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유업]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매일유업]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수진 기자
  • 입력 2013-05-27 11:14
  • 승인 2013.05.27 11:14
  • 호수 995
  • 4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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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에서 유제품 전문으로…공익사업 실천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스물한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한국 전역에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낙농개발의 토대를 닦은 매일유업이다.

“우유를 생산해서 농촌을 잘 살게 하고, 유제품을 통해 국민 식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다시 그 돈이 유대(乳代)로 농촌에 되돌아가는 순환과정이 더 없이 이상적인 사업이란 느낌이 들었다. 또 매년 보릿고개 때마다 온 국민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그 시절, 낙농업은 농민들에게 소득을 안겨 주고 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공식사업이었다.”

1971년 창업주 진암(晋巖) 김복용 회장(1920~2006년)은 정부가 운영하던 투자기업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를 인수했다. 세계은행과 정부와의 협정으로 김 회장이 인수하기 2년 전 설립된 정부투자기업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직전까지 제분회사 대표를 지냈던 김 회장과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낙농가공을 민간에 맡겨 제대로 운영해 보고자 했던 정부 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국내 굴지의 유가공 업체로 인정받는 매일유업의 새로운 태동이었던 셈이다.

당시 정부 측 대표로 김 회장 설득에 나섰던 이득룡 농림부 차관은 “한국낙농을 인수하는 일은 성공보다는 실패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탓에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민간인이 아무도 없었다”면서 “결과적으로 김 회장이 인수했고, 이는 우리나라 낙농업의 발전을 위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을 비롯해 당시 생겨났던 다양한 유가공업체들의 노력, 정부의 지원정책이 맞물리면서 1960년대 말까지 1kg에도 미치지 못했던 국내 1인당 연간 우유소비량은 1980년대 10kg, 2000년대를 넘어서는 60kg 이상으로 늘어났다.

1982년 12월, 매일유업이 주도한 제 1,2차 종합낙농사업은 10년에 걸쳐 완료됐다.

당시 22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한 국제연합(UN) 산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크노블 평가조사단장은 “매일유업이 한국 정부를 대신해 종합낙농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한국 전역에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낙농개발의 기반이 닦였다”고 평했다.

치즈·유기농 사업 도전

김 회장을 필두로 한 매일유업의 ‘낙농보국’ 신념이 본격적인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1970년대 사업 초창기 목장주를 설득하는 일을 비롯해 소를 들여오고 공장을 건설하는 일까지, 김 회장에게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낙농업은 일반 쌀이나 보리농사보다 훨씬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정부와 매일유업의 의지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1973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젖소를 들여오는 데 항공편을 이용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도 드문 시절에 수송기를 통해 소를 실어나르는 광경은 진풍경이나 다름없었다. 국내 유업계 최초로 시도한 일이었고 실어나른 대한항공 역시 처음이었다. 젖소를 들여올 때와 맞물려 같이 진행한 공장건설도 김 회장의 과감함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낙농업 기반이 약했던 상황에서 매일유업이 처음 공장지역으로 점찍은 호남지역은 불모지에 가까웠다. 고속도로가 없었던 탓에 신선함이 생명인 유가공업이 발달하기엔 무리였던 셈이다.

김 회장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이 같은 난관을 극복했다. 당시 국내 최초로 외국 특허기술인 테트라팩 포장기술을 도입한 것도 김 회장이었다. 1973년 준공된 광주공장의 주력상품이었던 이 테트라팩 우유는 최소 6개월 이상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된 신개념 제품으로 우유를 구경하기 조차 힘들었던 산간 도서지방까지 공급됐다.

당시 회사 관계자는 “이 기술을 도입한 결과 가동 7개월 만에 호남지역 우유소비량을 두 배 이상 늘렸고, 공장 운영 3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다”고 설명했다.

비행기로 실어나르고 외국 전문가를 불러들여 낙농가들에 직접 교육을 펼치는 등 김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1970년대 초 2만여 두에 불과하던 호남지역 젖소 사육두수는 2000년대 이후 54만 두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김 회장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세운 공장은 2003년 준공된 치즈전문공장이었다. 전라북도 가창군 상하면에 있는 ‘막내’ 공장은 국내 최초로 설립된 자연치즈 자동화 설비공장으로 자연·가공 치즈 생산설비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지금은 회사 내 중요한 수익원이 됐지만 당시 김 회장이 치즈사업을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회사 내부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불황으로 시장수요가 위축돼 있는 상황에서 고급 자연 치즈는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이 같은 반대에 대해 “치즈사업은 남아도는 우유문제를 해결함으로써 30여 년간 동반자 관계인 농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파트너였던 낙농가들이 우유가 남는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놓이자 해결사를 자처했던 것. 이웃 일본에서 몇 년 전 와인붐이 일면서 자연치즈 시장이 급격히 늘어났던 일도 충분한 이유가 됐다.

