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책 등 솜방망이 처벌…기업 내 성범죄 부추겨
재발 막으려면 술 마시지 마? 재계금주령 확산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윤창중 스캔들’이 재계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엉덩이를 움켜졌냐’, ‘속옷을 입었느냐, 벗었느냐’를 두고 진실공방이 뜨거운 동안 재계의 성추행 사건들이 여론의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렸다. ‘국내 굴지 대기업 회장의 성접대 의혹’은 물론 ‘부하직원과 일반인을 상대로 한 성추행 의혹’까지 그 내용도 다양하지만 일부 매체에만 보도될 뿐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더욱이 미국 유명매체 뉴욕타임스가 ‘한국 정부기관과 기업에서 회식 시간 남성상사가 부하 여직원을 성추행 하고도 술 때문이라고 핑계 대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 파장은 재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미 일부 기업에선 “재발을 막으려면 술 마시는 문화가 사라져야 한다”며 ‘재계 금주령’이 확산 되고 있다.
“농담 잘못하면 3000만 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재계에선 공공연히 사용된다.
최근 모 기업 고위간부 A씨가 회식 자리에서 부하 여직원의 짧은 치마를 보고 “다리가 잘 빠졌네~ 모델이야”라고 말한 것이 논란이 돼 기업 내 여성위원회에 제소됐고, 그 결과 3000만 원을 피해여성에게 건네라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그 간부는 피해여성에게 공개적인 사과와 함께 회사를 사직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언론 기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논란이 됐던 윤중천 전 중천산업개발 회장의 성접대 의혹도 윤창중스캔들 뒤로 숨었다.
[본지 993호 대기업 회장 등장 ‘별장 성접대’ 미스터리] 제하의 기사에서 보도한 바 있듯, 모 회사 B임원이 등장했다는 내용의 기사는 일부 타 신문에도 유사 보도는 있었지만 후속기사는 사라졌다.
오히려 증권사 정보지에서만 B임원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명예회장 C회장, 현 회장인 D회장, 그리고 연예인 E씨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다.
해당 동영상 속 여성이 몽롱한 상태였다는 설이 함께 퍼지면서 술 이 아닌 다른 성분을 섭취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여성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고, 기업 총수가 직접 나서 ‘사실규명’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던 F사의 성추행 사건도 조용해졌다.
이 사건은 유명포털사이트를 통해 알려지면서 해당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진행됐고, 현재도 일부 사이트 등에는 이 내용이 남아있다. 더욱이 박근혜 대통령이 성범죄를 ‘사회 4대악’으로 규정하면서까지 성범죄 사건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사회적 모범이 돼야 할 대기업에서 고위간부가 여직원을 성추행했다는 이번 의혹은 상당한 파장이 예상될 것으로 전망됐지만 이마저도 쉬쉬 되고 있다.
해당 여성에 따르면 상사의 호출을 받고 집무실에 들어가자, 자신의 허리를 움켜잡고 자신의 오른쪽 무릎에 앉혔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나머지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려 하자 오히려 상사는 하던 일을 끝낼 것을 요구했고, 당장에라도 집무실을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지시에 따랐다고 한다. 불쾌감과 성적 수치심을 참고 일을 마친 후엔 자신을 껴안는 상사를 뿌리치려 했지만 힘에서 밀렸다. 이 같은 일이 있은 후 피해여성은 정상적인 근무가 어려워졌고 우울증과 수면장애에 시달리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았다. 이 간부는 재계의 몇 안 되는 샐러리맨 신화 중 한명으로 알려진다.
과거 언론사의 전례에 비쳐보면 이 정도의 내용이라면 신문에 보도가 이어질 법도 하지만 윤 전 대변인 탓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피해여성들이 상관의 불미스러운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피해여성은 “상사는 회사의 갑(甲)아니냐. 혹시라도 업무상 불이익이라도 받게 되면 그 피해를 누가 책임 질 거냐. 오히려 이런 일이 알려지면 여성이 받는 피해와 상처가 더 크다”고 하소연했다. 일부 알려진 성추행 기사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이유다.
갑의 횡포…불이익 받을까 쉬쉬
지난 14일 정선 강원랜드 직원 사이에 벌어진 성추행 파문을 보면 이 같은 피해여성의 사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원랜드 직원 G씨는 자신의 지위를 악용, 아르바이트생을 문자메시지를 통해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강원랜드에 따르면 G씨는 아르바이트생 H씨에게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2주에 걸쳐 61회 보냈다. 또한 채용을 대가로 키스를 요구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강원랜드 감사팀은 G씨의 정직 조치를 요구했고 회사 측은 B씨의 징계위원회를 열어 처벌 수위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지난 10일에는 대학 취업설명회에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가 여대 학생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특정 학교를 비하하는 발언을 해 빈축을 샀다.
숙명여대 ‘성공취업실전’ 강사로 초청된 애경(AK)홀딩스 인사팀 I차장은 수업 시간 중 특정 학생을 가리키며 “과거에 예쁜 학생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보다 예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대생은 피해 의식이 심하다”면서 “여대생들이 사회생활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남자들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수업에 참가한 한 학생은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었지만 혹시 해당 회사에 지원할 친구들이 취업하는 데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돼 문제 제기는 못 했다”고 밝혔다.
강의 후 학생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학교 측은 지난 13일 AK홀딩스에 해당 내용을 통보하고 다음 학기에는 다른 인사담당자를 섭외하기로 했다. 애경 측은 담당 상관이 직접 학교를 찾아 사과를 했고, 학교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 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