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스물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를 탄생시키며 대한민국 펀드의 역사를 창조한 미래에셋그룹이다.
“창업한 뒤 미래엣셋펀드에 투자한 고객 여러분이 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보람을 느낍니다. 감동도 받습니다. 국내 자본시장이 성장하고 그 속에서 미래에셋의 의미 있는 회사가 된 것은 모두 고객 여러분의 든든한 지원 덕분입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27살에 세운 첫 회사
나는 젊은이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꿈을 꾸지 않는 젊음은 더 이상 젊은이라 부를 수 없다. 대학시절부터 내겐 꿈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 자본시장에서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꿈을 기준으로 긴 여행의 출발점을 선택했다. 그래서 첫 직장으로 박봉에 사회적 인식도 좋지 않았던 증권회사에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1987년도에 증권회사에 입사했을 때 성과급을 제외한 월 급여는 약 12만 원이었다. 경영학과 졸업생들에게 최고 인기 직장이었던 단자회사나 종합금융회사는 월 85만 원선이었다. 단자회사의 고졸 여직원 급여는 40~50만 원으로 증권사 대졸 직원보다 많던 시절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연봉 많은 이들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입사하기를 원했다. 이들 회사는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반면 증권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증권사 직원들은 꼴등 신랑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증권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음에도 내가 증권사를 선택한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2학년 때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증권시장에 대한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나는 어머니가 보내주신 생활비로 증권투자를 하면서 당시 증권 1번지인 서울 명동의 증권 객장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당시 증권사 영업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시장이 끝난 뒤 삼삼오오 모여 객장에서 고스톱을 치는 것은 당시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자본시장이나 영업직원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주식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증권사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실망감만 가득 차올랐다. 그래서 고민 끝에 만든 것이 내외증권연구소였다. 나는 그동안 증권투자로 번 돈과 고객에게서 받은 자문료로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빌딩에 33㎡(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었다. 1985년의 일로 그때 내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자문회사인데 당시만 해도 관련 법규 하나 없었다.
친구의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다. 덕분에 고객도 꽤 확보했고 투자수익률도 좋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돈은 벌 수 있었지만 미래에 대해 보다 큰 그림을 그려 보고픈 갈증이 있었다.
때마침 일본 증권역사에 관한 책을 한 권 얻은 나는 외국어대 일어과 학생에게 번역료를 주고 책을 요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증권 산업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다. 그 책에는 일본의 소니(SONY)가 미국 증권시장에 해외예탁증서(ARD)를 발행한 후 주가가 크게 상승했고, 증시 호황에 따라 증권주도 천문학적인 수익률을 기록했다는 내용 등이 나와 있었다. 그 책을 통해 전후 일본 자본시장의 발달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는 그 내용을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입해봤다.
1980년대에 우리나라는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84년부터 저금리·저유가·저물가의 ‘3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신문을 통해 삼성전자가 전환사채(CB)를 발행한다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이제 우리나라도 자본시장이 발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증권주는 폭발적으로 시세를 분출했고 우량주들도 많이 올랐다. 이를 통해 시장을 정확히 봤다는 만족감은 있었지만 ‘투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 갈증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주식투자로 수익을 내자 명동 증권가에서 ‘재미난 애가 하나 나타났다’며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루머나 정보로 주식을 매매하는데 비해, 내가 나름대로 분석을 통해 주식투자를 해 수익을 내니 그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대학시절의 투자 경험은 이후 내 투자 철학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우량주에 장기투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갖게 됐고, 가치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설비투자의 장기적 효과를 이해하게 된 것도 이시기이다.
1970년대 일본이나 1980년대 한국처럼 기업이 설비투자를 하면 장기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주식시장이 좋아진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주식 공부를 하던 이 시기에 내 꿈이 만들어진 것 같다. 주식에 매달려 있느라 학점은 썩 좋지 못했지만 ‘이 다음에 꼭 자산운용을 하고 싶다’는 미래의 꿈이 가슴 속에 깊이 들어와 박혔던 시기였다.
증권업의 현실도 나를 증권 쪽으로 끌어들였다. 앞서 이야기했듯 당시 증권사 객장은 장이 끝난 후 고스톱을 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졸자는 기획실 같은 본사 부서 외에는 거의 없었다.
