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사 前직원 “현금으로 보너스 받아” 언급해 눈길
“5공·6공 시절 고위직 부인 사용” 증언 이어져
‘구권(舊券) 화폐’가 다시 입길에 올랐다. 1997년 금융실명제 이전 일부 종적을 감춘 은선(銀線)이 없는 1만 원권 화폐 사용 증언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 ‘시공사’ 직원들에게 지급한 보너스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는 보도가 난 후 자금 출처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시공사는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흘러들어간 곳으로 지목되는 곳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채시장과 강남권에서 5공·6공 시절 고위직 부인들이 은닉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권 일부가 유통되고 있다는 소문도 떠돈다. 하지만 그 실체 파악이 어렵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구권 화폐’는 1994년 1월 20일 위폐 식별을 위한 은선이 도입되기 전 발행된 지폐를 가리킨다. 뒷면에 도산서원이 그려진 1000원 권, 오죽헌의 5000원 권, 경회루의 1만 원권을 말한다. 현재는 각각 계상정거도, 신사임당 초충도, 혼천의 등으로 교체됐다. 이 구권 화폐는 신권을 발행하면서 거래정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권과 똑같이 통용이 가능하다. 지금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거래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전씨의 장남 재국씨가 운영 중인 시공사 직원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5년쯤 곰팡이 냄새가 나는 구권 화폐로 보너스를 받았다"고 밝힘으로써 구권 화폐 비자금의 존재 가능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서울 강남의 일부 ‘사모님’이 구권 화폐를 사용했다는 목격담도 있다. 백화점에서 명품을 사거나, 고급 미용실에서 팁을 줄 때 구권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강남 일대의 한 사업가는 “주로 과거 5공·6공 시절 정권의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의 부인이 구권 화폐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서울 강남의 A 영어유치원에선 최근 월 130만 원을 웃도는 수강료를 전액 구권으로 내는 할머니들이 늘고 있다. 손자의 손을 잡고 오는 이들은 학원에서 현금영수증을 발급해주려고 하면 “괜찮다”고 손사래 친다. A 영어유치원의 직원은 “가끔씩 구권이 발견된다”며 “일부는 씀씀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현금 결제를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권 은닉 재산 찾기 사정당국 수사 어려워
한국은행에 따르면, 아직 회수되지 않은 구권 화폐는 4월 중순 기준으로 1만 원권 1억994만장(1조994억 원)을 포함해 총 3억4491만장(1조4432억 원)에 달한다. 이는 공식 수치일 뿐 숨어 있는 돈까지 포함하면 3조 원에 육박하다는 게 사채 시장의 증언이다.
명동 사채시장의 한 관계자는 “일부 대자산가들이 금융실명제 발표 이전 상자에 넣어 집안에 보관하거나 창고에 숨겨 놓은 돈이 많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이 화폐가 지하경제의 ‘위엄’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은밀하게 사용되는 돈 대부분이 구권 화폐라는 설명이다.
실제로도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직후 사채시장을 중심으로 구권 화폐와 관련된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주로 과거 정권 실세 등 지하경제의 큰손들이 실명제 도입 직전 거액의 불법자금을 현금화해 구권 형태로 갖고 있다는 내용이다.
소형 금고 판매점 중역 B씨 역시 “1990년대 중반엔 개인금고 물량 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며 “자금 추적을 우려해 은행에 넣거나 신권으로 바꾸지 못해 금고에 보관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신권 교환 사기 극성 전씨 측근 연루되기도
이 때문에 과거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는 걸 도와주면 20~30%를 수수료로 주겠다”는 식의 사기행각이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2000년 사채업자 장영자씨가 구권 화폐 교환을 미끼로 200억 원 이상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면서 이러한 사기 수법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 전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도 2006년 구권 화폐 사기사건에 연루된 바 있다.
이모씨와 조모씨는 같은 해 6월 김모씨 등에게 접근해 “전 대통령의 구권화폐 비자금 65억 원이 있는데 신권 50억 원과 바꾸기로 했다”며 “45억 원은 준비했는데 5억 원이 모자라니 이 돈을 빌려주면 1억 원을 얹어 6억 원으로 갚아주겠다”고 속여 2억1000여만 원을 가로챘다.
이 과정에서 이씨 등은 전씨 또는 전씨 측근과 가까운 것을 과시하기 위해 경환씨와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피해자들에게 확신을 갖게 했다. 당시 경환씨는 사기 및 세금체납 등의 혐의로 수배 중이었으나 소재가 불명한 상태여서 직접 수사당국의 수사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경환씨는 나중에 체포돼 사기죄 등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뇌경색, 다발성 심장판막 질환 등으로 8번째 형집행정지를 받아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다.
한편 구권화폐 비자금설이 또 다시 주목되면서 사정당국이 수사 의지를 밝힐지도 주목된다. 검찰도 전씨가 막대한 규모의 구권화폐를 여러 측근들에게 분산해 은닉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무게를 두고 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구권화폐 은닉 시기가 5공·6공 당시였던 점에 착안, 강도 높은 수사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