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난 1월 27일 관영 중앙 라디오방송의 정론(政論)을 통해 “수령님(19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께서 생전에 ‘(혁명)과업을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한다면 손자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수행하고 말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고 공개했다. 정론은 또 “몇 해 전 경애하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께서 일꾼(노동당 간부)들에게 ‘나는 어버이 수령님(김일성)의 유훈을 받들 것’이라고 말씀하시었으며 이는 내가 가다 못가면 대를 이어서라도 끝까지 가려는 계속혁명의 사상이었다”고 보도했다.특히 “대를 이어서라도 가야 할 계속혁명의 길”로 규정했다. 특히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각각의 출생지를 따 ‘만경대·백두산 혁명일가’로 규정하고 “전통이 위대하면 계승도 위대해야 한다”며 후계문제가 이 혈통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웠다.정부 당국은 이런 언급들이 과거에도 이른바 혁명위업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나왔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번처럼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이란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무엇보다 이런 대목들이 김정일 위원장이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부자세습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증거일 것이란 판단을 북한 권력체계를 주시해온 당국자들은 내리고 있다. 현재 김 위원장이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준다면 대상은 세 명이다. 그 가운데 지난해 프랑스에서 병치료를 받다 사망한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정철(24)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김정철은 김 위원장의 외모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게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정철은 90년대 중반 스위스 베른 국제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어와 독일어 등 외국어 구사가 탁월하다고 한다. 그는 또 컴퓨터와 게임을 좋아해 IT산업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 광으로까지 불린 김 위원장이 이런 대목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얘기도 정보 소식통들 사이에서는 오르내린다. 김정철이 후계자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이다.김 위원장이 성혜림과의 사이에 낳은 장남 김정남이 2001년 5월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발각돼 국제적 망신을 당한 직후다. 이 문제로 김정남은 후계자 후보군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당시 베이징의 북한과 가까운 일부 인사들 사이에서 “김정철이 후계자로 내정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김정철 후계 지명설과 맞물려 관심을 끄는 것은 ‘백세봉’이란 인물이다. 2003년 9월 국방위원회 위원에 전격 기용된 백세봉이 김정철의 위장명칭이라는 주장이 있다. 북한이 혁명 성지(聖地)이자 김 위원장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백두산의 세 봉우리’를 줄여 우상화를 준비하는 가명이라는 것이다. 낯선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권력의 핵심인 국방위원회 위원과 우리 국회의원 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한꺼번에 맡으며 등장한 것은 그 정도의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백세봉이 김정철의 가명이라면 이미 국방위원회까지 진출해 군부 장악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난해 3월 최고인민회의 주석단의 모습을 북한TV가 이례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 회의에 김정철이 참석한 사실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분석이다.북한이 김정철의 생모인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부쩍 강화한 것도 후계자 지명 움직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였던 고영희는 훤칠한 미인이어서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철을 낳았고 두 살 터울로 정운도 얻었다. 이 무렵부터 김정일의 사랑이 고영희에게 쏠린 것으로 보인다. 관계당국은 2002년8월 조선인민군출판사가 펴낸 대외비자료가 고영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으로 표현한 것에 주목한바 있다.
그녀를 ‘국모(國母)’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74년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명할 당시 상황과 현재의 북한 권력내부 정황이 상당히 유사한 점도 북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점이다.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겠다고 결심한 김일성을 자신의 동생이자 후계 경쟁관계에 있던 2인자 김영주(노동당 조직지도부장)를 73년 숙청한다.또 사상적인 분위기 고조를 위해 74년에는 ‘온사회 주체사상화’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이런 전례를 들어 전문가들은 지난해 김 위원장이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매제(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숙청하고, 최근 ‘온 사회의 선군사상화’를 강조하는 것을 공식적인 후계지명이 임박한 징후로 보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권력승계가 이뤄진 사례는 25차례에 이른다. 이 가운데 10여 차례는 권력자의 죽음(피격·병사 포함)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실각 등이 이유였다.
권력자가 생전에 후계자를 지정한 경우도 11차례다. 하지만 북한처럼 부자간 세습을 한 경우는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려면 부담을 느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때문인지 북한은 90년대 초부터 “수령과 혈연 관계에 있는 걸출한 인물이 후계자로 추대되는 경우 그것을 덮어놓고 세습제라고 악평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는 매우 비이성적이고 반역사적인 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위원장의 가계를 ‘절세의 백두산 위인의 가문’이라며 숭배하고 있다. 오랜 사상교육과 김일성 김정일 절대숭배 체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 권력 핵심층이 3대세습에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의문이다. 또 미국 등 서방세계가 이를 그대로 두고 볼지도 걱정되는 대목이다. 북한 권력승계는 평양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후계자 문제와 관련한 김정일의 선택이 임박했다. <이현진 북한문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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