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추적 강화되자 고액 현금 결제 후 영수증 미발급
“안 걸리면 세금 안낸다”인식 전환…관련 법 정비 시급
박근혜 대통령이 지하경제 양성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정작 돈과 금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수년간 가파르게 올랐던 금값이 떨어지면서 금을 찾는 수요가 다시 크게 늘고 있지만 재산 은닉과 탈세를 노린 뒷금(무자료 금)거래가 판을 치고 있어 추적이 어렵다. 또한 고액결제에 따른 세무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현금거래를 하고 그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 때문에 현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바람’이 오히려 ‘지하경제 활성화’로 비화되고 있다. 세무당국도 업종별·지역별 탈세위험 정도에 따라 차별화된 대응전략을 강구하기 위한 취지의 ‘택스갭(Tax Gap)’측정모델도 개발하기로 했다.
탈세혐의로 A씨 자택을 압수수색하던 국세청 직원들은 금고와 장롱 속 종이박스, 서류가방 등에서 총 20억 원이 넘는 현금다발을 발견했다. 전부 5만 원권이었다.
A씨는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내면 수술비를 깎아주는 방식으로 받은 거액의 현금을 집안에 쌓아두고 탈세를 하다가 국세청에 덜미를 잡혔다.
수사에 참여한 국세청 관계자는 “그 많은 돈을 5만 원권으로 바꿔 집에 숨겼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주로 하는 S대학 K 학생은 “고등학교 학생들 과외비용은 과목당 수백만 원에서 1000만 원을 육박하는 경우도 있다. 최소 2~3과목만 시켜도 국세통합시스템에 적발된다. 하지만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바로 세금신고를 하지 않는다. 과외학생의 부모도 그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굳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꼼수이지만 나에겐 피해가 없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이는 자금세탁방지법 강화나 국세청의 ‘국세통합시스템(TIS)’ 첨단화 등으로 소득 추적이 더욱 정교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는 은행에서 현금을 하루에 2000만 원 이상 거래하면 금융정보분석원에 자동 보고 된다.
금고업계의 통계도 재미나다. 최근 5만 원권으로 약 13억 원의 현금을 보관할 수 있는 금고 시리즈가 우수상품에 등극했다. B금고 매장 직원은 “올 들어 반년도 되지 않아 판매량이 지난해 총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지하경제 활성화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사라지는 5만 원권
추적 어려워
또한, 2009년 6월 5만 원권이 처음 발행될 당시 비자금 조성이나 탈세를 위한 재산은닉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최근 5만 원권의 발행량과 환수율 추이를 보면 그런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4월 말 기준으로 시중에 풀린 5만 원권의 발행 잔액은 35조 5299억 원으로 올 들어만 4개월 동안 3조 7634억 원이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증가폭인 1조9265억 원의 2배 수준이다. 반면 5만 원권 환수율은 올 1분기 현재 58.6%로 지난해 4분기(86.7%)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문제는 이 5만 원권이 현금 은닉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5만 원 권으로 1억을 만들 경우 무게는 2kg에 불과하다. 같은 금액을 1만 원권으로 만들려면 무게도 11kg으로 무겁고 부피도 훨씬 커진다.
최근 적발된 거액 불법 자금도 모두 5만 원권 뭉치였던 점도 현금 은닉의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다.
검찰 관계자는 “과거 2억 원을 담기 위해선 사과 상자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손가방 하나면 된다”며 5만 원권이 뇌물 수수 등 검은 거래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난해 4월 전북 김제시 마늘밭에서 발각된 110억 원대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 수익금 중 5만 원권이 22만1455장(110억7275만 원)에 달했던 게 대표적인 예다.
그동안 탈세 등을 해오던 각종 ‘돈’에 대해 철저히 추적하겠다는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선언’ 이후 현금 경제(cash economy)의 규모가 확 늘고 있다. 현금을 안 쓰던 곳에서 현금을 쓰고, 은행 등 금융기관에 있던 돈들이 현금이 돼 금고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직 대통령의 국고 환수 문제점도 이 같은 지하경제 활성화에 한 몫을 했다는 지적이다. 버티면 된다는 식이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오는 10월이면 징수 시효가 끝나 1원이라도 재산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에 따르면 검찰은 2008년 전씨의 은행 채권 추심을 통해 4만7000원을 추가 징수했다. 2006년 6월 서울 서초동 땅을 찾아낸 지 1년여만으로 1997년부터 모두 12차례에 걸쳐 전씨의 재산 532억 원을 찾아냈다. 대법원 확정 추징액은 2205억여 원으로 아직 76%에 해당하는 1672여억 원을 징수하지 못한 상태다. 검찰은 4만7000원 이후 한 푼도 징수하지 못했다.
검찰이 특별팀을 꾸려 앞으로 석 달 동안 은닉 재산을 추적하기로 했지만 성과는 아직 미지수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 시효가 남아 있는 만큼 다 (추징)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추징금 미납 상황도 마찬가지다.
음성적 거래가
오히려 지하경제 확대
전문가들은 지하경제 양성화는 필요하지만, 무리하게 추진하면 오히려 음성적 경제활동을 늘리는 역효과를 낸다. 새 정부는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신용카드 소득공제 효과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신용카드 소득공제 도입에 따른 효과를 충분히 봤기 때문에 계속 세금 혜택을 주는 것이 비용만 들고 효과는 크지 않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혜택 축소가 또다시 지하경제 규모를 늘리는 원인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금융당국의 한 전문가는 “소득공제 혜택이 줄면 사람들이 신용카드사용을 줄이고 현금 거래를 늘리게 된다. 음성적 거래가 늘어 오히려 지하경제가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 금고에 보관해두려는 최근 추세에 대해서도 “재산을 은닉하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올해부터 금융소득종합과세가 대폭 확대된데다가 새 정부 출범 후 복지재원 확보를 위해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세무조사, 해외계좌 추적 등이 강화되자 재산을 고액권 화폐로 바꿔 숨기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