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시녀’ 인가, ‘무소불위’의 집단인가…
‘권력의 시녀’ 인가, ‘무소불위’의 집단인가…
  • 이수향 
  • 입력 2005-05-31 09:00
  • 승인 2005.05.3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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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검찰은 다시 태어날 것인가.’지금 서초동 검찰청은 긴장이 흐르고 있다. 세칭 ‘사법개혁’이 최대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검찰권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검찰권에 대한 위협의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한국 검찰은 1백년 역사(대한민국 헌법 공포시점인 1948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검찰 역사는 57년이다)를 자랑하는 한국 검찰은 재탄생의 기로에 서 있다. 특히 수사권 축소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면서 검찰은 경찰과 치열한 ‘밥그릇싸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또 사개추위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중 검사작성 조서의 증거능력과 공판정에서의 검사의 직접신문제한 등이 검찰의 수사권 침해라는 주장 등으로 검찰은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검찰개혁은 거론되어 왔지만 현재까지 검찰의 막강한 권력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과거 정권들이 검찰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검사들이 이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 대가를 나눠갖는 파행적인 검찰상이 형성됐다는 비판도 상존하고 있어온 게 사실이다. 또 최근 각종 사건과 연루되어 검찰의 명예와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신문광고를 통해 검찰 전체를 ‘마피아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국민의 이름으로 해고한다’는 극언까지 퍼부은 바 있다. ‘검찰이 여전히 정치검찰’이었음을 고백한 심재륜 대구고검장의 폭탄성명은 검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권력남용의 역사
경상대 법대 이창호 교수는 “검찰이 지킨 질서는 일본제국주의와 군사독재의 질서이자 재벌과 권력의 질서”라며 “검찰의 역사는 민중에 대한 억압의 역사’라고 비판했다. “일제에 의해 나라 전체가 유린되었을 때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미군정에 빌붙어 민족을 유린하고, 군사독재와 문민독재에 아부하며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 온 것이 검찰 백년의 역사”라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갖지 못한 일반인들에 대해서는 유죄판결과 중형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존재로 인식된 반면, 권력과 부를 누리는 자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존재로 인식되어 온 것이 검찰이다. 이는 그동안 검찰이 권력층의 정치적 의혹사건, 정경유착에 의한 대형 경제적 부정사건, 재벌의 변칙증여와 탈세사건,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사건, 선거법 위반사건 등에 대해서는 사법적 대응을 기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던 반면 노동자와 학생 등 양심범에 대한 공소권의 남용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근대검찰제도의 도입
한국 검찰의 역사는 1894년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 3월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되면서 근대검찰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때 ‘검사’라는 직업도 최초로 등장했는데 당시 독립된 검찰기구는 아니었고, 재판소의 직원으로서 소추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제도가 정착되기도 전에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진행되면서 검찰제도를 비롯한 근대사법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해방 이후 이승만정권
해방 후에도 법원 소속이었던 검찰은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직후 남조선과도정부법령 213호로 검찰청법이 공포됨으로써,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검찰조직을 구축하게 된다. 초대 검찰총장인 권승열씨는 반민특위의 특검관장(검찰총장 겸직)을 맡기도 하였는데 그는 검찰총장에서 법무부장관으로 영전하고,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으로 곧바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검찰이 철저하게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같은 전통(?)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다. 검찰을 총지휘했던 인사를 장관으로 영전시킨 후 그를 통해 검찰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는 것은 정부 수립단계부터 써먹던 통치술수였던 것. 검찰지도부나 구성원들은 검찰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 검찰은 의기(義氣)가 살아 있었으며 권력의 크기도 경찰에 비해 보잘것없이 작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5·16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검찰의 위상은 본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박정희는 육군법무감실 검찰과장 장순영 대령을 검찰총장에 임명하고 1963년 36세의 신직수 변호사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신직수씨는 1971년까지 무려 7년 반 동안이나 검찰총장으로 재직하였고, 1973년 12월부터 만 3년 동안은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재직하였다. 이처럼 박정희는 최소한의 원칙도 없이 검찰조직을 ‘떡주무르듯’ 했는데, 검찰조직은 쿠데타를 감행한 군인들의 이해와 요구만을 대변하면서 전형적인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검찰이 형사사법제도에서 아무런 여과장치도 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검찰이 공범관계인으로 등장하는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1973년 구속적부심사제도의 폐지와 함께 재정신청 범위가 축소됨으로써 국민의 인권은 안전에도 없는 검찰운영이 계속된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이러한 분위기는 전두환 정권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검찰 조직 내에서 정권유지의 첨병이 되는 공안부서는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1981년 정치근은 고검장, 대검차장 등의 최소한의 단계도 거치지 않은 채 부산지검 검사장에서 곧바로 검찰총장으로 임명된다. 유명한 공안통이었던 정치근의 취임으로 공안검사들은 검찰 수뇌부를 대거 장악하게 된다. 노태우 정권 때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검찰권력이 비약적으로 커지게 된다. 보안사나 안기부, 경찰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지난 시기에 비해,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재야 법조계도 민변의 출범 등으로 시국사건을 비롯한 각종 형사사건에서의 치열한 법정공방이 일어난다. 노태우 정권은 쿠데타 세력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법적 정당성에 집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검찰의 권력이 비약적으로 커지게 된다.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김영삼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하나회에 대한 해체와 검찰을 통한 사정 정국을 주도해 나간다. 이러한 모습은 노태우 정권이 5공 비리 청산을 통해 정권의 취약한 기반을 보강하려고 했던 것과 유사하게 전개된다. 검찰의 대표적인 ‘나라 걱정(?)’은 김도언 검찰총장 시절의 5·18 쿠데타에 대한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절정에 이른다. 이런 ‘정치검찰’의 면모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최소 50년 동안 이어져온 것이었다. 김도언의 뒤를 이은 김기수 검찰총장은 전두환, 노태우씨를 구속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검찰의 개가가 아닌 국민의 성과였다. 또 전두환, 노태우 등 살아있는 권력을 통한 과거권력의 단죄는 가능했지만, 한보, 김현철 등 살아있는 권력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한없이 정치적이었다. 이는 김대중 정부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검찰은 기소권의 독점, 기소편의주의 등 법에 보장된 무소불위의 권한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나, 1980년대까지는 경찰,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군(보안사 등)의 위력에 눌려 단순한 법적 실무자 집단으로 권력에 기생하였다. 1990년대 들어 검찰이 막강한 현실적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통령이나 법원에 의한 통제는 실효성을 잃게되고, 마침내 김대중 정권부터는 ‘검찰공화국’이란 말까지 나오게 된다.

