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희생활과학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한경희생활과학②]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7-29 11:50
  • 승인 2013.07.29 11:50
  • 호수 1004
  • 4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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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청소기 대박…가전제품 역사 확 바꿨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지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스물일곱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국내 가전제품 시장의 역사를 새로 쓴, 생활가전 전문기업인 한경희 생활과학이다.

▲ <뉴시스>
“안녕하세요. 한영전기의 한경희입니다. 사업자금을 신청하려고 왔는데요.”

“정말 댁이 사장 맞아요? 주민등록번호 두드리면 다 나오니까 바른대로 얘기하세요.”

정부에서 위탁받아 일하는 컨설팅 업체의 평가원은 한 대표가 사장이라는 사실을 도통 믿질 않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 CEO가 많지 않았다고는 하나 마치 사기꾼을 대하듯 무례하게 구는 그의 태도에 한 대표는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서류를 집어던지고 싸우고 싶었지만, 자존심보다는 사업이 우선이었기에 치미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그를 설득했다. 자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한 한 대표였지만, 사업을 위해서라는 명분 앞에서는 그 강한 자존심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저 사장 맞습니다. 스팀 청소기를 개발하고 있어요.”
“남편이 부도나서 대신 나선 것 아닙니까?”
“남편은 저와 다른 사업체를 갖고 있어요.”
“그럼 문어발식 사업인 모양이네요.”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평가원은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남편의 주민번호나 대라는 등 한 대표의 말을 뚝뚝 자르기 바빴다. 결국 단념하고 문을 나서는 한 대표에게 서러움이 밀려왔다. 제품의 시장성이 없다거나 경영상의 부실 등 객관적인 문제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평가의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현실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한 대표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해 직장 경력도 길고 국제기구를 포함한 다양한 업무 경력, 특히 중앙부처 고급 공무원이었음에도 이런 대우를 받았는데 일반 여성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한 대표는 평가기관의 기관장이나 정책 결정자를 만나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토했다.

“우리나라 소비자의 최소 반은 여성이고, 특히 여성을 위한 제품 대부분 여성이 소비자인데 사업성을 평가하는 사람은 남성이라 절대 공정한 평가가 되지 않습니다.”

“여성도 공정하게 사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지금이야 여성 리더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고 운신의 폭도 넓어졌지만, 한 대표가 사업을 시작하던 때만 해도 차별과 선입관의 벽이 높았다. ‘이 제품은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선입관과 ‘여자가 무슨 사장이냐’는 차별, 넘어야 할 장애물도 싸워야 할 상대도 많았다. 그럴수록 한 대표는 이를 악물었다. 그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을 뒤집는 방법은 하나, 반드시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억울해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서러움에 젖어 좌절하고 포기하느냐, 서러움 따위는 털어내고 묵묵히 정진하느냐, 매일 시작만 하는 사람과 반드시 성공해내는 사람의 차이는 거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이후 한 대표는 수십 곳이 넘는 정부기관의 문을 두드린 끝에 간신히 한두 군데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도전의 나날, 실패에 실패가 거듭됐지만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것은 실패가 반복될수록 조금씩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아내고 개선하면서 완제품에 한 걸음씩 가까워졌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하나둘씩 배웠던 셈이다.

신뢰 위해 전량 폐기 결정

마침내 전극 방식 대신 히터 방식을 도입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통을 따로 분리해 소량의 물을 주입시키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긍정의 신호였다. 하지만 여전히 풀어야할 문제가 산더미였다. 금형(똑같은 물건을 양산하기 위한 틀)을 만들어야 대량생산이 가능한데, 기술자들이 모두 문제없다고 장담했던 물통 만드는 작업에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플라스틱끼리 접착이 되지 않았다. 초음파를 이용해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열로 녹여서 붙이는 열융착법을 통해 접착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01년 여름, 드디어 전기안전인증 검사를 통과한 3000여 개의 제품이 생산됐다. 한 대표는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안 된다’는 모두의 만류를 뒤로하고 벌인 2년여의 사투가 결실을 본 순간이었으니, 그 기쁨을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불가능하다던 제품이 현실화돼 한 대표의 눈앞에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품 생산 후 테스트과정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드러났다. 사용 횟수가 늘수록 열융착 부위가 점점 벌어졌다. 전체의 10%가량의 제품에서 3년 정도 사용 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수입 한 푼 없이 제품 개발에 끝없이 투자만 하고 있으니 회사 상황을 염려한 직원들은 그냥 출시하자고 했다.

