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스물세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한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솔선수범해 타기업의 모범이 되고 있는 유한양행이다.
“이윤추구는 기업성장의 선행조건이지만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회장은 1895년 평양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유기연 공(公)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서양 문명을 빨리 받아들였다. 특히 일본을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그는 1904년 고작 아홉 살인 유 회장을 대한제국 순회공사였던 박장현 손에 맡겨 미국에 조기 유학을 보냈다. 말이 조기 유학이지 집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못했던 유 회장은 낯선 타지에서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따라서 유 회장은 미국에서 신문 배달 등 고학을 하며 학업에 열중했다. 1912년 헤스팅스고등학교 재학 당시에는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장학금까지 받았다. 1915년 미시건대학에 입학해 1919년에는 대학 졸업 후 제너럴일렉트릭사(General Electric CO: GE)에 입사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회계사로 일했다.
독립 위해 기업가 결심
유 회장이 민족을 위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때는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다. 조국의 독립운동에 자금으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 이에 유 회장은 당시 근무하던 GE사를 그만두고 1922년 미국에서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인 ‘라초이(La CHoy Co.)’식품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숙주나물을 아이템으로 하는 해당 회사는 날로 번창해 대성공을 거뒀고,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어들였다. 유 회장은 그 이익 중 일부를 독립운동에 지원했다.
그러나 30세가 되던 1925년, 회사일로 중국 및 동남아 등지를 방문했던 유 회장은 잠시 들른 조선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보건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는 동포들을 직접 보게 된 것.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 회장은 1927년 미국에서 운영하던 라초이 식품회사를 청산하고 귀국했다. 헐벗은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좋은 약을 제공해 한민족의 생활 문화를 향상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조국의 동포들을 돕고자 개인의 사비로 서울 종로 2가 덕원빌딩에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유 회장이 유한양행의 로고를 버들표로 한 것에는 재밌는 일화가 담겨있다. 유 회장이 유한양행을 만든다고 하자 미주 독립운동 동반자였던 서재필 박사는 유 회장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그것은 서 박사의 영애가 직접 만든 버들표 목각품으로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훗날 버들표는 ‘유한양행’의 상징이 됐다.
미국에서 귀국할 당시 유 회장은 많은 의약품을 가지고 왔다. 이는 2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 가장 필요한 사업은 의료분야이며, 의약품 사업이 조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 회장은 의약품 이외에도 화장지, 생리대, 비누, 치약 등 각종 위생용품을 수입해서 팔았다. 결핵약, 진통소염제, 혈청, 피부병약 등 꼭 필요한 것들을 위주로 판매했으며 특히 유한양행에서 직접 제조해서 판매한 안티푸라민은 가정상비약으로 많은 인기를 받아 중국, 대만에도 지점을 개설해 판매망을 넓혀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회사에 대한 일본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유 회장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유 회장은 미국 육군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산하 한국담당 고문으로 발탁됐다. 이때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인 펄벅(Pearl Buck, 1892.6.26~1973.3. 6)이 중국 고문으로 발탁돼 유 회장과 친분을 가지게 됐다.
내 인생에 포기란 없다
유 회장은 광복 이후 1946년 7월 유한양행 사장으로 복귀해 회사를 다시 돌보았지만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중국과 북한에 남아있는 모든 자산을 잃게 됐다. 이에 따라 1948년 유 회장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이후 국내로 입국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돼 입국하지 못했다.
1953년 귀국한 유 회장은 전쟁으로 파괴된 회사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그의 노력은 빛을 발했고 1957년 미국 제약회사인 사이나미드와 기술 제휴 협약을 통해 그 해 국내 최초의 항생물질 제품을 만들었다. 1962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두 번째로 기업 공개를 통해 투명경영을 실현했다.
정직한 세금납부로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유 회장은 국가에 내는 세금이야 말로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세금을 차질 없이 납부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했다.
국가는 세금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므로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사회적 책임 몸소 실천
현재 유한양행은 국내기업 중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특히 ‘기업과 종업원은 공동운명체’라는 신념 아래 1936년 회사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실질적인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매년 정기적인 노사협의회를 개최해 직원들의 애로점과 아이디어를 복지와 경영에 반영해오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유한양행은 창업 이후 단 한차례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유 회장의 유언에 따라 도입한 전문경영인 체제와 주식의 사회환원도 이를 뒷받침한다. 1971년 유 회장은 유언을 통해 경영권을 자녀가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고, 보유한 회사 지분도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넘김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완성했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경영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유 회장은 유언장에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와 학생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들 유한동산 조성용 토지 5000평을 제외한 전 재산을 공익 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사후까지 변함없는 사회공익사업을 실천하려는 유 회장의 의지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재단 설립 목적 자체가 항구적 사회공익사업을 펼쳐가기 위한 것인 만큼, 유언장은 유 회장의 신념이 응축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유 회장은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1963년 개인소유주식 1만 2000주를 연세대학교와 보건 장학회에 각각 기부했다. 1965년에는 개인주식 5만 6000주를 팔아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영등포구에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건립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에 현재 유한재단은 장학사업과 교육지원사업을 하고 있고, 유한학원은 유한대학,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운영 중이다.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유한재단(15.4%)과 유한학원(7.6%)의 존재로 유한양행은 배당금의 상당 부분을 지속적으로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하게 됐다.
이처럼 유 회장은 기업을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기업의 주인은 사회이고, 기업가는 이를 맡아 관리하는 것 뿐이라 했다. 그가 ‘청지기’ 정신을 실현한 사람이라 평가 받는 이유다. 청지기는 일과 재산을 맡아 관리할 뿐이며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노력해야 하는 일꾼이다.
그는 재물의 소유보다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고, 일의 의미는 인간적 가치를 높여 주는 데 있다고 믿었다. 수입은 적고 돈벌이는 잘 안되더라도 이웃과 남을 위한 봉사의 뜻을 남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고 실제 그렇게 살았다.
현재 유한양행은 사회에 대한 신용,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 모범적인 노사관계, 기업복리후생제도 선도기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신약개발과 우수 의약품 생산에 전념하고 있다. 2014년 비전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1등 보건기업’을 제시하며 매출액 1조7000억 원, 영업이익률 15%를 목표로 한다.
고객에게 가장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사회에는 기업의 책임을 다하고, 주주에게 최고의 성과창출로 기업가치를 제고하며, 임직원에게 ‘상생의 파트너십’을 제공한다는 비전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정리=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