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 전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얼굴 한 번 본적 없어”
‘유해 송환’, ‘미불임금 공탁금’ 등 풀어야할 숙제 산더미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던 1941년. 전라북도 임실군의 작은 마을에 거주하던 김판용씨는 아내와 어린 3남매를 뒤로 한 채 남양군도의 어느 섬으로 강제 징용 당했다. 일본 해군의 군속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던 김판용씨는 1944년 8월 8일 발생한 해전에서 전사했다.
일제강점하유족회 회장 김종대씨는 광복 후 남양군에서 탈출한 마을 주민을 통해 아버지 김판용씨의 죽음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은 “아버지의 유해를 인양조차 하지 못했다”며 가슴 아파했다.
일제피해자전국연합회 정승훈 대표는 아버지의 얼굴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정 대표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41년 3월 17일. 아버지가 남태평양에 있는 섬 밀리환초로 강제 징용됐다. 그리고 인육사건으로 인해 1945년 3월 1일 사망했다.
희생자 확인 자료 부족
일본은 국가총동원령을 시행한 1938년 4월부터 조선인을 군인, 노무자, 군무원, 위안부 등으로 국내뿐 아니라 일본, 동남아 등 태평양 전역으로 강제 징용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등 지원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강제징용당한 희생자는 2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현재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전체의 10% 가량인 22만여 명에 불과하다.
강제징용 희생자 명단은 1953년 일부 국내로 들어왔으며, 1975년 한일협정 당시 정식으로 처음 전달됐다. 2005년 3월 진상규명 위원회(현 강제동원 피해조사 지원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공탁금, 후생연금 명부 등도 일부 들어왔다. 그러나 200만여 명의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관계자는 “일본에 강제동원 희생자 명부가 어느 정도 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일본이 말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며 “일본에서 제공한 노무자 공탁금 명부는 7만여 명에서 불과하다. 군인은 10만여 명이다. 그러나 실제는 100만여 명이 넘으니 아직도 많은 자료가 일본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희생자를 찾는데 자료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일본정부는 자료를 주면 피해 유족이 소송을 제기하다 보니, 자료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자료가 없다’, ‘기업이 가져갔다’, ‘정부는 모른다’와 같은 핑계를 대거나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해 줄 수 없다고 버틴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한 지금처럼 한일 양국관계가 냉각돼 있는 경우는 일본에서 응하지 조차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본, “보상은 끝났다”
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은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해서는 4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는 유해 송환이다. 타지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들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유족들은 위패조차 모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는 강제동원 노역자들에 대한 사죄와 피해보상, 세 번째는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피해보상이다. 마지막은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에게 임금 저축을 강요했다. 이를 ‘미불임금공탁금’이라고 한다. 유족들은 군인, 군속으로 일한 조선인의 미수금이 12조8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이며 엄연한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반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시행하고 있지 않다.
지난 1991년 군인, 군속, 위안부 희생자와 유족 등 41명은 일본 동경지방법원에 피해보상을 위한 소장을 접수했다. 그러나 패소했다. ‘1975년 한일협정 당시 지급된 보상금으로 일본 정부에 대한 한국인의 재산관계 이해는 소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2010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에 한해서 1인당 2000만 원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강제 동원된 희생자에 대해서는 위로금이 지급되지 않고 국외 강제동원 후 국내 사망자 역시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유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관계자는 “현재 국회에 위원회 상설화와 국·내외 희생자 전부에 대해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상정돼있다”고 설명했다.
강제동원희생자 유족들은 역사가 잊혀 가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재단’설립을 요구한다.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업무는 희생자 신고를 받고 그에 따른 피해조사에 불과해 시간이 가면 잊혀진다는 것.
이에 뜻을 함께하는 피해단체 10여 곳(일제강점하유족회, 전국일제피해자연합회, 일제피해자보상연합회, 강제동원 생존자 협회, 태전한인희생자생환유족회, 중소이산가족 연합회, 원폭피해자연합회, 사할린 유족대표 등)이 모여 ‘전국 일제 강제동원 피해 희생자 연합회’를 출범했다. 이들은 후손들이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재단에서 장학, 복지, 추모 사업, 역사포럼 등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 대표는 “현재 재단 설립을 위한 예산 20억 원이 책정돼있으며 포스코에서도 100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며 “오는 9월까지 설립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고 후대까지 이어갈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밀리섬 인육사건
1944년 6월부터 밀리섬의 일본군은 8개월가량 식량 보급이 끊겨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1945년 초 일본군은 조선인에게 ‘고래 고기’라며 식량을 준다. 알고 보니 ‘고래 고기’는 바로 ‘조선인의 살점’이였다. 굶주린 일본군이 조선인을 살해하고 인육을 먹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조선인들은 일본군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보복 학살당했다. 당시 섬에 있던 조선인 120명 중 15명만이 목숨을 건졌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2010년 드러났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