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스물여덟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국내 최장수 소프트웨어 브랜드로서 세계적 경쟁력을 지닌 ‘안철수연구소’다.
1988년 5월, 의대 박사 과정에 있던 안철수는 컴퓨터를 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다. 플로피디스켓을 통해 말로만 듣던 ‘브레인 바이러스’가 침입해 화면에 떡 하니 ‘브레인’이라는 이름을 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어라 하는 사이에 명치 끝에서부터 뭔가가 꿈틀거렸다. ‘천하의 불한당, 뭐하는 놈이냐?’하고 물을 틈도 없이 그의 손은 어느새 바이러스 속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천방지축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던 것. 그는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건 죄다 뜯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불통이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사람을 잘못 고른 셈이다.
마침 안철수는 기계어를 공부해둔 터라 바이러스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고 나자 치료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시간? 충분하고 말고’ 한 숨 두 숨 심호흡을 하던 그가 잽싸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제가 전 세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는 브레인 바이러스를 분석하고, 치료 방법도 찾았어요. 혹시 잡지에 실을 수 있을까요.”
안철수는 잡지에 실릴 원고 마감 때까지 바이러스 퇴치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등용문으로 불리는 ‘마이크로소프트웨어’지의 임영선 편집장에게 전화를 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한다? 치료를 해?’
이 말이 이명처럼 안철수 귓가에 맴도는 사이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 진단/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백신(Vaccine)이라 이름 붙인 ‘V3’이다. 안철수는 한달음에 잡지사로 달려갔다. 자신이 만든 백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해 7월, ‘마이크로소프트웨어’지에는 브레인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특집기사로 실렸다. 8월에는 바이러스 방역센터를 운영한다는 공지문도 게재됐다.
이후, 안철수의 하루하루는 밝음과 어둠이 경계 없이 포개졌다 갈라지며 밤이 되고 아침이 되기를 거듭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전등을 발명한 에디슨처럼 평균 수면의 반 토막만 자던 시간마저 잘라내가며 일에 매달렸다.
사용자가 바이러스 샘플을 디스켓에 담아 잡지사에 보내면 안철수는 잡지사를 방문해 그것을 찾아왔다. 겁 없이 날뛰는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어떻게든 묘수를 찾아내는 것이 안철수의 몫이었다. 한 달여를 씨름한 끝에 백신이 개발되면 안철수는 해당 프로그램을 디스켓에 저장해 잡지사로 가져갔다. 백신을 필요로 하는 사용자들은 그것을 복사해갔고,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컴퓨터에 백신 주사를 놓는 일에 특별한 대가가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의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군의관을 거치는 7년여 동안 새벽 3시에 일어나 계속 백신 개발에 매달렸다. 나아가 테스터, 기술지원, 고객지원 역할까지 떠맡느라 몸뚱이가 내지르는 비명을 정신으로 꾹 눌러야만 했다.
그렇다고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라는 불모지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안철수는 혼자 부딪히고 깨지고 뒹굴어가며 하나하나 터득해 나갔다.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국내 사용자들은 예루살렘, 미켈란젤로 등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출몰할 때마다 무료로 치료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의대 대신 컴퓨터 선택
그런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안철수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서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선택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제 갈 길도 알지 못한 채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고, 직장 구할 나이가 되면 적당히 돈이 맞는 직장을 선택하는 떠밀리는 식의 삶이 아닌 기회와 희망에 집중하는 선택 말이다.
의대 교수로의 발령을 앞둔 시점에서 안철수는 전보다 더한 책임을 안고 학생들과 후배 교수들을 챙기며 의학을 연구할 것인지, 아니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컴퓨터 바이러스는 물론 급속히 발전하는 컴퓨터 환경을 연구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이미 어떤 경계를 넘어선 안철수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시작부터 발끝에 자갈이 서걱서걱 밟히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는 배수진을 치는 것처럼 아예 브레이크를 꺾어버렸다. 사실 안정적인 의대 교수직을 버리고 불안정한 백신 프로그램 개발자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평범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것은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안철수는 그 길에서 불확실성이 주는 호기심에 이끌렸고, 보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도 보았다.
