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연구소 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안철수연구소 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빅수진 기자
  • 입력 2013-08-19 19:26
  • 승인 2013.08.19 19:26
  • 호수 1007
  • 4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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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95에 V3+ 공급…국내 백신 시장 지키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스물여덟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국내 최장수 소프트웨어 브랜드로서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안철수연구소’다.

간신히 손발을 맞출 사람을 찾고 난 안철수에게 느닷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후원을 약속한 독지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구소 설립을 도와줄 수 없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사무실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안철수는 자신의 집을 임시 사무실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회사 창업 멤버 중 한 명인 고정한은 공교롭게도 안철수의 집에서 첫 업무를 보게 됐다.

고정한의 하루 일과는 오전 9시에 안철수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는 저녁 6시 전후로 퇴근할 때까지 안철수 딸의 PC로 작업을 했다. 이메일 확인은 물론 PC통신 게시판 관리 및 질문에 응대하기가 그의 주된 업무였다.

일은 흥미로웠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급여였다. 당시 안철수는 직장이 없어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군의관 퇴직금과 원고료 등으로 근근이 버티던 안철수가 백신 개발을 위해 한 달에 쏟아 붓는 돈은 1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장시간 컴퓨터 통신을 이용하는 접속비가 수십만 원, 10여 권에 달하는 컴퓨터 잡지 구독료, 그리고 외국 소프트웨어 구입비 등 들어오는 것은 없는데 쓸 곳은 아주 많았다. 여기에 고정한의 급여까지 보태고 있었으니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병원에서 일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안철수를 지켜보던 고정한은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고정한의 심적 갈등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에 파묻혔고 때가 되면 직접 점심식사를 차려주기까지 했다. 그런 안철수를 보고 있던 고정한은 무엇이 안철수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일이 그토록 대단한 것일까? 대체 뭘 위해서?’

당시 고정한은 의문에 의문을 거듭하던 그 물음표가 강하게 뒤통수를 치면서 느낌표로 다가올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 후, 한글과 컴퓨터사가 1년에 5억 원의 매출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의 제안을 했다. 회사의 전반적인 운영과 제품 개발은 안철수연구소가 맡고, V3 판매권은 한글과컴퓨터사가 독점적으로 갖겠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한글과컴퓨터사의 영업과 마케팅을 맡고 있던 박상현 이사가 이찬진 사장을 설득한 결과로, 안철수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독점 판매권을 내주는 것도 그렇지만 비영리법인의 꿈이 깨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안철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V3의 맥을 잇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을 현실화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V3가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품질 면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시장 환경에 적극 대응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단 둥지를 틀었으니 그 둥지를 다져야 했다. 그런데 험난한 세월을 함께하자고 선뜻 손을 내밀 만한 사람, 일과 마음을 함께 나눌 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었지만 가야할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기에 덥석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오래 고민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열정과 책임감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30대 초반의 김현숙을 찾아갔다. 컴퓨터 잡지사의 필자와 기자 관계로 만난 그녀는 이미 다른 잡지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김현숙은 안철수가 내민 손을 흔쾌히 잡아주었다.

돈과 인재가 만났으니 백신 연구소 설립에 걸림돌은 없었다. 1995년 2월 1일, 서초동 골목의 한판빌딩에 둥지를 튼 안철수연구소는 안철수, 김현숙, 고정한이 주축이 돼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2월 16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안철수연구소의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바이러스 퇴치 작전을 수행하려면 현재의 인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3월 초, 한글과컴퓨터사로부터 자금이 수혈되자 신문에 직원모집 공고를 냈다. V3에 대한 인지도 덕분에 안철수의 이름을 보고 몰려든 인원이 150여 명이나 됐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철수연구소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개발 인력은 뽑을 수가 없었다. 컴퓨터 백신을 만들어본 경험자가 없었던 것이다.