또한 그는 “나이 50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80대에 이른 만큼 치즈사업이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업이 되지 않겠느냐”며 임직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그의 진심은 통했고 상하공장이 세워졌다.

마지막 숙원사업을 이뤘다는 뿌듯함 때문이었을까. 김 회장은 준공 후 1년이 흐른 2004년 11월, 창업 초창기 낙농개발사업을 이끌었던 지도사원들의 모임인 매일유업 낙농OB팀 전원을 초청해 회동을 가졌다. 맨바닥에서 우리나라의 낙농산업의 기틀을 닦은 이들이었다.

김 회장은 이날 모임에서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며 이들의 노고를 높이 치하했다.

유기농 유제품 역시 개발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낙농가로서는 그동안 별 탈 없이 진행해 오던 일반우유 생산을 중단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젖소를 적응시키는 일 자체가 모험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초창기 때 40여 농가가 유기농에 도전했지만 15곳만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정도다. 이번에도 김 회장은 손실에 대한 보전을 약속하며 직접 농가를 설득했다.

목장 운영 외에도 유기농 사업을 위해서는 생산설비도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필요했다. 김 회장은 100억 원을 투자해 ESL시스템과 마이크로 필터레이션 공법 등 신규 설비를 갖췄다.

아울러 국내 유업계 최초로 유해 세균과 미생물을 완전히 길러 내주는 마이크로 필터레이션 공법을 도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기농 우유를 통해 매일유업은 새로운 시장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업체들의 추격 속에서도 50% 이상이라는 점유율을 유지했다.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

선친의 뜻을 이어받은 김정완 회장은 “당장 기업의 이익보다는 고창군의 농가들과 협력해 이 일대를 유기농의 메카로 만들고자 한다”며 “시장의 성장에 따른 유기농 낙농가를 추가로 발굴하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사우디에 조제분유 첫 수출

매일유업은 1981년 조제분유 6만여 캔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한 이래 조제분유, 이유식, 음료, 치즈, 두유 등 23개 제품을 20여 개국에 수출해 2009년 15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초창기 수출 과정에서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독자적인 판매망을 갖추지 못해 무역상을 통해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을 통해 수출을 시작한 매일유업은 파트너의 무리한 요구와 낮은 수익성으로 3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이 일에 대해 “자사 브랜드가 아니면 적극적인 마케팅활동을 할 수 없어 실적으로 국제 수출기반을 마련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중동지역에서 철수했지만 품질에 대한 신뢰는 남아 있었다. 처음 수출했던 제품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던 한 사우디아라비아 수입상이 매일유업의 제품을 다시 들여오길 원했던 것이다.

1987년 매일유업은 ‘매일맘마’라는 제품으로 다시 현지 시장에 들어갔다. 당시 중동지역은 글로벌 유가공 업체들이 이미 선점한 상황이었지만 매일유업은 새로운 브랜드를 앞세워 차츰 시장을 넓혔다. 그 결과 사우디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요르단, 예맨, 시리아 지역까지 판로를 확대했다.

철저한 현지 마케팅을 앞세워 매년 1000만 달러 이상의 분유를 수출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점유율 20%대로 3,4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멜라민 파동으로 식품안전에 민감해진 중국시장 역시 매일유업에겐 기회의 땅이었다. 중국시장에서 고급 분유시장이 활성화되기 전인 2007년 ‘앱솔루트’ 브랜드를 처음 출시해 이곳 고소득층, 상류층에 먼저 인정받았다. 이후 입소문을 타고 제품이 인기를 얻어 2009년에는 전년대비 2배 이상 수출물량이 늘어난 상태다. 이밖에 북미시장과 베트남 시장 등 전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에 특화된 제품을 수출하며 시장을 꾸준히 넓혀가고 있다.

김 회장을 필두로 한 매일유업의 이 같은 노력은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1999년 농업인의 날을 맞아 정부는 김 회장에게 기업가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시상했다.

이날 받은 금탄산업훈장은 정부가 농·축산분야에서 산업훈장을 제정한 이래 처음으로 주는 상이었다.

<끝>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FKI미디어>

박수진 기자 soojina602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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