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비걷어 사라지는 방장
“방장은 완전 전문 사기꾼이었다.” 황당한 번개를 경험했다는 대학생 김수미(21·가명)씨의 말이다. 한달 전 어느 토요일, 김씨는 강남역에서 열린 단체번개에 나갔다. 채팅에 개설된 단체번개방에 들어가 사람들과 대화를 하던 중 방장의 제안에 응하게 된 것이다.남녀 각각 10명 규모로 진행된 이날 모임에 나간 수미씨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방장의 행동이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며 말문을 열었다.이날 번개는 강남역 인근 어느 건물지하에 위치한 술집에서 진행됐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모임은 남자는 3만원, 여자는 만원의 회비를 걷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회비는 ‘당연히’ 번개를 주선한 방장이 맡았다.약속된 인원이 모두 모이자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동안 주변에서 말로만 듣던 단체번개와는 너무 달랐다. 얼굴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술잔이 몇 번씩이나 돌아갔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기대했던 이벤트는 아예 없었다”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이날 방장의 태도는 ‘짜릿한 재미만점의 이벤트’를 내세우며 채팅상에서 사람들을 마구 끌어모으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채팅상에서 방장은 “다양한 게임과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모여도 어색할 일은 절대 없다”며 호언장담을 했던 것이다.김씨는 “방장은 모임의 분위기를 띄우거나 주도하려는 노력조차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리를 비우거나 휴대폰으로 오랫동안 통화를 하는 등 딴 짓만 계속 하더라는 것. 모인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쉽게 친해지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무료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참다못해 불만을 표출하자 방장은 “2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내가 미리 계산하고 나가서 마땅한 술집을 알아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그러나 남아있던 사람들이 방장의 ‘잠적’을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아직 계산이 안됐다”는 술집주인의 말 때문이었다.남아있던 사람들은 ‘설마…’하면서도 슬슬 동요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방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장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방장은 사람들에게 걷은 40만원 상당의 회비를 몽땅 가지고 달아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흥분했다. 모두들 “그 사기꾼을 신고해야한다”고 입을 모았지만 문제는 아무도 방장의 신상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채팅상에서 말그대로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이뤄진 단체번개였기에 서로에 대한 신상을 알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남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돈을 모아 술값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김씨는 “그날 주문한 것은 소주 15병 정도에 안주 4개가 전부였다”며 “술값은 기껏해야 10만원 정도였는데 회비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술값까지 덮어씌우고 도망갔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생전 처음보는 방장을 믿고 회비를 낸 것이 실수였다”는 김씨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며 손을 내저었다.
게임빌미로 성희롱
기자는 김씨의 경우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경험했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은행에 근무하는 전승숙(30·가명)씨는 종로 단체번개에 나갔다가 “마음에 상처만 입었다”고 말했다.그는”건전한 친목도모 모임과는 완전 거리가 멀었다”며 번개경험담에 대해 입을 열었다.평소 내성적인 성격인 전씨는 다양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망설임끝에 단체번개에 나가게 됐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직장인 열명이 모여 이루어진 이날 번개는 전씨가 애초에 우려한 것과는 달리 무척 유쾌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이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서먹서먹함은 처음 잠깐뿐이었다. 술과 게임이 곁들여진 이날 모임에 모두들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평소 낯가림을 심하게 하는 나도 활발한 성격의 사람들로 인해 그나마 적응이 쉬웠다”는 그는 “모임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 몇시간뿐이었다. 어느정도 술이 들어가고 시간이 늦어지자 분위기는 묘하게 변했다. 특히 처음에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대하던 남자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들은 존댓말대신 상스러운 욕이 섞인 반말로 일관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들의 입에서는 음담패설 및 직접적인 성희롱이 시작됐다. 여성은 남자들의 ‘성적인 안주거리”에 불과했다.전씨는 “위 아래로 훑어보며 신체 사이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약과였다”고 전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남자들이 내게 여지껏 몇 명과 자봤냐는 질문에서부터 나이가 있으니까 성경험이 많겠다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며 지네들끼리 낄낄대는데 몹시 불쾌했다”고 당시 느낌을 전했다.그녀는 “내가 민망해하자 그들은 오히려 ‘알거 다아는 아줌마가 내숭떤다’며 직접적인 인신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이날 진행된 게임 역시 과다한 신체접촉과 음란한 언어들로 뒤범벅된 ‘저질’이었다. 게임에서 지면 ‘벌주’를 억지로 먹이고 스킨십을 유도하거나 야한 벌칙을 가하는 것도 예사였다. 그녀는 몇 번씩이나 망설이다 그날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내용인즉 그날 나온 여성 중 한명이 지나친 음주로 인해 인사불성상태가 되자 남자들은 ‘가위바위보’를 통해 ‘당번’을 정했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남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들쳐업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머지 남자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묵인하더라는 것. 택시를 태워 집에 데려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결국 그들은 “누가 저 여자랑 자느냐”를 걸고 내기를 한 것이었다.전씨는 “그가 술취한 여성을 집에 데려다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날 만났던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술을 먹여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결국 ‘원나잇’을 목적으로 나온 것 아니겠느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매상올리기 대작전
신촌 단체번개방 중 하나는 악명이 자자하다. K(24)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걔네들은 완전 사기꾼”이라며 언성을 높였다. K씨가 신촌의 한 단체번개에 참석한 것은 군대에서 마지막 휴가를 나온 1년전 어느 날이었다. “<신촌단체번개> 술과 안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남자분 부족! 누구든지 O.K! 군바리도 O.K!”라는 방제가 눈에 띄어 참석하게 된 것이다. K씨는 번개장소인 신촌의 한 실내 포장마차에 도착했을 때 방장의 말대로 여자들이 많은 것에 내심 흐믓했다고 말했다. 채팅상으로는 서로 모르는 사이라던 여성들이 막상 만나보니 그들끼리 지나치게 친밀한 점이 이상했지만 남성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처음 만났음에도 싹싹하게 잘 놀고 술도 잘 마시는 여성들로 인해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엄청 마셨다”고 K씨는 전했다. K씨는 “여자애들이 끝도없이 비싼 안주를 시키고 소주대신 한 병에 9,000원 짜리 약술만 마시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의심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뒤 우연히 채팅 사이트에 들어간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 실내포장마차에서 열리는 신촌 단체번개에서 사기를 당했다는 사연이 채팅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그 단체번개방은 K씨가 참가했던 바로 그 모임이었던 것. ‘나도 깜쪽같이 속았다’는 남성들은 부지기수였다. 그 모임에 참가했다가 피해를 봤다는 한 남성이 밝힌 사연을 들은 K씨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K씨가 참석한 단체번개는 완전 사기였다. 그날 번개 주선자 및 참가 여성들은 모두 그 술집 종업원 및 그들의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주일에 서너번씩 순수한 단체번개를 가장해 남성들을 모집한 뒤 자기네 가게로 끌어들여 가게 매상을 올려왔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K씨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마신 술값을 낸 것이기 때문에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매상을 위해 계획적인 사전모의를 통해 단체번개를 주선했다는 자체가 너무 소름끼치는 것 아닌가”라는 K씨는 그 당시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고 했다.이날 K씨를 비롯해 8명이 마신 술값은 무려 50만원에 달했다.
이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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