하지만 한 대표는 아무리 수량이 적고 몇 년이 지난 후에나 일부 문제가 나올 것이라 하더라도 신뢰를 먹고 사는 회사가 문제의 소지를 알면서 그대로 출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출시조차 하지 못한 채 전량 폐기 처분했다. 마치 제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이 아팠지만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량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플라스틱의 두께가 얇아서 일어난 문제였다. 문제점을 보완하고 좀 더 세밀하게 테스트를 진행했다. 다행히 모두 무사통과했다.

드디어 시장에 스팀청소기가 출시됐다. 한 대표는 이제 고객의 열화와 같은 반응만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내놓으면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할 줄 알았는데,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어렵게 유통시장을 뚫었지만 소비자의 반응 역시 냉담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판매점을 돌아다니며 의견을 구했다.

▲ <뉴시스>
실패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

“아줌마들의 시선을 확 끄는 뭔가가 없어요. 이렇게 제품이 많은데, 눈에 띄지 않으면 당연히 구매로 이어지지 않죠.”

“딱 보면 탱크 아닙니까? 요즘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생긴 제품을 사겠어요. 기능만 좋다고 다가 아닙니다.”

아뿔싸, 성능에만 신경 쓰다 디자인 개발을 소홀히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탱크처럼 크고 투박한 디자인에 무거운 무게. 스팀이 나오는 제품 특성상 무게가 가벼워도 걸레가 젖으면 쉽게 밀리지 않아 묵직한 느낌이 드는데, 설상가상 무게마저 무거우니 주부들이 사용하기에 불편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디자인과 편리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루빨리 디자인을 보강해서 완벽한 제품을 내놓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또다시 연구에 연구를 거듭, 새로운 제품을 출시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이번에는 스팀청소기가 앞으로 잘 밀리지 않는다는 불평이 쏟아졌다. 면 걸레를 사용한 게 문제였다. 스팀으로 바닥의 때를 불려 닦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아도 잘 밀려야 하는데 면 걸레는 마찰이 심해 사용하는 데 힘이 많이 들어갔던 것이다. 제품 개발과 테스트에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오류였다. 보완이 필요했다. 온갖 천이라는 천은 전부 구해다 테스트한 결과, 초극세사를 이용해 걸레를 만들기로 했다. 면보다 값은 훨씬 비싸지만 세척력이 우수했다. 마찰력만 줄이면 완벽한 제품이 탄생할 수 이을 것 같았다. 걸레에 벨크로(찍찍이)를 사용해 쉽게 떼고 붙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번엔 벨크로 부착이 문제였다. 천으로 된 벨크로를 강력접착제를 이용해 부착했더니 스팀의 습기와 열 때문에 쉽게 떨어지고 말았다. 접착제를 붙인 후 나사로 고정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대표는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던진 한 마디에서 결정적 힌트를 얻었다. 벨크로를 본체에 흠을 파서 붙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였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실험 결과는 성공이었다. 혹시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있을까 싶어 더욱 꼼꼼히 테스트를 진행했다. 역시나 몇 가지 보완할 부분이 발견 됐다. 기존에 한 겹으로 만든 걸레를 세 겹으로 하는 게 물기가 적게 남고 오래 쓸 수 있었다. 비용은 훨씬 많이 들었지만 이번엔 정말 완벽한 제품으로 승부를 걸고 싶어 세 겹을 선택했다. 2중으로 설계했던 안전장치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3중으로 보강했다.  

한경희 스팀청소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셀 수도 없이 숱한 실패를 거치면서, 그 실패들을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그렇게 간신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실패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단 한 가지, 실패할 때마다 배우고 깨닫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실패 없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한 대표처럼 실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 中│한경희 지음│동아일보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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