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커트머리에 남성스러운 사람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들은 남자가 아닌 엄연한 여자다. 다른 곳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지만, 여자들끼리 나란히 앉아 얼굴을 맞대고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은 이곳을 찾는 레즈비언들에게 당연한 일상이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테이블에는 커플로 보이는 여성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자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 여자끼리 얼굴을 부비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식의 스킨십 등은 결코 해괴망측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말이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그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는다. 기자는 양해를 구하고 사장을 포함한 다른 레즈비언들과의 술자리에 동석하는데 성공했다.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레스보스의 김명우 사장(50)은 “레즈비언들의 사랑도 이성간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김 사장은 “남성을 혐오하는 이상한 집단으로 레즈비언을 보는 시각이 여전히 있다”며 레즈비언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레즈비언은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를 사랑하는 여성일 뿐이라는 게 김 사장의 말이다. 레즈비언은 어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변태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 김 사장의 설명이다. 김 사장의 젊은 시절만해도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스스로를 매장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편견은 여전히 레즈비언들이 짊어지고 살아야 할 무거운 짐”이라고 말한다.그는 특히 이반(일반의 반대개념으로 게이나 레즈비언같은 성적 소수자를 일컫는 은어)들을 성적호기심으로만 대하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들에게 육체적인 관계는 일반 남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사랑을 표현하고 확인하는 가장 친밀한 행위일 뿐이다. 이와 관련, 김 사장은 “이반은 육체적인 관계만을 강조하는 동성연애자와 구별된다”며 “동성애자라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일부 언론이나 매스컴은 단지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레즈비언들의 삶을 왜곡시켜 보도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는 엄연한 범죄”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4살 연하 띠동갑 애인
이날 기자가 만난 레즈비언 커플들의 사랑은 일부 언론에서처럼 한낱 호기심거리로 전락시켜 육체적인 관계만으로 묘사하기에는 너무 애틋한 감정이었다. 사랑과 이별, 배신, 삼각관계 등은 레즈비언들도 경험하는 과정이다. 김 사장은 15년 동안 사귄 애인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경험에 대해서도 담담히 털어놓았다. 죽을만큼 깊었던 이별의 상처를 이겨내고 그는 현재 24살 연하의 애인과 5년째 동거중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부치. ‘부치’란 레즈비언 사이에서 남성의 성향이 강한 사람(남자역할)을 일컫는 용어로서 그 반대는 ‘팸’이다. “처음에는 24살이라는 나이차 때문에 고민도 했다”는 김 사장. 그는 “퇴근 후 먼저 잠들어 있는 애인의 볼에 키스할 때 너무도 행복하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는 부치지만 경제적 책임외에 요리와 청소같은 집안일도 기꺼이 맡아 하는 자상한 남편(?)이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사랑싸움은 남녀간의 싸움을 훌쩍 뛰어넘는다.
사랑싸움
시간이 지나자 다정하게 손을 잡은 커플들이 카페에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곳곳에서는 커플들의 연애가 한창이었다. 커플들은 하나같이 서로의 몸에 기댄 채 ‘그들만의 밀어’를 나누느라 여념 없었다. 이날 기자가 본 많은 레즈비언들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들이었고,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바라보는 부치의 표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커플들은 애정 표현도 하고 서로에게 애교도 부리며 ‘자기야’와 같은 용어도 서슴지 않는다. 술자리에 동석한 커플들은 서로의 얼굴을 사랑스레 쳐다보며 안주를 먹여주는 등 여느 이성 커플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김사장 역시 “레즈비언들의 사랑도 일반 연인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기에 더 애틋하고 절실하다”고 전했다. 기자가 만난 부치들은 팸과의 장래를 생각하며 경제력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마치 처자식을 먹여살리려는 일반 남성가장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보통 커플들이 경험하는 갈등도 똑같이 겪으며 사귄다. 여자끼리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할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 상대편이 바람필까, 애인이 변심할까에 대한 걱정도 하고 의심을 하거나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싸울 때는 끝장볼 때까지 싸우기도 한다”는 게 김사장의 말이다.
질 나쁜 사람도 많다
김 사장은 “레즈비언 집단내에서 일종의‘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는 “여성들만 모이는 장소라고 안심할 것은 아니다”며 “나쁜 의도를 품고 이곳을 찾는 레즈비언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일부 부치들중에는 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자신의 신상을 속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 자신의 성향을 속이고 접근하는 ‘가짜’들도 있으며 한명의 팸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이간질을 하거나 부치간에 심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레즈비언 커플이라해서 무조건 한 사람만 바라보며 오래 사귀는 것은 아니다. ‘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만나기까지 짧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기도 한다는 것이 레즈비언들의 설명이다. 김 사장은 “부치는 마음에 드는 팸에게 접근하여 적극적으로 대시하기도 하는데 처음 본 이들을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신원이 불확실한 다수의 레즈비언들이 모이는 장소인만큼 별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게 김사장의 설명이다. 또 같은 레즈비언간에도 ‘아웃팅(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성적성향이 폭로되는 것)’ 협박이 이뤄지기도 한다. 예를들면 헤어지자는 애인에게 ‘레즈비언임을 가족과 회사에 알리겠다’는 아웃팅 협박을 함으로써 자신의 옆에 계속 묶어놓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김사장은 “그런 일을 당한 레즈비언의 경우 일반인들보다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는다”고 말했다. 레즈비언들과의 ‘파티’는 새벽녘까지 계속됐다. 힘겨운 표정의 팸이 부치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세상이 뭐라해도 이들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는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이었다.
이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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