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업체에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사무소에서도 갑과 을이 존재한다. 하루 일당만을 바라보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 앞에 인력사무소 직원들은 절대 권력자나 마찬가지다. 인력담당자(소위 ‘반장’으로 불린다) 눈에 밉보이는 순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담당자의 말 한마디에 웃고 우는 사람들. 그러다보니 인력사무소를 찾는 사람들은 담당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뇌물공세’를 퍼붓는다. 그들은 3만여 원에 그치는 하루 일당을 모아서 담당자에게 에너지드링크와 같은 음료 선물에서부터 식사·술까지 대접한다. 일 하기 위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들의 속사정을 [일요서울]이 들어봤다.
반장 눈에 밉보인 순간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일자리 얻기 위해 식사부터 술자리까지 ‘뇌물공세’
지난 1일 오전 7시. 하루 중 오전에 가장 바삐 움직이는 곳. 경기도 안산시 소재의 어느 인력사무소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새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건물입구까지 줄지어 서있었다.
“나OO씨, 김OO씨, 이OO씨 이쪽 차에 올라타세요.” 이름이 호명된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오늘 하루 일당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일당 3만7천여 원이 그들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질수록 남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굳기 시작했다.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아 쓸쓸한 발길을 돌리던 A(51·여)씨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벌써 3일째 허탕이기 때문이다.
인력사무소만이 유일한 동아줄
올해로 51세인 A씨는 나이 제한에 걸려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대다수의 공장 채용공고도 40세 이하로 명시돼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A씨가 마지막 보루인 인력사무소를 찾은 지 벌써 2년이 넘었다고 한다.
“인력사무소는 나이 제한이 없습니다.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모두 모여 드는 곳이자 제 유일한 희망이지요.”
A씨는 인력사무소를 나간 2년의 세월동안 가구·과자·휴지·휴대전화 공장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안산시에는 인근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으로 인해 수십 개의 인력사무소가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사무소간 알력 다툼도 심하다. 더 좋은 조건을 내세운 인력사무소로 사람들이 옮겨가고, 인력사무소 측에서는 아는 사람을 통해 다른 사무소로 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손이 부족한 봄·가을의 이야기다. 여름·겨울과 같은 방학철에는 어린 학생들도 인력사무소를 찾기 때문에 일을 얻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라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반장들의 말이 법이다. 반장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한다. 그들이 인력 분배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반장 눈에 밉보이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일 하기 어렵다고 했다.
A씨는 “지난해 쯤 어떤 40대 여성이 반장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중간에 착오가 생겨 허탕을 친 것 같았다. 그러자 반장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라. 일할 사람 많이 있다. 더 이상 나오지 마라’고소리쳤다. 뒤늦게 그 여성이 사과했지만 반장은 받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력사무소에 출근하는 사람들은 반장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반장에게 에너지드링크를 선물하고 식사를 대접했으며, 때로는 술을 먹이고 노래방에 가는 등 유흥비를 부담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잘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일 할 수 없다”
그렇게 반장에게 잘 보인 사람들은 업무 강도가 약하고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진다. 때로는 1달 이상 장기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이들은 당분간 ‘일 구할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반장을 향한 뇌물공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미 근무환경이 좋은 곳은 인원이 마감됐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업무강도가 강한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또한 지금처럼 일이 없는 기간에는 아예 손가락을 빨 수밖에 없게 된다. 적은 일자리가 ‘그들’로 인해 채워졌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던 사람들 역시 일 하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뇌물공세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A씨의 설명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반장에게 대접하려고 난리에요. 어쩌겠어요. 안하면 일을 할 수 없는데… 열심히 일한 돈이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것은 아깝지만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사무소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만 이런 사실을 모르고 힘든 곳에서 고생하거나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가고 있죠.”
A씨 역시 몇 차례 반장에게 음료수를 선물했다고 했다. 최근에는 사정이 좋지 않아 선물을 하지 못한 것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력사무소 측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회식자리를 가진 적은 있지만 절대 ‘뇌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력사무소 관계자는 “수년 동안 함께 한 사람들과 밥 한 끼 먹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냐”며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사람들과 그런 자리를 가졌을 뿐으로 돈도 각자 부담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인력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들이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 때문에 업체 측에서 자주 찾는다. 그러다보니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