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안은혜 기자] 대통령 후보는 실천가능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공약을 개발하고, 유권자들은 공약의 진정성 여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의식을 갖춰야 하는 것이 덕목이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나오는 ‘뻥튀기 공약(公約)’은 선거 이후 흐지부지 되는 공약(空約)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대통령직선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대선 공약을 살펴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통령 중간평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원내각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DJP연대와 농가부채탕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이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운하 건설’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이렇다 할 공약이 없었다. [일요서울]이 역대 대통령에겐 있고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없는 ‘대선 공약(公約)’에 대해 분석해봤다.
YS‘금융실명제’ DJ‘DJP연대와 농가부채탕감’
盧‘행정수도 이전’ MB‘대운하 건설’박통…
역대 한국 대통령들 중에는 핵심 대선공약을 임기 내 지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당초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경우부터 야권의 반대에 포기한 사례 등 이유는 다양했다. 대선 공약 불이행은 국민들에게 정책적 혼란을 가져와 많은 사회적 비용을 낭비시키고, 정치권에 대한 불신도 높아지기 때문에 공약은 준비하는 단계부터 검증과 신중함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핵심 공약 대부분은 임기 내 이루지 못했지만 대통령 당선에 주효하면서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를 그대로 반영했다.
역대 대통령
국민도 ‘혹’한 대선공약
한국에서 대선공약 대결이 본격화된 것은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의 13대 대선 이후다.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선후보는 임기 중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에게 신임을 다시 물어 지지를 얻지 못하면 중간에 그만두겠다는 ‘대통령 중간평가’를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야당과 모종의 밀약 끝에 헌정사 최초로 공약을 폐기해 국정 주도권을 상실하는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정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민자당 김영삼 대선후보는 이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文民)정부를 출범시켰다. 내각제개헌을 통해 그 다음 정권부터 권력을 분산시켜 나눠서 갖고 싶어 했지만 대통령 된 이후 내각제로의 개헌은 백지화됐다.
1993년 8월 12일 김 전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내놨던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기 위한 긴급 명령을 통해 차명 거래와 가명 거래를 금지해 부정부패를 막는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유세 현장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쌀 개방을 막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군부, 하나회를 비롯한 대한민국 국군 내 사조직을 해산시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했다. 그러나 임기 말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인해 경제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 정치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 지방선거에 적극 참여해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 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97년 10월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뤘다.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농가부채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어 농민들의 표를 많이 얻었다. 또한 국민들은 IMF 극복을 약속한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농가부채 탕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집권 4년 만에 IMF에서 받은 구제 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의로 정치에 입문,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에 대해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해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단일 후보가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전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는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의 공약을 내걸어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직후 곧바로 ‘행정수도이전’ 관련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위헌 결정으로 백지화됐고,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
17대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당선 이후 여론의 반대가 높아 반발에 부딪히자 이 전 대통령은 취임 4개월 만에 “국민이 반대하면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며 이후 이 공약을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전환해 임기 말인 2012년에 완공했다. 하지만 22조 2천억 원이라는 사업비 때문에 예산 낭비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밖에도 동남권 신공항, 경제성장률 7%, 주가 3000시대 등이 하나도 지켜지지 못하면서 ‘경제대통령’ 이미지가 추락했다.
취임 100일 여론조사
대선 득표율보다 높아
한편, 18대 대선은 역대 선거 중 각종 개발 공약이 가장 적은 선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17대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이 내걸었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후 ‘4대강 사업’으로 전환) 같은 대형 국책사업 공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역대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들이 가장 강하게 내세웠고, 선거 때 다른 이슈들을 삼켜버렸던 공약들은 당선 이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당선 후 대선 공약에 가까운 국정 운영의 새로운 목표와 사업들을 만들어 지지율을 올렸다가 임기 말엔 지지율이 바닥을 쳤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제 취임 100일 지난 박 대통령이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치열한 선거에서 인기 영합의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늘 말해왔던 공약만 내세웠던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을거라고 본다” 고 말했다.
취임 100일을 전후해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전국 성인남녀 1216명을 대상으로 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대선 때 득표율 51.6%보다 높은 52%가 나왔다. 역대 대통령과 같은 국책사업 공약은 없었지만 자신이 내걸었던 공약에 대한 이행 의지가 높다는데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역대 정부 처음으로 발표한 공약가계부(재정지원 실천계획)를 두고 하는 말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모든 부처가 ‘공약 가계부’를 만들어 국민 앞에 내놨다. 정책 공약 하나하나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국민의 신뢰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본다.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전국에 필요한 공약을 재정계획을 고려해 다듬어진 국정 운영이라면 역대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에게 주목을 끌만한 대선 공약은 없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100일은 다양한 정책과 제도개선이 추진됐다. 또 전임 정부에서 추진한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한 검증작업도 시작했다. 역대 대통령에게는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없는 것이 공약만이 아니란 것을 앞으로 임기 내에 보여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안은혜 기자 iamgrac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