사회생활이라는 인생의 긴 여정을 눈앞의 현실보다 미래를 보고 결정했었다. 배경이 없는 내가 성공하는 방법은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 뒤 1980년대 말 증권시장이 대폭발하고 증권사 직원들이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나면서 증권사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박현주 1호 펀드 탄생
미래에셋은 자산운용사가 아닌 벤처캐피탈로 시작했다. 원래 자산운용업을 하고 싶었지만 1997년만 해도 인허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나는 한국의 신성장 동력 중 하나인 벤처 비즈니스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정보화로 인한 새로운 비즈니스의 탄생, 특히 인터넷 비즈니스의 발전은 새로운 문명을 창출할 뿐 아니라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벤처 투자를 하면서 터득한 소중한 교훈은 분산투자의 중요성이었다. 나는 다음커뮤니케이션, 한국정보공학 같은 기업에 투자한 것은 성공했지만, 수십 개의 기업이 부도나는 실패도 경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산운용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외환위기 구조 개혁 차원에서 국제통화기금의 권고사항대로 자산운용업의 설립 규정이 납입자본금 100억 원으로 낮춰진 것이다. 이로 인해 폐쇄형 뮤추얼펀드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폐쇄형은 개방형과 달리 일정 기간 동안 돈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환금성이 나쁘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장기간 운용해야 하는 펀드운용자 입장에서 만기가 있는 폐쇄형은 운용 기간에 따른 제약이 있었다. 때문에 기존 투자신탁회사들은 이 상품에 대해 대부분 회의적이었다. 이미 투자신탁상품이 있는데 굳이 폐쇄형을 판매할 필요가 있느냐는 게 업계의 분위기였다.
펀드시장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외환위기 한파의 여진이 남아 있던 터라 ‘주식형 펀드 투자=손실’ 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투자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나와 우리 회사 임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회사들이 폐쇄형 펀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를 전형적인 ‘소수 게임의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투자자들의 변화하는 니즈(needs)였다. 우리는 폐쇄형이라는 한계보다는 투명한 운용에 추점을 맞췄다.
외환위기 이후 투자신탁회사들의 신뢰는 땅 밑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수익률도 수익률이지만 펀드운용 관행이 투명하지 않았고, 실적배당상품을 마치 확정예금처럼 판매하는 관행이 횡행했다. 이러한 상황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투명성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마침 고객의 니즈와 뮤추얼펀드의 투명성은 서로 잘 부합하는 요소였다.
나는 고객에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운용하는 회사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박현주 펀드’라는 이름으로 펀드를 출시했다. 1998년 12월, 미래에셋은 다른 회사들보다 앞서 삼성증권 창구를 통해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 판매에 돌입했다. 삼성증권을 통해 판매를 시작한 것은 당시 부사장이었던 홍성일 대표가 나와 미래에셋의 가능성을 믿고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박현주 1호는 2시간 30분 만에 500억 원 한도가 모두 팔려나갔다. 그날 나는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처음에는 미래에셋을 믿어준 고객이 고마워서, 그 다음에는 책임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투명성에 대한 고객의 요구가 이토록 강하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날 밤, 나는 내 인생관을 되돌아봤다. 소중한 고객의 자산을 정직하게 운용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시금 다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도 크게 따랐던 것 같다. 박현주 1호가 시판된 지 3개월 만에 현대증권이 바이코리아 펀드를 공격적으로 팔기 시작했다. 이 펀드는 발매 4개월 만에 10조 원의 돈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바이코리아가 공격적으로 주식을 사준 덕에 박현주 펀드에서 사들인 주식의 주가도 따라서 크게 올랐다.
당시 우리는 과도한 주가 상승을 염려했다. 그때 7명의 증권사 리서치 헤드를 만났는데 6명은 낙관적인 전망을, 1명은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많은 고민 끝에 한국 기업의 저평가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현주 2호 시리즈를 출시했다. 박현주 2호 시리즈는 미래에셋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 주었고, 또한 미래에셋의 미래 전략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최근 에는 미래에셋 박현주 재단을 설립, ‘생애 첫 자전거 지원 사업’을 통해 사회 공헌에도 앞장서고 있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中│김영사>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