검찰의 오늘
한편 2003년 송광수 검찰총장이 부임하면서 한국 검찰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특히 2003년 8월부터 9개월여 동안 강도 높게 진행된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현직 대통령에게도 수사의 날을 겨누는 등 ‘살아 있는 권력’을 파헤친 사건이었다. 정대철 전 의원 등 여권 실세와 안희정, 이광재씨 등 대통령 측근을 사법처리하고, 주요 대기업 고위 임원을 법정에 세웠다. 정·재계를 뒤흔든 대선자금 수사는 정치자금 수수 등 잘못된 관행을 없애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검찰은 현재 두 개의 대형 사건을 수사중이다. 여당이 관련된 러시아 유전개발관련 사건과 서울시청 공무원 등이 연루된 서울시의 청계천복구와 관련된 재개발 비리사건이 그것이다. 국민은 검찰이 이 두 사건을 얼마나 공정하게 수사하느냐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다. 과연 검찰이 과거의 치욕스런 불명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 역대 주요 검찰총장

- 초대 총장 권승렬(48.10.31~49.6.5)48년 국가보안법과 국적법을 제정했으며 49년 3월 민애청 요인 암살 음모사건을 수사했다.

- 11대 신직수 총장(1963.12. 7 - 1971. 6. 3)1965년 6월 검찰, 세관, 경찰, 군수사기관 등으로 특별밀수합동수사반을 편성했으며 1967년 11월 동백림공작단사건 피의자 34명을 기소했다.

- 13대 총장 김치열(1973.12.3 - 1975.12.18) 1973년 12월 개정 형사소송법을 공포함으로써 긴급구속여건을 강화했다. 1974년 9월 12일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으로 문세광을 기소했다. 1975년에는 국가모독죄가 신설된 개정형법을 공포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김대두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 18대 총장 정치근(1981.12.16 - 1982.5.21) 1982년 2월 검찰관내 동향보고제를 실시하는 한편 검찰업무 전산화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 22대 총장 김기춘(1988.12.6 - 1990.12.5) 1988년 12월 31일 국가모독죄폐지를 골격으로한 개정형법을 공포했으며 89년 2월 대검찰청 마약과를 신설했다.90년 10월 13일에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 26대 총장 김도언(1994.3.8 - 1994.9.13) 1994년 6월 삼성동 존속살해사건 범인 박한상, 지존파 연쇄 납치 살해사건 피의자 7명을 기소했다.

- 28대 총장 김태정(1997.8. 7 - 1999.5.24) 1997년 9월 6일’자녀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 추진기획단을 발족하는 한편 같은해 12월에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금붙이 모집 및 매각 운동’을 전개했다. 98년 1월에는 검찰제도개혁위원회를 발족했으며 같은해 7월 ‘병무비리 사건’으로 피의자 144명을 기소했다.

- 33대 총장 송광수(2003.4.3 - 2005.4.2)대선자금 수사의 공명정대한 처리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했으며 피의자신문시 변호인 참여 전면 실시, 가족참관 허용 등 국민인권을 존중하는 검찰상을 확립했다. 또 범죄피해자지원시스템 도입으로 소외된 범죄피해자에 대한 보호체계를 확립하는 동시에 검찰 시민 옴브즈만, 시민 모니터링제 실시로 국민이 참여하고 국민에게 다가가는 검찰상을 확립했다는 평을 듣고있다.

이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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