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범희 기자]재계 총수와 그 가족들이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IV)’에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설립한 사실이 순차적으로 공개되면서 그 파장이 상당할 것으로 예고된다. 특히 이들의 탈세 여부가 주목받는다. 이들이 조세 피난처에 세운 법인들이 하나같이 부부 또는 부자 등 가족이 주주, 이사로 등재돼 있는데다 법인 설립 시점 전후에 해외 부동산 거래가 이뤄져 비정상적인 자금이동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세청도 지하경제 양성화의 일환으로 이곳에 은닉한 재산을 찾겠다고 혈안이 돼 있고, 박근혜 정부도 이번 사태를 그냥 바라만 보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어 조세피난처 리스트에 대한 전체 공개가 마무리 될 때까지 재계의 긴장감이 역력하다.
공개기업 불법 아니어도 타격 불가피
개인계좌 세무당국·검찰 조사 받을 듯
[일요서울]은 지령 990호를 통해 해외 최고 권력자들의 조세피난처 공개로 국내 재계 인사들도 노심초사중이라는 내용을 보도 한 바 있다. TJN(영국시민단체조세정의네트워크)이 발표한 보고서를 기초로 1970~2010년 한국에서 해외 조세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이 세계 3위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추후에 공개되는 명단에 한국인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고 전했다. 혹시 모를 불똥에 몸을 움츠리려는 재계의 움직임도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고도 전했다. 같은 시기 경제지들도 앞 다퉈 조세피난처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지만 정작 한국인 명단에 대해선 의혹만 제기할 뿐 특정인과 관계회사를 거론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재계가 느낀 파장은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버진아일랜드에 적법 절차를 거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금융거래 자산 내역을 신고한 후 세금을 납부한 기업들조차도 눈치보기에 급급했다는 것.
실제 버진아일랜드에서 페이퍼컴퍼니를 운영 중인 한 기업 관계자 또한 “모 기업의 자회사로 부동산 투자업을 하고 있고 세금 탈루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 운영 중인 사업체다”라고 말하면서도 기업명 공개만큼은 조심스러워 했다.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단어가 마치 비자금 조성을 한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일부 의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뉴스타파’ 13만여 명 분석 한국인 245명 밝혀
급기야 지난 22일 퇴직언론인으로 구성된 ‘뉴스타파’의 폭로는 그 우려를 현실로 나타냈다. 폭로된 기업의 불법 거래가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업에 대한 불신론은 물론 주가도 발표 전과 비교해 등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뉴스타파’는 ICIJ(국제탐사보도연맹)가 입수한 조세피난처 고객 13만 여명의 명단에 대해 1차 조사 결과 한국인 245명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났고 이 중에는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과 장남 조현강씨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수영(71) OCI 회장은 2004년 2월부터 2010년 6월까지, 6년이상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지냈다. 우리나라 경영계를 대표했던 인물 중 한명이라는 점에서 이 회장의 페이퍼컴퍼니 보유는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부인이 페이퍼 컴퍼니를 세운 것으로 공개된 조중건(81) 대한항공 고문은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의 동생으로 대한항공 사장과 부회장을 지내며 대한항공의 성장을 이끈 경영인이었다. 전경련 부회장도 지냈다.
명단 공개에 포함된 조욱래 DSDL 회장은 효성그룹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의 3남이자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막내동생으로 1980년 효성기계공업을 물려받아 기업을 경영해 왔다.
효성기계공업은 외환위기 등으로 인해 회사가 어려워졌으며 조욱래 회장은 동성개발, 지금의 DSDL을 경영하는 데 전념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업들은 모두 “회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며 관련 의혹을 부인했다.
기업 총수가 직접 거론된 OCI만이 “이 회장이 2006∼2008년 OCI 미국 자회사인 OCI 엔터프라이즈 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보수 100만 달러를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개인계좌로 관리했다”고 인정하고 해당 계좌가 2010년 폐쇄돼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계좌에 있던 돈은 모두 미국 내 계좌로 이체됐다고 해명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공개된 기업들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고, 가족 명의로 계좌를 운영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국세청이 민감한 반응이다. 대기업 사주들이 벌이는 역외 탈세의 전형적인 유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해운업체 사주가 국내에서 번 소득을 자녀에게 주려고 조세 피난처에 자녀와 직원 명의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뒤 이곳에 각종 선박 운송 대가를 챙기는 수법으로 소득을 해외로 옮긴 사실이 적발돼 433억 원을 추징했었다.
또한 세금추징에 있어서 혈안이 된 국세청에 ICIJ가 자료 일체를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한터라 바짝 화가 나 있는 상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지하경제 양성화’가 주요 정책과제가 됐고, 그에 따른 실행은 국세청이 짊어져야 한다는 관측이 일찌감치 예상 됐지만, 그 파고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막강하다는 게 일반적인 여론임에도 불구하고 자료 미확보로 인한 조사 진행이 더디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의 세수 확보 정책에 미운털이라도 박힐까 예민한 상태다.
조세전문가들은 “이번에 이름이 거론되는 대기업들이 단순 투자유치나 우호적인 비즈니스 관계형성 목적으로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의 특수법인들과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전혀 관련 없는 회사라고만은 할 수 없다”며 “조세당국이 면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앞으로도 대기업 오너 일가 등의 조세피난처 한국인 명단이 추가 발표될 예정이어서 재계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발표가 이어질 때마다 그 폭로 수위가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나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회사들에 대한 귀추는 물론 부정여론 역시 지속될 전망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