사업체를 꾸려나가려면 다른 인력 역시 필요했다. 제품 기획과 홍보, 경리와 총무, 4대 통신망 바이러스 상담 업무 등을 위해 박준식을 비롯한 4명의 직원을 충원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3월 15일, 달랑 일곱 명을 태운 안철수연구소호는 닻을 올렸고 미증유의 망망대해를 향한 긴 여정에 올랐다.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백신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이 컸기 때문에 무엇보다 유료 시장을 형성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외국의 백신 업체들은 앞으로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속속 국내 시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유료시장 형성 주력

결국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95를 출시하던 시점에 외국 백신 업체와 안철수연구소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이때 김현숙은 한글과컴퓨터사의 이찬진 사장을 만나 설득에 들어갔다. 한글과컴퓨터사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신제품 윈도95에 백신 프로그램을 번들(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판매할 때 무료로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로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윈도95 공식 백신 번들 계약을 맺으세요. 얼마나 팔릴지 모르지만 그래야만 ‘V3’ 상용화가 가능해집니다.”
안철수연구소가 그해 7월 승부수를 던진 것은 이미 개발을 완료한 도스용 백신 프로그램 ‘V3+’였다. V3+는 당시 사용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나타스, 다이하드 등의 외국산 바이러스는 물론 월드컵, 방랑자2 시리즈 등의 국산 바이러스를 포함해 380가지의 바이러스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윈도용 프로그램에 도스용 백신으로 도전하는 어처구니없는 모험이었지만 이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윈도95에 V3+를 번들로 제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제 막 닻을 올린 회사의 운명이 가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V3+의 독점 판매권을 쥐고 있는 한글과컴퓨터사를 설득해야만 했다.

당시 워드 프로그램은 한글이 독보적이었고, 위축돼 있던 마이크로스프트사는 한글과컴퓨터사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T사가 한글 윈도95에 공식 번들로 선정된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안철수연구소도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외국산 프로그램이 국내 백신 시장을 순식간에 점령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모든 것을 팽개치고 설득에 들어간 김현숙은 천신만고 끝에 이찬진 사장의 동의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뿐 아니라 직접 영업 전선에 뛰어들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그녀는 도스 버전이긴 해도 윈도95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시켰고, 윈도용 V3 개발이 막바지 단계에 있으며 계약을 맺으면 신제품이 출시되는 즉시 제품을 교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늘은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지팡이를 던져주는 법이다. 결국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국내 PC 사용자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안철수연구소의 V3를 선택했다.

윈도95에 V3+를 공급하는 것은 외국 업체에 맞서 국내 시장을 지켜낸다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무료 백신이던 V3를 상용화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V3가 쉐어웨어(프로그램 제조사가 정품 구매를 학대하기 위해 공급하는 일종의 샘플로, 일정 기간 사용한 뒤에는 대금을 지불하고 정식 사용자로 등록하는 것·Shareware)로 바뀌자 사람들의 비난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안철수가 제대로 돈독이 올랐어!”

“공짜로 쓰던 걸 왜 이제 와서 돈을 내라고 하는 거야!”

오해와 원성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해골 그림을 그려 우편으로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영업 담당으로 한글과컴퓨터사에 파견을 나와 있던 전준우는 이런 반응에 번번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론 7년 넘게 공짜로 쓰던 소프트웨어를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내고 사용하라니 사용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V3를 기업에 팔거나 수출하려면 쉐어웨어라는 명분이 필요했다. 또한 미국처럼 쉐어웨어가 발전해야 소프트웨어 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안철수연구소의 판단이었다. 쉐어웨어가 됐어도 일반 사용자 입장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무료 보급판에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부가적인 기능을 추가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다.

천만다행으로 한글 윈도95에 V3가 탑재되면서 안철수연구소는 큰 힘을 얻게 됐다. 무엇보다 당시 꽤 거금에 속하던 9500만 원의 계약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고, 직원들은 모두 크게 고무됐다. 사실 출범 무렵에 믿고 있던 한글과컴퓨터사의 지원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조만간 자금 문제가 불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직원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다. 한글과컴퓨터사가 보장했던 매출 대금 지급이 무한정 늦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글 윈도95에 V3+ 탑재가 결정되면서 거금이 들어오게 생겼으니 직원들로선 한껏 고무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아직 시험대에 내려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직원들 입에서 동시에 터졌던 탄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의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잡혔고, 그것은 오랫동안 펴지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안철수연구소 中│안철수연구소 사람들 지음│김영사>

빅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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