세상에 호기심을 끌어당기고 보람까지 안겨주는 일이 어디 흔한가.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게 안전지대에 머물기를 희망하지만, 그에게 안전지대에 주저앉아 미래의 희망을 흐리는 것은 낯선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택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탁월한 선택을 했더라도 행동 없이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과연 혼자서 그 많은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을까. 혼자서 해낼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할까. 안철수의 선택은 그렇게 현실이라는 숱한 얼개와 맞닥뜨리게 됐다. 어깨를 뻐근하게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애썼다. 생각의 무게를 계속 ‘되는 쪽’으로 밀어내던 안철수는 어느 순간 뒤통수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결국 모든 일은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하나의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실에서 희망까지의 거리
1994년 7월, 프로그램 개발자의 삶을 선택한 안철수는 먼저 비영리법인 형태의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더불어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 소스와 자료를 모두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대기업과 정부기관을 상대로 설득에 들어갔다.
“아니, 공짜라면서 연구소가 왜 필요합니까?”
컴퓨터 바이러스를 막는 백신 개발은 정보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여기는 안철수와 결정권을 쥐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과의 간극은 너무 멀었다. 출발부터 무겁고 긴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주의의 반응은 차가웠고, 안철수의 가슴속에 품은 꿈은 가라앉는 듯했다.
당시 안철수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첫 번째 모델은 PC를 생산하는 대기업과 PC 통신업체 사이에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기업이 공동출자로 연구소를 운영하고 개발된 백신을 종전처럼 일반 사용자에게 무료로 공급해주는 방식을 말한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금력 있는 단일 대기업이 공익 차원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는 게 두번째 모델이었다. 그밖에 정부기관에서 연구소를 맡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했고, 심지어 동아리 형태의 연구소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개중에는 이 일에 적극 나서는 것이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던 기업마저 갑자기 기업 이미지 때문에 2~3개월이나 통고를 미루는 가하면, 경영 적자로 연구소 설립을 도울 여유가 없다는 뜻을 전해오는 대기업도 있었다.
막막했다. 바늘 끝보다 예리한 뭔가에 폐부 깊숙한 곳을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무방비 상태의 습격은 아니었지만 가치 있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는데 막상 일이 난관에 부딪히자 안철수는 온몸의 신경이 빳빳하게 경직되는 것 같았다.
끝 모를 고뇌에 빠져들다 문득 고개를 드니 창문 넘어 네모난 세상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네모난 세상 한 귀퉁이에 언제 떠올랐는지 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저 달, 아니 현실에서 희망 성취까지의 거리는 대체 얼마나 될까? 분명 가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보지 않고는 절대 그 거리를 알 수 없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안철수는 내면의 다짐을 소리로 만들어냈다.
‘그래, 가보는 거야. 헤쳐 나가자고.’
세상일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더니 그즈음 한 독지가가 지지부진하던 안철수연구소의 설립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기회와 희망이 통째로 눈앞에 어른거리며 안철수는 길 위에서 잃었던 길을 다시 찾는가 싶었다.
안철수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손이 필요했다. 가능하면 뜻이 맞고 컴퓨터에 미쳐 있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이때 불현듯 떠오른 이름이 고정한이었다.
고정한과 손발 맞추다
고정한은 1200bps, 2500bps 전화접속모뎀을 사용하던 1990년 초 PC통신(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사설 게시판 등)에 접속해 활발한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PC통신 게시판에 바이러스와 관련된 질문이 올라오면 하나하나에 댓글을 달아놓곤 했다.
당시 활발하게 PC통신에 참여하던 고정한은 V3를 개발한 안철수가 몹시 궁금했다. 사용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를 때는 더더욱 안철수가 생각났다. 그는 용기를 내 안철수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안철수의 꼼꼼한 답변으로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있었다.
1994년, 성급한 가로수 잎이 도로를 나뒹굴 즈음 고정한은 안철수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컴퓨터 작업을 좋아하는데다 마침 취업을 준비하고 있던 고정한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안철수연구소 中│안철수연구소 사람들 지음│김영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