 더빙을 맡은 성우 이규화와 부부가 아니냐는 웃지 못 할 소문을 듣기도 했다.
포털에서 검색되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그녀가 직접 포털에 연락해 정정요청을 했다는 후문도 있다. 스컬리 역에 이어 서혜정은 ‘롤러코스터-남녀생활탐구’를 통해 예능 내래이션에도 도전했다. 이 작품은 그동안 장막 뒤에 감춰졌던 성우와 대중이 소통하는 다리가 됐다.
서혜정 스스로도 자신을 두고 “성우들의 전성기, 더빙세대의 막차를 탄 사람”이라고 말할 만큼 오디오 시대 당시 성우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오디오와 더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성우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지금은 성우 공채 수도 줄고, 공채에 뽑혀도 2년 후엔 프리랜서가 돼야만 한다. 라디오 드라마도 사라지고, 외화도 더빙보다는 자막을 선호하는 추세로 변했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과 애니매이션 더빙은 인기 배우와 아이돌 가수, 개그맨들의 몫이 됐다. 그야말로 ‘적자생존’이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고은정-배한성-주희-최승희 등 스타 성우의 계보가 끊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녀는 이런 우려에 대해 “성우도 제작사도 모두가 문제”라고 일침을 놓았다. 성우가 아닌 유명 연예인들을 더빙으로 기용하는 건 제작사 측이 성우들의 만들어진 인위적인 소리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문적인 연기가 필요한 역할에는 성우를 캐스팅해 스타의 부족한 연기를 받쳐줘야 하지만 제작사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 제작 애니매이션 더빙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성우에 대한 낮은 처우도 스타성우의 등장을 가로막는다. 예를 들어 일본 성우들은 작품을 한 가지만 끝내도 1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을 받는다. 그런 만큼 한 작품에 몰입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스타성우가 많은 이유기도 하다. 반면 우리나라 성우들은 일본의 1/10 수준의 비용만을 받고 있다. 녹음 전날에야 대본을 주는 관행도 여전하다. 한 작품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우들이 다작을 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서혜정은 “만약 일본과 같은 작업환경을 갖춘다면 우리나라도 스타성우가 수도 없이 쏟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 비해 성우들의 활동무대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지금은 세상이 변해가는 변화의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이 시기를 넘어서면 성우들이 새로운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매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성우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서혜정을 제자리에만 머무를 수 없게 했다. 그녀는 성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 자리는 후배 성우들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위치기도 했다.
그녀는 새로운 형태의 매체인 ‘오디오북’의 잠재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오디오북은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을 위해 내용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책이다. 시대가 변한만큼 독서콘텐츠를 소재로 한 어플리캐이션이 다수 등장했다. 소설가, 평론가, 대형 서점과 출판사 등도 앞 다퉈 책을 주제로 한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10년 전 그녀가 오디오북 사업에 나섰다 실패를 맛볼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됐다. 서혜정 역시 현재 팟캐스트 방송 ‘책 읽어주는 목소리’를 진행하고 있다.
“책을 눈으로 읽을 때와 귀로 들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달라요. 더욱이 제가 진행하는 방송은 메시지 전달력이 우수하고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송과 차별화가 됐어요. 다른 방송처럼 전문가들이 책을 분석해 평가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주는 역할에만 충실하거든요. 말 그대로 낭독을 하는 거죠. 성우의 강점은 감수성과 상상력이거든요.”
앞으로 그녀는 팟캐스트 방송 ‘책 읽어주는 목소리’의 어플리캐이션으로 개발할 예정이다. 이 어플이 활성화가 되면 더 많은 성우들이 콘텐츠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계획도 있다.
“저는 성우로서 해볼 수 있는 일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앞으로는 후배들을 위해서, 전체 성우 사회를 위해서 뭔가 기반이 되고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성우사회가 좀 더 발전할 수 있길 바라고 있어요.”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