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소프트]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엔씨소프트]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6-18 08:51
  • 승인 2013.06.18 08:51
  • 호수 998
  • 4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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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먹고 꿈을 향해…게임 역사 확 바꾸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스물네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살아있는 벤처계의 신화로 불리며, 올해 당당히 코스피 상장사 중 수익률 2위를 기록한 엔씨소프트다.

어린 시절 김택진(現 대표이사)은 보통 아이들처럼 아톰이나 마징가 같은 로봇을 주제로 한 만화에 관심이 많았다. 이는 김택진의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과학 분야로 발전하게 되는 데 도움이 됐다. 과학의 기본은 수학이라는 말에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고, 중학교 시절엔 이미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을 마스터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

그러던 어느 날 동생 방에 우연히 들어갔던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보게 됐다. 개인용 컴퓨터의 효시인 애플II가 있었던 것. 그는 애플II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렸고, 곧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컴퓨터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를 알고 싶었던 그는 컴퓨터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를 연구하기 위해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국내 반향 일으킨 ‘한/글’

1985년 김택진은 한국 최고의 명문대인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금방 실망하고 말았다. 하루라도 빨리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마스터하고 싶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김택진은 스스로 모든 것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컴퓨터의 메카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컴퓨터에 관련된 소식을 하나라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외국 최신 서적을 입수해 탐독해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컴퓨터에 매진하던 어느 날 평소처럼 컴퓨터의 전원을 켜던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전기적 과정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의 세상을 깨닫고 파란색의 2진수 화면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듯이 김택진은 컴퓨터가 돌아가는 내부 구조와 작동 원리를 확연히 깨닫게 됐다. 이렇게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자 그는 컴퓨터를 활용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김택진의 관심은 점차 소프트에어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가 다니던 전자공학과는 소프트웨어와는 거리가 먼 학과였다. 때문에 전문 분야인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분야를 혼자서 끌고가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컴퓨터 동아리를 찾아 나섰다. 학생회관 2층에 있던 SCSC(서울대학교 컴퓨터 연구 동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 펼쳐진 동아리방 안의 풍경을 보면서 김택진은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학과보다도 동아리 활동이 자신에게 더 중요했었다고 말한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운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그때 꾸었던 꿈들을 이루기 위해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동아리에서 자신처럼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김택진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PC 통신 기반의 전자게시판 ‘버들골BBS’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그가 동아리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기계공학과에 다니던 이찬진(現 드림위즈·터치커넥트 대표)은 김택진에게 워드프로세서 개발팀 합류를 제안했다. 당시 이찬진은 후배인 김형집, 우원식과 함께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개발된 한/글은 1989년 발표되자마자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효시로 불릴 만큼 사회 전반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오직 한/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로 킬러 애플리케이션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마치 미국에서 로터스 (Lotus1-2-3)와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덕분에 컴퓨터 이용자가 늘었듯이 한/글 역시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한/글은 리포트를 작성해야 하는 대학생들에게는 어느덧 필수적인 소프트웨어로 자리 잡으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한/글이 출시 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이찬진은 우원식, 김형집과 함께 1990년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하지만 김택진은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를 원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한민국 인터넷 환경 구축

대학원 졸업 후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던 김택진에게 현대전자가 산업기능요원의 혜택과 해외연수를 보장하면서 취직을 제안했다.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였지만 당시 공교롭게도 7년 동안 사귀던 애인과 이별해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김택진은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해 현대전자가 제안한 해외연수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1991년 미국의 보스턴 전자연구소에 도착한 김택진은 열악한 환경에 경악하고 말았다. 방은 한 칸밖에 없었고 혼자 모든 것을 다 처리해야만 했다. 고생길이 훤한 미국행이었지만 다행히 그의 선택은 큰 행운이 돼 돌아왔다. TCP/IP 기반의 인터넷을 처음 목격하게 되면서 컴퓨터를 봤을 때만큼의 충격에 빠지게 됐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인터넷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통신 표준 규약인 TCP/IP 기술이 필요했다.

미국행은 그에게 미국의 벤처기업들을 직접 지켜볼 수 있는 기회도 됐다. 특히 그가 주목했던 ‘FTP’ 회사는 IBM PC에서 인터넷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TCP/IP를 주목적으로 연구했다. 이에 김택진 역시 한국에서도 인터넷을 전파하겠다는 각오로 TCP/IP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에서 한글이 안 되던 시기였던 만큼 그는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TCP/IP 서비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의 한글 운동이 인터넷으로 발전된 셈이다.

1년 6개월 동안 연구에 매진한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택진은 1995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 최초의 인터넷 기반의 포털 서비스인 아미넷((現 신비로) 개발에 매진했다.

현대전자에서 김택진은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는데, 그중 그의 인상에 남은 서비스는 댓글 시스템이었다. 개방과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터넷의 철학을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게시판에 글을 쓰고 읽는 방식만 있었기 때문에 댓글 시스템은 매우 획기적인 서비스로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김택진은 현대전자에서 산업기능요원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그런데 당시 현대그룹 내부에서는 김택진이 구축한 인터넷 서비스인 아미넷을 두고 분열이 일어났다. 현대전자와 현대정보통신이 서로 인터넷사업 분야를 전담하기 위해서 주도권 싸움을 벌인 것. 정작 아미넷의 총 개발 책임자인 김택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1년 넘게 사업은 표류하게 됐고 이러한 그룹 간의 파워 싸움을 지켜보던 그는 대기업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회사를 새롭게 세울 결심을 했다.

1997년 그가 창업한 회사가 바로 오늘날 벤처기업의 시작이라 불리는 ‘엔씨소프트’이다. 엔씨소프트라는 이름은 새롭게 회사를 창업하기 전에 뜻을 함께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다음 회사를 구상한다는 의미로 불렀던 ‘Next Company'의 약자였다.

이 당시 프로그래머로서 김택진의 능력은 마이크로소프트도 인정할 만큼 뛰어났다. 1998년 당시 그를 마이크로소프트 리저널 디렉터러 선정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리저널 디렉터란 MS의제품들을 무료로 제공받고 제품에 대한 의견을 모니터링하는 일을 하는데, 각 나라에서 한두 명밖에 뽑지 않는다. 리저널 디렉터가 됐다는 것은 김택진이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프로그래머이자 컴퓨터 전문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엔씨소프트는 국내 최초로 100% 순수 인터넷 기반의 넷츠고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이로 인해 SK로부터 인터넷 기반의 PC 통신서비스인 넷츠고 프로그램 제작 의뢰는 물론 대우, KCC, 금호 등의 유수 기업들의 인터넷 환경 구축도 맡았다. 이와 동시에 김택진은 뭔가 다른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고 싶어졌다. 당시 국내에서는 정보를 제공하는 다른 인터넷 업체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김택진은 정보가 아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도구로써 인터넷을 활용하고 싶었다. 특히 그는 소프트웨어를 수출하고 싶다는 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한/글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만들었지만 한국 시장에 한정돼 있었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수출이야말로 애국이라고 배웠던 그는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외국으로 수출하고 싶은 열망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한/글 개발을 통해서 명백한 한계를 경험한 만큼 기존에 만들었던 제품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김택진은 이미 틀이 잡힌 사무용 프로그램보다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진출하고 싶었다. 엔터테인먼트, 수출, 창조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분야를 찾던 중 결국 김택진은 엔씨소프트의 차세대 사업으로 게임을 고심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리니지와 아이온의 신화 김택진 스토리 中│김정남 지음│e비즈북스>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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